[우리문화신문=일취스님(철학박사)] 대개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일상의 대부분을 선과 악의 숲을 들락거리게 마련이다. 그런가 하면 때로는 자신이 선인이 되거나, 악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 악인이 선인인 척하는가 하면, 선인이 악인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무릇 모두가 원하는 선인으로 살아가기는 무척이나 어려운가 보다. 아무리 자신이 선인이라 하지만 마음은 항상 악의 숲을 들락거리기 때문이다. 다만 악을 좀 더 적게 지을 따름이지 자신도 모르게 죄를 짓고 살아가고 있어서다. 그렇기에 악에 물들어 버린 자는 선을 뒤로한 채 악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거소습불이여구(渠所習不以與狗)” 이는 “제 버릇 개 못 준다.”라는 말이다. 이처럼 자신의 못된 습성은 죽어서도 고치기 어렵다고 함이겠다. 어쩌다 악인이 뜬금없이 개과천선(改過遷善)했다고 하자. 이런 경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얼마 전 부산에서 ‘묻지 마’ 살인사건이 있었다. 텔레비전에 비친 화면에 외양으로는 우리네와 별반 다르지 않은 양순한 사람 같아 보이건만 어찌 인간의 탈을 썼는가 싶을 만큼 극악무도한 살인을 저질러 세간을 경악게 했다. “저렇게 곱게 생긴 여성이 어떻게 저런 살인을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서울 성곽길은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많은 사람이 찾는 서울의 명소입니다. 그 길을 걷다 보면 성북동에 만해 한용운의 유택인 심우장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단아한 한옥 건물인데 특이하게도 남향이 아닌 북향으로 지어진 건물입니다. 그 까닭은 한용운 선생님이 남향으로 지으면 조선총독부 건물이 보인다고 해서 숭인면의 산비탈 북향 터를 잡아 집을 지었다고 하지요. 그는 평생 일제의 만행에 맞서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변절자인 육당 최남선이 찾아왔을 때도 그는 호되게 혼을 내며 말하지요. "내가 아는 육당은 이미 죽어서 장례까지 치렀소" 한용운 선생님은 결국 북향집인 심우당에서 삶을 마감했는데요. 그때가 광복을 맞이하기 1년 전이니 안타깝기도 합니다. 대웅전 벽면에 심우도(尋牛圖)가 그려져 있는 절이 있습니다. 주로 선종에서 인간의 본성을 찾는 것을 소를 찾는 것에 견주어 그린 것인데요. 소를 찾아 나서다 소의 발자국을 보고 소를 발견하여 소를 데려다 기르다 소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면서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애써 찾은 소는 온데간데없고 자기만 남아 있게 됩니다. 결국에는 소와 함께 자기 자신마저도 잊어버리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곧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경상북도 문경읍 관음리에서 충청북도 충주시 미륵리로 넘어가는 해발 550여 미터의 재를 누가 하늘재라고 이름 붙였을까? 신라 초기 아달라왕 3년(서기 156년)에 이 고개를 열었다고 했고 당시에는 이 고개를 넘으면 백제나 고구려 땅이었을 터이니 아무래도 신라사람들이 붙였을 것이다. 하늘재를 문경 쪽에서 오르려면 지금 용흥초등학교가 있는 갈평리가 출발점이 된다. 필자는 초등학교 2학년까지 여기서 공부했다. 동행하는 이광호 연세대 명예교수는 3학년까지 다니셨단다. 추억이 서린 곳이다. 여기서부터 하늘재까지는 좀 아득하기는 하다. 사진에서 보듯 용흥초등학교 교정에서 보면 저 멀리 뾰족하게 봉우리가 보이는데 그것이 해발 1,165미터 주흘산의 주봉이고 그 험한 산들이 오른쪽으로 달려가다가 조금 낮아진 산등이에 계립령( 鷄立嶺)이란 이름으로 재가 서기 156년에 만들어졌으니 근 2천 년 전 일이다. 그때 이후 조선조 초까지 영남과 서울권을 잇는 대표적인 관문으로 활약했는데 550미터 높이라서 그리 높은 것은 아니지만 평지에서 넘으려면 하늘로 계속 오르는 것 같아서 하늘재란 이름이 생겼을 것이다. 문경이 자랑하는 시인 권갑하 씨에게 하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14) 문묘에서 세 왕께 예를 드리니 동궁과 성균관에 봄이 왔구나. 술 단지를 받든 모습이 엄숙하고 자리에 올라 글 읽는 소리가 새롭다. 나이 따라 양보하는 것은 주나라의 선비요 둘러앉아 듣는 이는 한나라의 빈객이라. 나는 직함을 가지고 태만히 한 일이 부끄럽지만 축하를 드리는 소리가 궁궐 안에 가득하네. 이는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입학식에 관리로 참석했던 이만수(李晩秀)가 쓴 시다. 효명세자의 입학식은 1817년 3월 11일, 성균관 명륜당에서 무척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날 입학식에는 세자를 교육하는 시강원의 관리들과 성균관에 소속된 유생들은 물론이고, 수천 명의 백성들이 길가로 몰려나와 “목을 길게 늘이고 손을 모아 송축하며” 구경했다. 이렇듯 왕세자의 입학례는 조선왕실의 기쁨이자 나라의 ‘경사’였다. 조선왕실의 공식 후계자가 학교에 갈 만큼 장성해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예식이니, 그 위상과 중요함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만하다. 김문식의 이 책, 《왕세자의 입학식-조선의 국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는 이런 왕세자의 입학식을 세세히 살펴보며 조선왕조가 후계자 교육에 얼마나 열성을 쏟았는지, 입학식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자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세상을 살면서 가장 공평한 것이 있다면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진실입니다. 모든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왔던 종래는 한 줌 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호화로운 묘지 속에 묻히거나, 이름 없는 풀섶에서 인멸되거나, 한 줌 재로 바람에 날려가거나, 영생원 한 귀퉁이의 유골함에 담겨 보관되더라도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태어나기 이전과 죽은 이후의 상태를 알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아무리 전생과 후생을 논하고 사후의 인생을 논하더라도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공자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제자가 "죽음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삶도 다 알 수 없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는가?"라고 대답한 것으로도 알 수 있지요. 또한 인생을 흐르는 강물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건 강물처럼 인생을 본질적으로 멈출 수 없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생 역시 도도하게 흘러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물은 한 번 흘러가면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강물 같은 인생에서 우린 지금, 이 순간을 치열하게 살아내야 하지요 우린 바쁜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2023년 4월 15일 자정 독일의 네카베스트하임 원전이 가동을 멈췄다. 이로써 1969년부터 54년 동안 원전 36기에서 전기를 공급받던 독일은 탈원전의 새 이정표를 세웠다. 독일의 탈원전은 정치인의 공적이라기보다는 50년 동안 꾸준히 원전을 반대한 시민운동의 결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73년 1차 ‘오일쇼크’ 때 서독(당시는 독일 통일 이전)에서 원자력 발전소는 에너지 주권을 위한 상징이 되었다. 1974년에 서독 경제부는 1985년까지 원전 50기를 새로 짓고 전력의 50%를 원전으로 공급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1974년에 프라이부르크 인근 새로운 원전 부지 주변 주민들이 처음으로 원전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원전을 반대하는 시민들은 점점 더 늘어났다. 1976년 독일 북부 브로크도르프에서는 전국에서 모여든 약 3만 명이 원전 반대 시위를 벌였다. 1979년 3월에 발생한 미국 펜실베니아주 스리마일섬 원전 사고를 계기로 독일 시민들은 원전의 안전성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97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소련과 핵무기 감축 협상을 진행하면서 서독에 중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하겠다는 결정을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요즘 걷기 열풍이다. 그것도 맨발로 걷는 게 바람을 일으켜 높지 않은 산길이나 잘 가꿔진 공원길에서도 맨발로 걷는 분들이 많이 보인다. 이럴 때마다 생각나는 곳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걷는 길로 가장 좋은 곳이라는 문경새재 관문길이다.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 걷고 싶은 길 1위로 뽑혔다는 소식을 듣고 늘 마음에 달고 있었다가 드디어는 걸어보기로 작심하고 도전해본다. 전날 밤을 새재 입구의 ‘국민여가캠핑장’에서 묵어 아침 햇살을 등에 지고 눈앞의 주흘산에서 안개가 걷히는 광경을 눈으로 맛보고는 우리는 걸음을 시작한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관도(官道)로서 영남지방에서 소백산맥을 넘어 서울로 가는 가장 큰 이다. 옛날 지역 수령으로 임명받은 신임관찰사가 구관찰사와 교대하는 곳, 영남의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서울로 올라가는 길의 흔적이 남아있고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 등 세 개의 관문이 있는 그야말로 역사적인 길인데, 무엇보다도 가장 걷기 좋은 길로 소문이 나 있다. 이곳 바로 옆 주흘산 동쪽 계곡이 고향인 필자로서는, 문경새재 이야기만 나오면 속으로 켕긴 것이, 실제로 문경 새재길을 다 걸어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게 모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191) “지금의 명나라가 있기 전, 그러니까 당나라보다 더 훨씬 앞선 시기인 초나라에 영왕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 영왕이 사랑했던 여인이 허리가 가늘고 아름다웠다고 하더구나. 그 이후부터 사람들은 허리가 가늘고 아름다운 여인을 가리켜 초요(楚腰)라 불렀단다. …(줄임)… 그래서 나는 마지막 글자는 미녀 갱(妔) 자를 써서 초요갱이라 지었다.” 허리가 가는 초나라의 미녀를 닮은, 조선 전기 한양을 떠들썩하게 한 으뜸 기녀 초요갱은 그렇게 탄생했다. 허구와 사실을 절묘하게 섞어 쓴 이 소설, 박지영이 쓴 《초요갱》에서 주인공 ‘다래’의 첫 정인(情人)인 평원대군은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며 그 이름을 지어 주었다. 실제 역사 속 초요갱은 어마어마한 ‘화제의 인물’이었다. 세종의 세 아들, 평원대군, 계양군, 화의군이 모두 그녀에게 반했다. 드라마에나 나올 만한 ‘조선 왕자 삼각관계’가 실제 역사에 펼쳐진 것이다. 황진이도 한 줄 나오지 않는 《조선왕조실록》에 무려 열여섯 번이나 기록이 실렸으니, 한 시대를 풍미한 으뜸 예인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처음 초요갱의 마음을 얻은 이는 세종의 7남, 평원대군이었다. 소설 전반부에서는 평원대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온달 열전이 실려있습니다. 거기에 온달이라는 인물을 소개하는 내용이 나와 있지요. "온달은 고구려 평원왕 때 사람이다. 용모가 못생기고 우스꽝스러웠으나 마음은 순수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늘 밥을 구걸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떨어진 옷과 신발을 신고 돌아다녔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바보온달이라고 하였다." 온달은 정말 바보였을까요? 온달이 바보였다는 주장은 우온달(愚溫達)이라는 표현 때문입니다. 나중에 장군이 되어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에게 쓰기엔 쉽지 않은 표현이지요. 가난하여 떨어진 옷을 입고 구걸했다고 해서 바보라고 치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실제로 발달장애인이나 낮은 지능의 소유자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진짜 지능이 낮다면 학문과 무예를 익혀 고위직에 오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찌 되었거나 어리석은 자의 우직함의 대명사로 불리는 것이 온달입니다. 그는 삼국이 치열한 영토 전쟁을 벌였을 때 고구려 장수로 명성을 크게 얻은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 우직함이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입니다. 민주 사회에서 갈등과 대립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심리학자의 말에 따르면 사랑의 유효기간은 길어야 3년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각종 행복 물질이 쏟아지게 되지요. 도파민, 엔도르핀, 세로토닌이 그런 호르몬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관계가 시들해지고 나면 더 이상 행복 물질이 쏟아지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럼, 사랑은 끝난 겁니다. 그러니 부부가 2~30년을 함께 살기는 매우 어려운 일임은 틀림없습니다. 인간의 뇌 속에서 행복을 만드는 물질은 엔도르핀입니다. 엔도르핀은 과거의 행복한 추억 때문에 생기는 게 아닙니다. 지금 내가 즐거워야 엔도르핀이 형성됩니다. 인생을 살면서 오늘, 지금, 이곳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이 옳습니다. 지금이 즐거워야 행복 물질이 분비되니까요. 내가 아파트를 나서면 인사성이 바른 경비원을 만납니다. 그는 아무리 봐도 힘든 삶인데 나보다 여유롭습니다. 나보다 늙었고 부양가족이 많아 부담 속에 살 텐데도 행복해 보입니다. 옛날엔 가난했어도 행복 지수가 대체로 높았습니다. 그건 가진 것에 만족했으니까 가능한 일이지요. 절대적인 기준에서 보면 우리나라 사람은 무조건 다 행복해야 옳습니다. 1960년대보다 훨씬 잘살고 있으며, 죽으로 연명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