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정석현 기자] 3. 광화문 연가 - 김경균 광화문시대 앞 네거리 가로등 ▲ 작품 시안 작가의 말 광화문 연가라는 대중가요 가사를 작품으로 표현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노래를 부르게 한다. ** 김경균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디자인과 교수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과, 동 대학원 졸업 일본 다마미술대학원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전공 아시아 크리에이티브 아카데미(ACA) 총감독
[그린경제/얼레빗 = 정석현 기자] 광화문시대 앞은 잠깐 쉬다 갈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이 공간을 살려주기 위해서는 공간에 이름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ㅅ으로 된 낱말 중 잠시 쉬어가는 공간이라는 의미의 쉼을 입체 조형물로 제작하여 설치하였다. * 구슬기 - 서울여대 조형연구소 연구원 서울여자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타이포그라피 전공 제16회 한글 글꼴디자인 공모전 버금상 수상 경상북도 문화콘텐츠디자인공모전 전통문양부분 입상
[그린경제/얼레빗 = 정석현 기자] 서울에 있던 흥천사에 있던 종의 명문이다. 조선 전기에 억불책이 지속적으로 추진되는 중에 불교를 일시 보호하였던 세조대의 사리 감응에 따라 조성한 종이다. 회암사와 궁중에서 여러 차례 사리가 분신하는 감응이 일어나 얻어 모두 102과의 사리를 얻게 되자 세조는 능엄경을 번역하고 국가와 일체 혼령을 위해 불상을 만들어 이를 경축하고는 흥천사 사리각에 사리를 봉안하고 중생을 인도하려는 뜻에서 종을 만들어 봉안하도록 하였다. 종명은 세조 8년(1462년)에 한계희(韓繼禧)가 왕명에 따라 짓고 정난종(鄭蘭宗)이 썼다. 종을 따라서 빙 돌며 한 줄에 20자 정도의 명문을 나란히 이어서 양각으로 새겼다. 후반부에 효령대군을 비롯한 종실들과 당대 상층 관료들이 거의 망라된 조성 관련 인물들의 명단이 있고, 제작자들의 이름도 모두 밝혀져 있다. 탁본이 한국금석문대계 권6에 수록되어 있다. 연대: 1462년(세조8년) 보물: 제1460호 출토지,소재지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595번지 출처한국금석문종합정보시스템
[그린경제/얼레빗 = 정석현 기자] 한글가온길에서 한글숨바꼭질을 해볼까? (주)컬쳐앤로드 문화유산활용연구소(소장 이동범)가 서울시의 지원으로 꾸민 한글숨바꼭질은 참여자에게 재미와 함께 한글의 의미를 깨우쳐 주는 좋은 놀이다. 온 식구가 함께 세종문화회관 주위와 한글가온길에서 함께 즐길 한글숨바꼭질 작품들을 소개한다. 모두 18작품이다. 1. 글꽃이 피었습니다. - 강병인 ▲ 글꽃이 피었습니다 시안 - 강병인 ▲ 엘리베이터 꼭대기에 세운 글꽃이 피었습니다 ▲ 글꽃이 피었습니다 ▲ 신기한듯 시민들이 글꽃이 피었습니다를 바라보고 있다. 작가의 말 일명 옥상으로 올라간 한글의자. 꽃 그리고 그대는 봄이오 꽃이라. 평소 즐겨 글씨를 쓰고 좋아하던 말을 입체적인 의자로 만들었다. 한글에게서 우리는 쉼을 얻는다는 것이 작품의 주제이다. 그렇지만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우리 모두는 '언제나 따스한 봄이오, 피어나는 꽃'임을 잊지 말자라는 것이다. ** 강병인 :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광고디자인 석사 현 강병인캘리그라피연구소 '솔통' 대표 2012년 은탑산업훈장 수상
[그린경제/얼레빗 = 정석현 기자]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보림사의 본존불인 철조 비로자나불상(毘盧舍那佛像)은 858년(헌안왕 2) 조성된 대규모의 불상으로 국보 1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철불상의 왼쪽 어깨 뒷면에 명문이 구양순체 계통의 해서로 양각되어 있다. 이 불상은 신라 하대에 조성된 철불 중 명(銘)이 있는 최초의 예이자 규모가 큰 대표적인 불상이다. ▲ 보림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조상기 명문에 조성 연대를 불멸(佛滅) 후 1808년이라 밝혀 놓아 우리 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해 온 북방설의 불멸 기원(서기전 949년)이 이때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보림사의 후원자인 김수종과 헌안왕이 불상의 조성자로 되어 있다. 연대: 통일신라 858년(헌안왕2년, 당(唐) 선종(宣宗) 대중(大中)12년) 국보: 117호 불상 높이 273.5cm 출토지와 소재지: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45 보림사 출처: 한국금석문종합정보시스템
[그린경제/얼레빗 = 정석현 기자] 1500년(연산군 6년)에 후손인 황사장(黃事長)이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금승리 산 1에 건립한 황희(黃喜)의 신도비이다. 비의 찬자는 신숙주(申叔舟)이고, 안침(安琛)이 글과 제액(題額)을 썼다. 비문에 의하면 황희(13631452년)는 본관이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旽村)으로 아버지는 자헌대부 판강릉대도호부사(資憲大夫判江陵大都護府使) 군서(君瑞)이며, 어머니는 김우(金祐)의 딸이다. 1376년(우왕 2년)에 음보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된 후, 1383년 사마시1385년 진사시에 각각 합격하였다. 그리고 1389년에는 문과에 급제한 뒤, 1390년(공양왕 2년) 성균관학록에 제수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다가, 1394년(태조 3년) 조정의 요청과 두문동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학관으로 제수되면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파직되기도 하였으나 계속 증직하여, 1431년에는 영의정부사에 오른 뒤 1449년 치사(致仕)하기까지 18년 동안 국정을 통리(統理)하였다. 그리고 치사한 뒤에도 중대사의 경우 세종의 자문에 응하는
[그린경제/얼레빗 = 정석현 기자] 하늘의 뜻으로 세워진 조선! 세종대왕은 임금과 신하, 그리고 백성이 한데 어울려 서로 믿고 질서를 지키는 가운데 나라가 유지되기를 바랐고, 무엇보다도 어려움 없이 영속되기를 원했다. 봉래의(鳳來儀)는 그런 꿈을 우리 향악에 담아 만든 가(歌)‧무(舞)‧악(樂) 공연예술이다. 나라가 태평하기 위해서는 백성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우리의 독자적인 글자인 훈민정음을 만들었고, 백성과 조화로운 관계를 만들어야 왕조가 탄탄해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음악을 만들어 정치에 활용했다. 이 세종음악을 조규익 숭실대학교 교수문숙희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책임연구원손선숙 한국문예연구소 전임연구원이 만나 3년에 걸쳐 복원하였다. 이때 이들은 정간보에 숨어있는 리듬의 비밀을 캐내고, 무보 용어 뒤에 숨어있는 춤사위를 밝혀냄으로써 디디어 봉래의의 윤곽을 더듬어볼 수 있데 되었다. 이제 그들은 복원한 봉래의의 예술과 철학세계를 사람들에 보여주고자 오는 11월 21일(목) 저녁 7시 30분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주최, 한국연구재단고음악복원연구화 노래박물관봉래의궁중정재아카데미 후
[그린경제/얼레빗 = 정석현 기자] 나는 동사(Verb)다. 모든 것이 동사가 되어 살아 움직일 때 의미를 갖는다. 사랑과 평화를 위해 싸우고 윤리 도덕을 지키며, 진리를 새기고 봉사를 하며 신뢰를 쌓아야 한다. 이런 가장 역동적인 동사의 역할을 예술이 맡아야 한다.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미술가 임옥상 화백은 이렇게 말한다. 그 한바람 임옥상 화백의 초대전이 노원문화예술회관 4층에 자리하고 있는 노원아트갤러리에서 오는 11월 6일(수)부터 20일(수)까지 보름 동안 열린다. 민중미술가로 널리 알려진 임옥상 화백의 작품들은 회화적 아름다움은 물론 미술언어 혹은 예술언어가 말해야 하는 사회적 역할에 대한 분명한 소명의식을 담고 있다. 이번 전시회가 지역문화공간에서 개최하여 주민들에게 한걸음 더 다가가는 시간이 되고, 또 자라나는 미래의 주역인 학생들에게도 교육적인 전시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임옥상연구소 관계자는 밝혔다. 전시회 입장은 무료이며 전시기간 동안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문을 연다. 기타 자세한 문의는 02) 951 - 3355로 하면 된다.
[그린경제/얼레빗 = 정석현 기자]대구(大邱) 동화사(桐華寺) 경내에 있는 삼층석탑에 대한 기록. 금당암동탑(金堂庵東塔)은 그 축조 연대는 정확치 않지만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현재 보물 제248호로 지정 되어있다. 이 탑은 처음 축조된 이래 1번 옮겨지고 3번에 걸쳐 중수(重修)되었다. 제일지석(第一誌石)에 의하면, 탑은 원래 처음 강당 남쪽에 세워졌는데, 신라 헌강왕(憲康王) 1년(875년) 을미(乙未) 9월경에 금당(金堂)아래에 새로운 탑이 조성되었기 때문에 도인대덕(道印大德)․성가대덕(聖迦大德)등이 중심이 되어 금당 위로 옮겼으며, 이 과정에서 탑 속에서 많은 사리를 담은 구리상자가 나왔다고 한다. ▲ 동화사금당암동탑지(桐華寺金堂庵東塔誌) 이후 중종(中宗) 39년[가정(嘉靖) 23년](1544년) 갑진(甲辰)에 도수(道修)와 대일(大馹)등이 중심이 되어 처음 중수하였는데 이때 사리 1천여매가 나왔다고 한다. 제이지석(第二誌石)에 의하면 정조(正祖) 18년(1794년) 갑인(甲寅)에 2번째로 중수되었는데 이때 사리를 은합(銀盒)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제삼목제지판(第三木製誌板)에 의하면, 고종(高宗) 34년(1897년) 임인(壬寅)에 태희(
[그린경제/얼레빗 = 정석현 기자] 1963년 경상남도 의령군(宜寧郡) 대의면(大義面) 하촌리(下村里)의 돌무더기 속에서 광배 불상 대좌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발견된 것인데, 지금은 국보 119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전체 높이는 16.2cm로, 불신(佛身)대좌(臺座)광배(光背)가 함께 주조되었는데, 이 중 대좌는 하연부(下緣部)가 넓은 원통 위에 연판(蓮瓣)을 두고, 그 위에 원추형을 엎어둔 것 같은 족좌가 있어 불신을 받들고 있다. 불신은 정면직립의 단구상(單軀像)인데, 높이는 9.1cm이고 두꺼운 통견의(通肩衣)에 시무외 여원인(施無畏與願印)을 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북위(北魏)불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면서도, 북위불처럼 법의의 띠매듭 끈인 이른바 신(紳)을 길게 내리지 않고 있는 등, 나름대로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 연가7년명금동여래입상(延嘉七年銘金銅如來立像) 광배는 주형(舟形)으로 높이가 12.1cm인데,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구분하지 않고, 전면에 화염문을 새겨 놓았다. 명문은 광배의 뒷면에 육조풍의 해서로 음각되어 있으며, 모두 4행 47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은 고구려 낙량동사(樂良東寺)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