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경기, 충청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판소리 중고제(中古制)와 이를 지켜 온 심정순(沈正淳)가문의 이야기를 하였다. 심정순은 1873년, 충남 서산에서 심팔록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비교적 늦은 나이에 악인(樂人)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이해조의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등이 그의 구술로 신문에 연재되면서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그는 서울 구파극의 중심이었던 서울 장안사 극장에서 활동했으며, 이 무렵 예단(藝壇) 일백인(一百人) 편에는 심정순에 관하여“그는 여러 광대 중에도 가장 품행이 단정하고 순실해서 집안이나 밖에서 열심 근면하고, 한 개의 흠절을 잡을 곳이 없다.”라는 내용이 실렸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번 주에는 대전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동초제 춘향가의 예능보유자, 고향임(高香任) 여류명창이 장장 8시간 30분 동안, 판소리 <춘향가>를 완창하면서 청중을 울리고 웃긴 이야기를 소개하기로 한다. 지난해 12월, 10일이었다. 국악의 중심, 서울 서초구에 있는 국립국악원 우면당 무대에서는 고향임 명창의 완창 소리판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개구리가 칩거 생활에서 풀려나며 파안대소하네 반기룡 시인의 “경칩”이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셋째 ‘경칩(驚蟄)’이지요. 원래 이름은 중국 역사서 《한서(漢書)》에 열 계(啓) 자와 겨울잠을 자는 벌레 칩(蟄) 자를 써서 ‘계칩(啓蟄)’이라고 했었는데 뒤에 한나라 6대 황제인 경제(景帝, BC 157~141)의 휘(諱, 곧 이름)에 '啓'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어 이것을 피하려고 비슷한 뜻의 '驚(경)'으로 바꾸었습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겨울잠 자던 동물은 음력 정월에 활동하기 시작하는데, 절기로는 경칩에 해당하며, 음력 9월에는 겨울잠을 자기 시작하는데 절기로는 입동(立冬)에 해당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기(禮記)》 「월령(月令)」에는 “이월에는 식물의 싹을 보호하고 어린 동물을 기르며 고아들을 보살펴 기른다.”라고 되어 있지요. 이는 경칩이 만물이 생동하는 시기이므로 이를 보호하고 관리하는 때임을 뜻합니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임금이 농사의 본을 보이는 적전(籍田)을 경칩이 지난 해일(亥日)에 선농제(先農祭)와 함께 행하도록 정하였으며, 경칩 이후에는 갓 나온 벌레 또는 갓 자라는 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시즈오카현 이토시(静岡県伊東市)의 스사노오(素盞嗚神社)에서는 어제 3일, 히나마츠리를 맞이하여 무려 118단짜리 히나인형을 장식하여 ‘일본 최고의 히나마츠리’ 행사를 했다고 마이니치신문이 보도했다. 보통 히나인형을 3단 또는 5단으로 하는 장식하는 것에 견준다면 118단짜리는 가히 ‘일본 최고’라 할 만하다. 히나마츠리(ひな祭り)란 딸(여자아이)이 있는 집안에서 해마다 딸의 건강과 무사 성장을 비는 일본 전통 행사로 3월 3일, 어제 전국에서 행사를 가졌다. 일본에서는 딸아이가 태어나면 할머니들이 ‘건강하고 예쁘게 크라.’라는 뜻에서 히나인형을 선물하는 것이 보통이다. 히나마츠리는 혹시 모를 미래에 딸에게 닥칠 나쁜 액운을 덜기 위해 시작한 인형 장식 풍습인데 이때 쓰는 인형이 “히나인형(ひな人形)”이다. 히나마츠리를 다른 말로 “모모노셋쿠(桃の節句)” 곧 “복숭아꽃 잔치”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복숭아꽃이 필 무렵의 행사를 뜻하는 것으로 예전에는 히나마츠리를 음력 3월 3일에 치렀기에 복사꽃이 화사한 계절이라서 그렇게 불렀다. 하지만 일본은 명치(1868년) 이후부터 음력을 버리고 양력으로 모든 전통행사를 치르기에 ‘복숭아꽃’과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뚫으세 뚫으세 펑펑 뚫으세 / 수정같이 맑은 우물 펑펑 뚫으세 / 조상대대 자자손손 먹고살고 먹고살고 / 뚫으세 뚫으세 펑펑 뚫으세” 이 노래는 마을 공동우물에서 우물치기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예전 사람들의 식수원은 우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마운 우물에서 물이 잘 나오도록 하고, 물이 맑아서 마을 사람들이 배탈 나지 않고 건강하게 살도록 해달라고 빌기도 했는데 그것이 바로 “우물치기”입니다. 마을에서는 동제(마을 공동의 제사)를 올리기 사흘 전 마을 공동우물을 찾아가 샘굿을 합니다. 물론 샘굿을 하기 직전에는 우물에 함부로 범접하지 못하도록 금줄을 칩니다. 그리고 우물 속에 빠져버린 끊어진 두레박이라든가 줄 따위를 말끔히 치워내고, 깨끗한 자갈을 다시 깔아 둡니다. 그런 다음 풍물패들이 우물에 다다르면 상쇠가 용왕님께 축문을 외웁니다. 축문을 외우고 난 뒤 노래를 부르고 풍물을 치며, 우물을 몇 바퀴 돕니다. 그러면 이 우물은 신성한 생명수의 원천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는 금줄을 거두고 누구나 우물에서 물을 퍼 갈 수 있습니다. 수돗물을 마시는 지금 이 수돗물도 믿을 수 없다며 정수기를 들여놓거나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충남 서산 출신의 소리꾼 심정순(沈正淳)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심팔록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부친의 음악적 영향을 받고 자랐다는 점, 박춘재 등과 일본에서 음반 취입 후, 발매 광고가 신문에 실리기 시작하면서 이름이 알려졌고, 이해조의 강상연(江上蓮), 연(燕)의 각(脚), 토(兎)의 간(肝), 등이 심정순의 구술(口述)로 매일신보에 연재되면서 더욱 알려졌다는 점, 예단(藝壇) 일백인(一百人) 편에는 여러 광대 가운데도 가장 품행이 단정하고 순실한 사람으로 소개되어 있고, 1910~1920년대 그의 활동내용은 대부분이 판소리, 가야금 연주, 병창이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비단 중고제 판소리뿐이 아니다. 동편제, 서편제를 막론하고 초창기를 지나 그 이후로 내려오면서 사설의 내용이나 음악적 기교의 변화로 판소리는 세련, 정제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의 근거는 양반층을 끌어들이면서 스스로 달라지기 시작하였다는 점인데, 그것은 유성기판에 담겨있는 고음반에서도 확인이 되고 있다. 물론 음반 자체가 여러 제약 속에서 그렇게 기획되기도 하였지만, 시골 장터나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는 열린 공간에서 쉽게 접했던 욕설이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제강점기 조선땅에서 일본인이 조선인을 학대한 글을 읽다가 한마디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건이 있어 이번 주 일본이야기 소재로 삼아본다. 때는 1927년 6월 26일, 강원도 철원읍 중리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6월이면 검붉은 오디(뽕)가 한참 맛있는 계절인데 8살짜리 오순덕과 동무는 오디 밭 옆을 지나다 탐스런 오디를 보고는 그만 먹고싶은 마음에 오디 몇 개를 따먹었다. 문제는 이 오디 밭주인이 일본인이었던 것이다. 운 나쁘게도 마침 그 시각 오디밭주인 후지사와(藤澤暢太郞)는 오디밭 쪽으로 걸어가다가 순덕과 그 친구를 발견했다. 놀란 아이들이 도망치자 후지사와는 쫓아가 순덕을 잡아서 넓적다리 살을 도려내는 악행을 저질렀다. 철없는 아이가 오디 몇 개 따먹었다고 살을 도려낸 이 극악한 사건이 바로 ‘철원사형사건(鐵原私刑事件)’이다. 살점이 떨어져 나간 순덕이가 피를 철철 흘리면서 집으로 돌아오자 부모는 기겁하여 경찰서로 달려가 신고했다. 그러자 철원경찰서에서 순사 2명과 협성의원 의사가 순덕이네 집으로 와서 상처를 조사했다. 결론은 후지사와가 나뭇가지 치는 전정가위로 순덕의 살점을 베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재는 게 편’이라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민속음악의 명인으로, 즉흥음악의 대가로, 명성을 날렸던 심상건과 그의 딸 심태진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해방 직후에는 함께 미국 순회공연을 한 바 있고, 1965년에는 심상건이 신병치료차 미국에 갔으나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세상을 떴었며, 그의 묘비에는 가야금이 조각되어 있다는 이야기, 심상건의 숙부, 심정순의 소리제는 그의 막내딸 심화영에게 이어졌는데, 이 소리는 과거 서울 경기지방과 충청도 내포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고제(古制)의 한 유형이며 김창룡 가문과 이동백, 심정순을 위시한 심씨 가문 등에서 이어졌다는 점, 등을 이야기하였다. 아버지 심정순으로부터 중고제 소리를 이어받은 심화영은 소리보다는 춤에 더 재능을 보여서인가, 특히 승무(僧舞)를 잘 추었다고 한다. 그래서 훗날 승무는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종목으로 지정이 된 바 있고, 그 종목의 예능보유자로 활동하다가 얼마 전에 타계하였다. 현재 이 종목은 심화영의 손녀딸 이애리가 전수조교로 활동하며 동 종목을 보존하고 있다. 심화영의 승무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소개하기로 하고, 이번 주에는 중고제 판소리를 지켜 온 심정순(沈正淳)을 소개해 보도록 한다. 심정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의 둘째 우수(雨水)입니다. 우수라는 말은 눈이 녹아서 비가 된다는 말이어서 이제 추운 겨울이 가고 드디어 봄을 맞게 된 것이지요. “우수 뒤에 얼음같이”라는 속담이 있는데 이는 슬슬 녹아 없어짐을 이르는 뜻으로 우수의 성격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이 무렵에 꽃샘추위가 잠시 기승을 부리지만 “우수 경칩에 대동강도 풀린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우수와 경칩을 지나면 아무리 춥던 날씨도 누그러져 봄기운이 돌고 초목이 싹트지요. "꽃샘잎샘 추위에 반늙은이(설늙은이) 얼어 죽는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계절에 나누는 전래의 인사에도 "꽃샘잎샘에 집안이 두루 안녕하십니까?"라는 것도 있지요. 이 꽃샘추위를 한자말로는 꽃 피는 것을 샘하여 아양을 피운다는 뜻을 담은 말로 화투연(花妬姸)이라 합니다. 하지만, 우수가 되면 봄기운이 서리기 시작하는데 풀과 나무가 깨어나는 모습이 엿보입니다. 이때는 논밭을 둘러보고 새해 농사 계획 세우며, 삽질 한 번, 낫질 한 번으로 몸을 풀지요. 특히 이 무렵에는 농사일 한발 앞서 장을 담가야 합니다. 장 담그는 일은 시골 살림에서 매우 중요한 일인데 이웃과 장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이야기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제강점기에 ‘조선고적연구회(朝鮮古蹟硏究會)’라는 단체가 있었다. ‘조선고적연구회’는 조선총독부의 행정지원과 일본의 재벌, 궁내부, 일본학술진흥원, 이왕가 등의 재정지원으로 활동하던 식민사학의 뿌리가 되는 조직이다. 1910년대 이 조직이 등장하기 전에 생긴 조선총독부 주도로 실행하던 고적조사사업이 조선내의 문화재 단순한 파악 수준이었다면 조선고적연구회는 각 지역에 해당 유적의 전문가를 상주시키면서 기존에 파악된 유적이나 유물이 발굴을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파헤치는 조직이라는 점이 다르다. 《청구학보(靑丘學叢), 5호(1931)》에 따르면 구로이타 가츠미(黑板勝美)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던 조선고적연구회는 고분(古墳) 발굴에 주력한 조직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단순히 학술적인 목적으로만 고분 발굴을 했을까? 도쿄 국립박물관 3층에는 “오구라 컬렉션(小倉 Collection)”이 기증한 우리나라 유물들이 버젓이 자리 잡고 있다. 오구라는 1922년부터 1952년까지 조선에서 문화재를 약탈해갔는데 무려 1,100여 점이나 되며, 이 가운데 39점은 일본 국가문화재로 지정될 정도의 수준 높은 문화재들이다. 그런가 하면 앞 이름이 비슷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미국에 살고 있는 심상건 명인의 넷째 딸, 심태진이 현재 99살의 노인임에도 6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배운 가야금산조와 병창, 단가를 부르고 있다는 이야기, 아버지의 지도방법은 1:1 개인지도로 매우 엄격하였으며 제대로 못 하면 대나무로 어깨를 맞았다는 이야기, 한성준에게 춤을 배웠다는 이야기, 아버지의 산조는 즉흥적이어서 오르지 한성준이 그 장단을 맞출 수 있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심상건은 일본의 식민지 시대를 대표하는 민속음악, 특히 가야금산조와 병창, 기악의 명인으로 무대나 방송, 음반제작 등 다양한 활동을 하던, 그러나 주권을 잃었던 불행의 시대를 보낸 국악인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변화의 음악을 만들어 내는 즉흥음악의 대가였다. 그는 산조를 탈 때마다 매번 달라서 배우는 사람들이 제대로 배울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음악을 가리켜 선생 없이 자학(自學), 자득했기에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심상건은 해방 직후, 조택원 무용단의 일원으로 넷째 딸, 심태진과 함께 미국의 원정공연을 성공리에 마쳤고, 귀국해서도 그의 공연활동이나 방송활동은 더욱 활발하게 이어졌다. 그러나 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