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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놔주지 않아 87살에야 은퇴한 황희

황희의 사직파동 - ②
[‘세종의 길’ 함께 걷기 73]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은 생각하는 정치가다. 그렇다면 세종의 일상 정치를 통해 세종의 생각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중 하나로 황희 정승의 사의 파동에 대한 대응이다. 황희(1363~1452, 호 방촌-厖村)는 개성 출생으로 우왕 시절 138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뒤 이후 태조 이성계의 요청으로 태조 3년 성균관학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사직 파동

이후 황희의 사직 파동은 여러 번 있었다. 1415년 송사문제, 1418년 양녕 옹호, 1427년 서달 사건, 1430년 제주 말에 연관한 태석균 등의 사건이다. 그는 모질지 않은 성품 탓에 청탁 뇌물 수수 등의 비리사건에 자주 연루되었다. 세종 10년에 황희가 박용 등의 문제로 사직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자 사퇴파동이 있었다. 그러나 복직되고는 했다.

 

영의정 재직 중 파주 반구정(伴鷗亭)에 은거하다가 1431년 복직되었다. 69살 되던 1431년(세종 13년) 9월에는 영의정부사 자리에 올랐다. 14년에는 황희가 1363년생이니 70살이고 세종은 36살이다. 당시는 ‘인생 70 고래희’라고 하여 70살까지 사는 사람이 드물 때다. 이제는 고령인 까닭으로 사직서를 올린다.

 

 

"엎드려 생각건대, 신은 성질이 어리석고 더러우며 학술은 거칠고 꼼꼼치 못합니다. 태종이 후하게 뽑아 주신 뜻을 입어 여러 어진 이들과 섞이어 벼슬에 나아갈 수 있었으나, ... 그대로 우물쭈물하며 지금에 이르도록 애써서 관직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귀는 멀고, 눈도 또한 어두워서 듣고 살피는 일이 어려우며, 허리는 아프고 다리는 부자유하여 걸음을 걸으면 곧 쓰러집니다. 대체로 원기가 쇠약하여진 것이 원인이 되어 드디어 온갖 병이 침노하게 된 것입니다.

 

더군다나 신은 올해로 이미 만 70살가 됩니다. 늙으면 벼슬에서 물러나는 것은 나라에 떳떳한 규정(規定)이고, 병들어서 한가롭기를 바라오니 그 직에서 벗어나도록 허락하소서. 신은 남은 해[餘年]의 생명을 조금 연장하기를 바라겠습니다." (《세종실록 》14/4/20)

 

사직서에는 쓰는 규칙 같은 것이 있다. 우선은 자신을 비루할 정도로 낮춘다. 그리고 상대를 찬양하고 높인다. 모든 것은 은혜에 힘입었을 뿐이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펼친다. 아프니 쉬며 목숨을 연장하고 싶다는 것이다.

 

세종은 윤허(允許)하지 아니하고, 비답(批答)하기를,

 

"임금은 보필(輔弼)하는 재상의 어짐에 힘입는 것이니, 어찌 그 물러가고 나아가는 일이 쉡게 할 수 있겠는가. 생각건대, 경은 삼가 삼사(三事)를 밝히니 진실로 나라를 다스릴 만한 그릇으로써 모든 관원을 마땅하게 바로잡았도다. ... 몸을 보전하라는데 명철하여 갑자기 물러가 한가롭게 지내기를 청하는가 ...더군다나 경은 나이가 아직 8, 90살에 이르지는 않았으며, 병도 치료할 수 없을 만큼 굳어짐에 이르지는 않았으니, 만약 병이 일어난다면 마땅히 약을 써서 치료하면 될 것이요, 경의 자신을 위한 계책으로는 좋겠지만 그리하면 나의 의지할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힘써 옛사람이 물러나가 휴양할 뜻이 없었던 것을 생각하라. 사직하려고 하는 일은 당연히 윤허 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세종실록 》14/4/20)

 

황희 아프다

다시 세종 21년까지 연장된다. 6월 초에 영의정 황희가 도승지 김돈에게 "황희가 하혈병이 일찍이 있었는데, 근래에 다시 일어나서 귀와 눈의 어두움이 날마다 더하여 임무를 감당할 수 없으므로 전(箋, 서류에 간단한 의견을 써서 덧붙이는 쪽지)을 올려 사면하고자 하였다. 또 근래에 노병(老病)이 더욱 심하고 몸이 구부러져서 걸으면 넘어지며, 귀가 어둡고 잊음이 많으며 정신이 혼매(昏昧)합니다. ...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나이에, 벼슬에 머물면서 일없이 도당(都堂)에서 밥 먹으니 얼마나 뻔뻔스러운 얼굴인가?“ 하였다.

 

김돈이 이 뜻을 아뢰니, 임금이 묻기를, "영의정이 과연 정신이 흐리고 눈이 어두운가? 네가 보는 바는 어떠하냐? 모름지기 벼슬을 물려야 마땅하겠느냐?" 하였다. 김돈이 아뢰기를, "신의 소견으로는 귀가 어두움은 사실이오나, 정신은 혼매한 데 이르지는 아니하였사옵니다. 도덕(道德)과 지량(智量)은 세상에서 보기 드문 바이오니, 비록 늙고 병들어 허리가 굽었을지라도 벼슬을 물리는 것은 마땅하지 아니하옵니다. 집에 누워서 대사(大事)를 처결하게 함이 또한 옳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도다." 하였다. (《세종실록 》 21/6/11)

 

참으로 세종과 황희의 인연은 끈질기다. 집에 누워서 일을 처리하라 하니.

 

 

사직까지

세종은 비만한 체구에 운동은 싫어하면서 육식과 학문을 좋아하는 버릇 때문에 종기(背浮腫)ㆍ소갈증(消渴症,당뇨병)ㆍ중풍ㆍ안질(眼疾) 등을 평생 앓았다. 그러나 세종이 왕권의 상당 부분을 의정부로 옮기도록 결심한 배경은 당시 의정부영의정이 황희(黃喜)였기 때문이다.

 

황희는 여종들의 다툼에 ‘네 말이 옳고, 네 말도 옳고, 또 네 말도 옳다’고 했고, 종의 자식들이 수염을 잡아당겨도 웃었다는 일화로 유명하였다. 어떤 젊은 성균관 유생이 길에서 자신을 향해 "정승이 되어서 임금의 그릇됨을 잡지 못한단 말이냐"라고 면박하자 도리어 기뻐했다고 《연려실기술》에 전한다.

 

의정부 영의정으로 재직하는 동안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을 추진했고, 양반 가문 자손 중 천첩 소생의 천역(賤役) 면제를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또한, 국방강화 정책을 펼쳐 야인과 왜 방어책을 세워 김종서와 최윤덕 등을 적극적으로 중용케 하였고, 그들을 통해 4군6진을 개척하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

 

임금과 중신들 사이 마찰을 중화시키는 등 세종을 도와 성세를 이룩하는 데 노력했다. 그가 은퇴하려 하자 병으로 쇠약해진 세종은 여러 번 은퇴를 만류하였다. 1449년(세종 31) 87살로서 은퇴하고, 고향에 내려가 있다가 먼저 세종의 임종을 보게 되었다. 18년 동안 황희는 명재상으로서 세종을 잘 보필하여 태평성대로 이끌다가 1452년 음력 2월 8일에 죽었다. 당시 향년 90살이었다.

 

그의 업적은 다양하다.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 면제, 국방강화(야인과 왜 방어책), 4군6진 개척, 문물제도의 정비ㆍ진흥 등의 업적을 남겼다. 또한, 국가의 법이 혼란스러운 것을 수정 보완하여 《경제육전(經濟六典)》을 펴냈다.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모든 백성으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시문에도 뛰어났으며, 몇 수의 시조 작품이 현재 전해진다. 여기 시조 한 수를 소개한다.

 

대초볼 붉은 골에

 

대초 볼 붉은 골에 밤은 어이 뜯들으며,

벼 벤 그루에 게는 어이 나리는고.

술 익자 체장사 돌아가니 아니 먹고 어이리.

 

그가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가 자연에 묻혀 살 때 지은 것이다.

 

저서에 《방촌집(厖村集)》이 있다. 그가 죽은 뒤 1452년(문종 2년) 세종묘(世宗廟)에 함께 신주를 모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