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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금강산은 답답하다

만나러(逢) 온다(來)는 뜻의 봉래산(逢來山)이면 좋을 듯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249]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山上有山天出地 산 위에 또 산이 있어 하늘 가득 땅이로구나

水邊流水水中天 곳곳에 물이 흐르고 그 속에 또 하늘이 있네

蒼茫身在空虛裏 내 몸은 아득하고 텅 빈 하늘 속에 있으니

不是烟霞不是仙 내가 저녁 노을인가 혹은 신선인가 모르겠네

                               ... 「遊楓嶽和車紫洞 풍악에서 놀며 차자동에게 화답하다」

 

​금강산이 좋아서 자신의 호도 봉래(蓬萊)라는 금강산의 여름 이름을 쓰던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이 금강산에 들어가 남긴 시 가운데 하나다.

 

금강산 하면 양봉래(楊蓬萊)를 생각할 정도로 그는 금강산을 노래한 많은 시를 썼고 멋진 바위에 글을 새겨 놓았다. 금강산 인근의 회양군수로 있을 때는 금강산이 자기 집 정원 격이었다. 그가 당시 만폭동 바위에 새겨 놓은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岳元化洞天)”의 여덟 글자와 “만폭동(萬瀑洞)” 세 글자는 지금도 남아 있다.

 

 

어느 날 금강산 절승의 하나인 불정대(佛頂臺)에 올라 장쾌한 십이폭포(十二瀑布)를 바라보며 드디어는 눈앞의 자연과 하나가 된다.

 

山岳爲肴核 높고 낮은 산들을 안주 삼고

滄溟作酒池 동해 바다 물로 술 빚어라.

狂歌凋萬古 취해서 실컷 노래 부르고

不醉願無歸 취하지 않고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근엄한 유학자로 알려진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19세에 출가(出家)하여 금강산에 들어가서 도를 닦은 일은 유명하거니와 그때 너무나 멋진 경치에 흠뻑 빠져 한 줄에 5자씩 600줄(句)의 장편시를 지어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칭송한 적이 있다. 한자어로 3천 자가 되는 엄청난 길이의 이 시에서 율곡은 이런 멋진 산을 세계에 알릴 문인이 없어 금강산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것을 안타까워했다.

 

一萬二千峯 일만 이천의 봉우리가

極目皆淸淨 눈길 닿는 데마다 모두 맑기만 하여라

浮嵐散長風 아지랑이는 휘몰아친 바람에 흩어지고

突兀撐靑空 우뚝한 봉우리는 푸른 허공을 버티었네

遠望已可喜 멀리서 바라만 보아도 기쁜데

何況遊山中 더구나 산에 다니며 보는 것이랴

欣然曳靑藜 흔연히 지팡이를 잡았는데

山路更無窮 산길은 다시 끝이 없어라

                                ... 이이(李珥), <풍악산을 읊다>

 

   

 

사람들이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찬탄한 것은 신라시대 최치원부터 시작되었으나 본격으로 작품이 창작된 시기는 고려 후기를 거쳐 조선조에 들어와서다. 고려중기 이후, 조선후기까지 많은 유학자와 승려들이 세속의 먼지를 떨치거나 불교적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그렇게 해서 627여 명이 문학작품을 남기고 한시 작품은 만 3천여 수에 이르며, 산문 작품도 422여 편이라고 양승이 씨가 박사학위논문 <금강산 관련 문학작품에 나타난 유가적 사유 연구 2011.12.>에서 밝히고 있을 정도로 금강산에 대한 찬탄은 세계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많다. 겸재 정선, 소정 변관식 등 유명 화가들이 묘사한 금강산 그림도 수없이 많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마음 놓고 금강산을 찾아갈 수 있었다.

 

 

광해군 때 여진족 후금의 압박에 따라 만주에 파견된 강홍립 장군의 종사관으로서 후금에 포로가 되었지만 항복하지 않아 고초를 겪은 이민환(李民寏, 1573~1649)의 부친은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이광준(李光俊 1531~1629)인데, 서른살 때인 1603년 부친과 형 이민성(李民宬), 그리고 간성군수인 최립, 흡곡현령인 (한호韓濩, 호 석봉 1543~1605) 등과 함께 금강산을 여행했는데 3부자가 함께 천하의 명산을 함께 다녀온 것으로 해서 세상 사람들의 부러움을 온통 받았고 그때의 여행 기록이 《유금강산권(遊金剛山卷)》이란 시첩에 글과 그림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율곡의 35년 선배인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은 1542년에 강원도의 이재민 구휼을 위해 금강산 근처에 갔으면서도 바쁜 일로 해서 구경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巨嶽臨東溟 큰 멧부리 동해에 임하여,

雄雄半天出 씩씩하게 하늘로 반이나 솟아 있네.

日月互蔽虧 해와 달 번갈아 서로 가리고 이지러지는데,

靈仙紛宅窟 신령스러운 선인들 분분히 굴집을 지키네.

我欲往問之 내 가서 그들에게 물어보고 싶지만,

恨無丹竈方 속세의 벼슬에 얽매여 심히 울적하네.

塵纓甚拘鬱  한스럽긴 단약 처방 몰라서,

飛去宿願畢 아가 숙원 풀 수 없는 것이라네.

                                                             <金剛山>

 

 

퇴계는 사정이 허락지 않아 못 갔지만 일제로부터의 해방 이전까지는 갈 수 있었고 그 뒤 남북 분단으로 막혔던 금강산 관광은 남북화해 분위기에 따라 1998년 드디어 시작되자 많은 이들이 직접 현지에 가서 눈으로 금강산을 보는 안복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다가 10년 만인 2008년 7월11일 금강산 관광객 박양자 씨가 북한 측의 총격으로 사망한 뒤 금강산 관광은 중단되었고 그 후 벌써 16년이 흘렀구나.

 

이제는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금단의 땅이 되어버렸으니 죽기 전에 부모님들을 금강산 구경이라고 시켜드리고 싶은 이 땅의 많은 아들딸의 염원은 풀어질 수가 없구나. 이것이 꼭 오늘이 어버이날이라서만이 아니다. 조선시대 이민환처럼 부친을 모시고 명승을 함께 구경하고 싶은 것은 어디 그 한 사람의 소망일 것인가?

 

그렇게 막힌 지 16년이 넘는 금강산 관광, 나아가서는 남북한이 화해하고 고향에 남은 가족들의 소식을 듣고 서로 왕래할 꿈은 이제 영영 이루어지지 않을 것인가? 아름다운 금강산의 봄이 무르익어 사방에 푸르른 산과 꽃들이 피고 계곡에는 맑은 물이 흐르는 그 선경을 올해도 보지 못하고, 금강산 전문 사진가인 이정수 씨의 사진으로 대신 보고 지나야 하는 우리 국민의 처지가 너무도 한심하구나. 금강산도 답답할 것이다. 누가, 왜 나를 사람들이 못 보도록 할까?

 

 

봄을 이렇게 보내고 나면 여름이라도 기대를 해볼까? 여름 금강산 이름은 봉래(蓬萊)라고 한단다. 원래는 '쑥과 명아주'를 이어 부르는 말이지만 중국인들은 바다 동쪽에 불로초가 많이 나는 산이란 뜻으로 이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데, 갈라진 남과 북의 사람들이 이곳에 만나러(逢) 온다(來)는 뜻의 봉래산(逢來山)이라도 되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어버이날에 금강산에 효도관광을 못 시켜드리는 불초 자식의 한(恨)을 대신 이렇게라도 외쳐보며 여름 이후 기적적으로 남북관계라 풀리기를 다시 학수고대해 본다.

 

 

 이동식

 

전 KBS 해설위원실장

현 우리문화신문 편집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