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무후(武侯)는 중국 삼국 시대 촉한(蜀漢, 221-263)의 초대 승상(丞相)이었던 제갈량(諸葛亮, 181-234)의 시호(諡號)인 충무후(忠武侯)를 줄인 말이다. 제갈량의 작위(爵位)는 무향후(武鄕侯)이고, 자(字)는 공명(孔明)이이서 제갈공명이라는 별칭도 있다. 한편, 제갈량이 초야에 묻혀 세상에 알려지지 아니하였을 때, 그 형상이 마치 엎드려 있는 큰 인물의 용과 같다하여 복룡(伏龍) 또는 와룡(臥龍)이라는 뜻으로 그를 한편에서는 와룡선생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제갈공명은 8척(184cm) 키에 용모가 매우 빼어났으며, 관옥 같은 얼굴에 흰 학창의와 백우선을 가진 모습이 마치 신선과 같이 묘사되곤 하였다.
제갈공명은 촉한의 정치가이며 또한 전략가로서 명성이 높았는데, 삼국시절(三國時節) 유비(劉備)를 도와 오(吳)나라의 손권(孫權)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조조(曹操)의 대군을 적벽(赤壁) 싸움에서 대파하고 형주(荊州)와 익주(益州) 점령하였다. 221년에는 한나라의 멸망을 계기로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승상이 되었다.
많은 이들의 추앙을 받은 그는 북벌을 시작하면서 촉한의 제2대 황제 유선(劉禪)에게 올린 출사표(出師表)가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명문으로 꼽힌다. 이러한 제갈공명은 중국 역사상 지략과 충의의 전략가로 명성이 드높다. 이에, 중국의 민간신앙에서도 그를 충성과 지략(智略)의 신으로 추앙하여 신격화하고 있다.
한국 무속신앙에서도 제갈공명은 충성과 지략을 일깨워 주는 신으로 모셔진 지 오래다. 그래서 제갈공명을 주신으로 모신 사당이 서울에도 있다. 둔지미 무후묘(巫侯廟)와 남산 와룡묘가 그곳이다. 중구 예장동에 있는 남산의 와룡묘(臥龍廟)는 와룡당(臥龍堂)이라 불리며 많은 신앙인이 찾아 드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은 조선 시대 말, 엄상궁(嚴尙宮)이 세웠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1974년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제갈공명을 주신으로 모신 또 하나의 사당이 보광동에 있는 무후묘이다. 이곳은 역사가 꽤 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정확한 건립연대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조선 시대 중국 상인들이 한양으로 입성할 때 이곳에 들러 제를 올렸다는 것과 중국 사신이 입성하기 전 이곳에 먼저 들러 인사를 올린 후에야 임금을 찾아뵈었다는 내용이 지역 토박이들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
한국에서의 제갈공명 신앙에 대한 기록은 《선조실록》 선조 38(1605년)에 등장한다. 평안도 영유현(永柔縣)에 와룡묘를 짓게 하였다는 것이고, 역대 왕이 와룡묘에 사액(賜額,임금이 내린 편액)을 내리고 제문과 제관을 보내어 제를 올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한국에서의 제갈공명 신앙은 조선 시대부터 중엽 이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보광동 무후묘는 애초 둔지미에서 있었다. 둔지미는 두지메 또는 두지미라고 일컬었던 용산구 서빙고동 자연마을이었다. 그런데 1906년부터 이곳에 일본군 핵심 주둔지를 건설하면서 1908년에 이르러 오늘날의 보광동 주택가로 이주해 온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자연부락 둔지미는 러일전쟁 후 일제 군사기지 건설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오늘날 그곳은 용산 미8군 기지가 점령하고 있다.
오늘날의 보광동 무후묘는 이 지역 유지였던 김인준이 160여 평의 토지를 희사하여 새롭게 건립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연유로 현재의 무후묘 권리가 김인준의 두 아들인 김선유과 김두로 그리고 김인준의 손자이면서 김두로의 아들 김주황 등 세 사람이 모든 법적 권리의 절반을 갖고 있다. 나머지 절반의 권한은 지역 노인정에서 갖고 있다.
무후묘가 들어 서 있는 공간의 구조는 본채, 정문, 후문, 탑, 서낭목 등이 있다. 무후묘 전각 오른쪽에 <우리 보광사 - 光慧 無門>가 있다. 이곳에 절을 세운 까닭은 무후묘 주위에 좋지 않은 일들이 꽤 일어났는데 이는 당 터가 세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좋지 못한 액을 잠재우기 위해 무후묘 옆에 절을 지은 것이다. 그리고 절을 관리를 스님에게 맡기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관리자 비구 스님 한 분이 20여 년째 거주하고 있다.
무후묘 전각 내부의 정면과 좌우면 벽면에 모두 다섯 분의 신령을 모셔두고 있다. 왼쪽 벽면에 부군 할머니 그 옆으로 산신(여기서는 부군 할아버지라고 부름), 가운데에 무후묘 주신인 제갈공명, 오른쪽 벽면에 청장군과 홍장군이다. 제갈공명을 비롯한 모든 신령 앞에 조화가 꽂혀 있고 향로, 쌍 촛대, 정한수 그릇 등이 놓여 있다. 이들은 둔지미 토박이들과 보광동 수호신으로서 역할하고 있다.
무후묘에서는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큰굿을 하였다. 무후묘제전위원회 고현재 회장(71살)이 30대 초반까지도 굿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굿을 하지 않는다. 지역민들의 경제 사정으로 굿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굿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제례일이 되면 지역민들이 모여 유교식으로 행사를 치른다.
오늘날의 무후묘 제례는 한 해에 두 번 행해진다. 제례 목적은 마을의 안위와 지역민의 안녕을 위한 것이다. 정월 초하루 의례는 간단하게 치러진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참여하는 10월 초하루 제례는 좀 더 크게 지낸다. 2019년 정월 초하루(양력 2월 5일) 제례에는 회장 댁에서 소고기 산적, 북어포, 과일, 맑은 술(대추술) 준비하여 행해졌다. 제례에 쓰인 대추술은 회장 댁에서 특별히 담근다.
제례는 새벽 6시에 시작하여 약 30여 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제례 주관자도 회장과 총무 단 두 명이다. 10월 초 하루 제례에는 약 7~80여 명이 참여한다. 멀리 이주하여 떠나간 옛 토박이들도 참여한다. 과거에는 3~400 여백 명이 참여하였지만, 오늘날에는 그러하지 못한다. 참여자 중에는 이곳으로 이사 온 외지사람들도 섞여 있다.
과거의 무후묘 제례에는 검정 통돼지를 올렸다. 그리고 제례에 드는 모든 비용은 주민들의 자발적인 추렴으로 충당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일부를 관청 지원으로 충당한다. 2018년 가을 제례에는 570만 원이 소요되었는데, 이 중 용산구청에서 320만 원을 지원받았다. 나머지는 주민 성금 250만 원으로 충당하였다.
무후묘 제례를 주관하는 제주는 나이가 많은 남자 중에서 뽑는다. 부정한 사람은 제관으로 뽑지 못하며 제의에도 참여하지 못한다. 일반 주민들도 초상집에 갔다 온 사람은 제례가 모두 끝난 후에야 겨우 참여할 수 있다. 이처럼 무후묘제전위원회에서는 옛 법을 쫓아 의례 전통을 살리려 애쓴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형식에 그치고 참여자 또한 점점 줄고 있는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