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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임진왜란 뒤 다시 보수반동으로 돌아가는 조선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314]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이번에도 서애학회 자문위원인 고교동기 류벽하가 《서애연구》 12권을 보내주었습니다. 《서애연구》가 발간되면 창간호부터 12권까지 꾸준히 보내주는 벽하 덕분에 저도 서애 선생에 대해 좀 더 잘 알게 되었고, 나아가 서애 선생의 진정한 나라 사랑, 백성 사랑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며 존경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12권에는 권두 논문으로 최종호 교수의 <이순신의 류성룡 존모(尊慕)와 류성룡의 이순신 탁용(擢用)>이 실렸고, 일반논문으로 최진덕 교수의 <서애 류성룡의 통곡과 서애학의 본질> 등 5편의 논문이 실렸습니다. 특히 이번에는 중국 하준(何俊) 교수의 <류성룡과 중조(中朝)유학>이라는 논문이 실렸네요. 중국어로 쓰인 논문이라 저는 읽을 수가 없었는데, 마지막에 영문초록을 실어 그나마 대충 논문 요지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12권에서 특히 제 눈에 띄는 것은 백권호 서애학회장과 류을하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이 같이 쓴 글 <임란 종전 직후 전전(戰前) 체제로의 복귀와 그 결과>입니다. 서애는 1598년 주화오국(主和誤國), 곧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망쳤다는 누명을 쓰고 영의정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런데 영의정에서 쫓겨났을 뿐 아니라, 전란 동안 서애가 나라를 구해내기 위해 힘써 만든 제도도 모두 원래대로 돌아갑니다. 마침, 서애가 쫓겨나고 얼마 안 되어, 서애가 강력히 추천하였던 이순신 장군도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습니다. 두 분은 어려서도 한마을에 살았는데, 두 분 사이에 뭔가 운명의 끈이 연결되어 있었다는 느낌이 드네요.

 

임진왜란 직전 조선의 상태는 일본의 침략으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엉망인 상태였습니다. 이런 조선의 상태에 대해 남명 조식은 “벌레가 속을 갉아 먹어 진액이 다 말라버린 1백 년 된 큰 나무”와 같다고 하였고, 퇴계 이황은 “군사는 부족하고 양식은 다 떨어졌으며 인민은 원망하고 신(神)이 노하니 곧 병란이 일어날 조짐”이라고 했습니다. 비축 군량도 연산군 초반까지 100만 석이 있던 것이 중종 25년(1531)에는 50만 석으로, 명종 6년(1551)에 10만 석으로 줄었다고 합니다. 만성적 재정적자로 군량을 헐어서 사용한 것이지요.

 

이제 백권호, 류을하 두 분의 논문 <임란 종전 직후 전전(戰前) 체제로의 복귀와 그 결과>에 나오는 내용 가운데 제 눈에 띄는 몇 가지 소개해 보겠습니다. 전쟁 발발 전 조선 인구의 30~40%는 노비였습니다. 노비는 군역(軍役)에서도 제외됩니다. 그러므로 전시(戰時) 재상으로서 서애는 인적 자원 확충이 시급함을 절감합니다. 그러나 강제동원을 해서야 효과가 오래 갈 수 없습니다. 뭔가 당근책을 제시해야겠지요.

 

그래서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신분 상승의 기회를 줍니다. 노비뿐만 아니라 서얼에게도 적자(嫡子)에 버금가는 혜택을 줍니다(서얼 허통). 그렇게 하여 어머니가 창기 출신인 홍계남은 정3품에 올랐고, 황해도의 천민 출신인 한명련도 정2품에 오릅니다. 그리고 평안도 개천의 이춘란은 4,000석의 군량미를 납부하여 종2품의 벼슬을 받는 등 의지가 있는 사람들은 신분의 벽을 넘어섰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면천법(免賤法)은 폐지되고 신분제는 다시 원상복구 됩니다. 그리하여 전시에 공을 세운 이들에게 준 공명첩도 모두 몰수하여 불태워버립니다. 당연히 서얼 허통도 다시 금지되고요. 그리고 군에 들어와 있던 노비들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합니다. 또한 천민 출신으로 무관에 오른 이들을 이런저런 이유로 쫓아냅니다.

 

이를테면 천민으로 종3품 무관직에 오른 다대포 첨사 조옥건을 교체하고, 서애가 천거한 천민 무장 신충원을 근거도 없는 죄목으로 고문하여 죽게 만듭니다. 또한 선조 32년(1599) 노비 아들 출신인 이재영이 장원 급제하였는데, 사헌부의 요구로 합격이 취소되었습니다. 그런데 사헌부는 한술 더 떠, 누가 이재영을 과거 시험장에 들여보냈냐며 들여보낸 관리까지도 파면을 요청하였다네요.

 

경제 문제에 있어 서애는 전시 경제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공물을 특산물이 아닌 쌀로 받는 공물작미법을 시행하고, 압록강 국경 지역에 최초의 무역시장인 증강 개시를 개설합니다. 그러나 종전 뒤 선조는 전시 제정 법령의 일체 혁파를 지시하여 공물작미법도 없던 것이 되어버렸고, 최초의 국제무역시장인 증강개시도 다시 닫혔습니다. 증강개시 금지에는 새로운 세상의 정보가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선조가 원래 한심한 임금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런 한심한 모습 중에도 이런 모습이 나옵니다. 전란 중에 아무리 임금이라도 찬밥, 더운밥 가리게 생겼습니까? 그런데 선조는 피난 중에도 자기 먹을 것은 생물로 준비하라고 하고, 정유재란 때는 중전이 좋아하는 생청어를 전장(戰場)인 경상도로부터 진상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리고 전비가 모자란 판에 왕실 내탕고는 전비(戰費)로 사용치 못하게 합니다.

 

또 아들놈들의 행실은 중범죄로 다스려야 함에도 덮어주기 급급합니다. 장남인 임해군은 문서 위조나 폭력적 방법을 동원하여 농지를 빼앗습니다. 황해도 봉산의 어느 마을 하나는 아예 마을을 포위하고 가옥 50채를 불태우고 3명을 살해했다고 합니다. 양반도 자기 욕심에 방해가 되면 봐주지 않습니다. 유희서에게는 의주의 관기 출신인 애생이라는 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애생이 탐이 나자, 애생을 차지하기 위해 유희서를 청부살해합니다. 실록에는 이러한 임해군의 비행기사가 50건이나 나온다는군요.

 

그 밑의 순화군은 또 어떻습니까? 순화군은 악행을 저지르다가 28살에 병으로 죽었는데, 사관(史官)은 그의 졸기(卒記)에 순화군이 해마다 10여 명을 살해하였다고 쓰고 있습니다. 하도 비난 여론이 높으니까, 선조는 마지못해 순화군을 수원으로 유배보냅니다. 그런데 수원에 보내는데 유배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순화군은 유배지에서도 자숙하기는커녕 살인을 저지르고, 잡아들인 사람의 이빨을 쇠뭉치로 때려 깨고 집개로 잡아빼는 등 고문을 자행합니다.

 

나라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몰렸을 때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의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선조가 이 모양입니다. 그나마 서애나 이순신 장군 같은 분들이 있어 조선은 겨우 멸망만은 면한 것입니다. 그렇게 전쟁에 혼났으면 전쟁이 끝난 뒤 나라를 새로 개조한다는 각오로 더욱 개혁적인 정책을 밀고 나가야 할 텐데, 서애가 실시한 개혁정책들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무위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양반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성리학으로 조선을 묶으려는 사상 통제를 합니다. 또 더욱 굳게 조선의 문을 걸어 잠급니다. 저는 이런 것을 볼 때마다 조선은 임진왜란 때 차라리 망하고 새 왕조가 들어섰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고려 말에 썩어빠진 고려를 무너뜨리고 당대의 명장 이성계가 조선을 세웠는데, 임진왜란 때도 이순신 장군이 새 왕조를 세웠으면 어땠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