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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는 말이야”, 언어의 벽

산사에서 띄우는 편지 2

[우리문화신문=일취 스님]  “좋은 말만 하고 살아도 모자라는 시간.”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글을 쓰는 나도 내 전생을 좋은 말로 다 채우기에는 자신이 없다. 불가에서는 부처님처럼 살라고 입에 달고 다니지만, 정말 부처님은 언어에 완벽했을까? 괜한 의심을 해본다. 예수가 말하기를 “어느 누가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도 내어주어라.”라고 했다. 과연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을까, 고민해 본다.

 

언어에 대해서 필자는 지난번에 언어도단言語道斷이란 글을 썼는데, 이번 글에서는 언어문화에 열쇠말(키워드)을 맞추어 언어적 갈등에 관한 내용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세상만사는 대화 속에 이루어진다. 언어는 마술사처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말 한마디에 천사가 될 수도 있고, 괴물이 될 수도 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매를 맞을 수도 있고, 말 한마디 잘하면 상을 받을 수도 있다. 말이 불씨가 되어 다투고 파멸을 자초할 수도 있고, 말을 잘하여 직업으로 삼아 돈벌이가 짭짤하게 잘 되는 사람들도 무수히 많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언어 때문에 살고 죽고 하는 기이하고 험난한 장면들이 극적으로 심심치않게 이루어진다. 이런 사건들이 문화로 자리매김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출한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천해 간다. 언어에 무상(無常)이란 말을 써도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옛날과 견줘 보면 언어에 많은 변화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과 몇십 년 전만 보더라도 부모와 자식 사이, 스승과 제자 사이, 고부 사이, 남녀 사이, 심지어 군대의 상하급 사이 또는 직장 상하 사이에 모두 상위하달이 기본이었다. 한 마디로 지시 일변도식 언어들이 구도화된 사회였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부터 고정관념의 언어 벽이 허물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근래에는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서로 간 모든 언어가 청정무구(淸淨無垢, 맑고 깨끗하여 더럽거나 속되지 않음)해진 것이 아니라, 아직 사회 구석구석에는 암적 어구(語句)들이 꿈틀대고 있다.

 

그런데 지난 시절 문화소통에 모두 다 모순점만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계층 사이 규제된 언어가 자유스럽지 못했지만, 위계질서 쪽으로 본다면 그렇게 나쁘다고만 볼 수 없을 것 같다. 지금 사회는 위계질서에 경고등이 켜져 있는 상태다. 무조건적 자유 요구가 그렇게 만들고 있다. 사회에서는 상하 간 언어의 규칙이 없고, 가정에서는 부모가 자식에게 무조건적 헌신을 하고, 잘못을 보고 손찌검했다가는 아동학대로 몰리기에 십상이다.

 

그래 ‘사랑의 매’란 말은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학교에서도 선생님이 학생에게 잘못 꾸지람을 주면 언어폭력이 된다. 그 때문에 언어의 벽은 무너졌다고 하지만, 언어순화는 뒷걸음을 하는 게 현실이다. 이럴 때일수록 옛날 서당에서 훈장에게 종아리를 맞던 때가 그립다고 혹자는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요즘은 수많은 막말과 은어와 속어들이 수없이 발생하고 있다. 시대가 변하면서 문화가 변하듯 언어도 대책 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최근 정치인들 입에서 ‘깡패’라는 단어를 가지고 설전하고 있다. 언어의 성지가 되어야 하는 지도자들 입에서 수많은 저속어가 난무하고 공격성 언어가 세상을 뒤흔들고 있으니 언어순화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몇 달 전 팔십이 가까운 지인이 후미진 길을 가다 중학생쯤 되는 아이들 서넛이 모여 자기들끼리 노닥거리며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고, “어린 학생들이 담배를 피우면 되나!” 하고 참견했다고 한다. 그러자 한 녀석이 눈을 부릅뜨고 다가오더니 “뭐라고 했어? 이 꼰대야, 네가 담배 사 주었나!” 하며 대차게 가슴을 밀어붙이는 바람에 뒤로 벌러덩 넘어지고 말았다. 넘어지면서 땅에 손을 잘못 짚어 팔이 삐어 한참 동안 팔을 못 썼다고 한다.

 

‘꼰대’가 어떤 말일까 하고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은어로, 늙은이를 이르는 말. / 학생들의 은어로 ‘선생님’을 이르는 말”이라고 쓰여 있다. 요즘 꼰대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는 것 같다. 어느 인터넷 신문에 꼰대란 정의가 이렇게 게재되었다. 꼰대란 “자신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직장 상사나 나이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속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 내용을 들여다보면 상사나 나이 많은 사람들이 문제성을 가지고 있다는 해석이다.

 

또 요즘 젊은 층에서 유행하고 있는 “나 때는 말이야”라는 은어가 유행하고 있다. 이 말 또한 윗사람들이 쓰는 언어에 대한 반감을 빗대어 하는 말이요, 그 말 뒤에 ‘꼰대’라는 혹이 붙고 있다.

 

‘꼰대성’이란 자신보다 젊어 보이는 이들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는 말이나 갑질을 하는 경우 뒤에 붙어 따라다니기도 하고, 지난날 불굴의 의지로 살아왔다는 일들을 영웅담처럼 입에 달고 다니거나, 아랫사람에게 옛적 살아왔다는 경험담을 들추어내면서 “나는 옛적에 이러이러했는데, 너는 그것도 못해!”라고 했을 때 당연히 ‘꼰대’라는 말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하 경계를 떠나서 윗사람이 옛날 어려운 시절을 들추며 회고나 경험담을 젊은이들에게 꺼냈을 때 꼰대란 언어가 따라붙는다면, 대화는 더 이상 진행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계층 간, 또 다른 벽이 생기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유스러운 의사소통의 부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는 어떨까. 흔히 남자들이 후배나 선배, 동료 할 것 없이 술자리에 앉으면 약방의 감초처럼 쏟아내는 것이 그들의 군대 생활 추억담들이다. “내가 군대 생활했을 때는 말이야“로 시작되는데, ”나 때는 말이야“이란 어구와 크게 다를 바 없다. 1990년 이전 군대 생활은 모두가 힘들었다. 술잔을 기울이며 그 당시 군 생활 추억을 더듬으면서 온갖 자랑과 고생담을 이야기하곤 한다. 어떤 이야기가 되건 그 이야기들이 술잔에 잘 녹아난다.

 

그러나 성인들의 말씀이나 고사성어 같은 내용들은 관심 밖이다. 집집이 자랑스럽게 벽에 걸린 가훈도 요즘은 보기 힘들다. 귀에 거슬리거나 자신의 기호에 맞지 않는 말이라면 등을 돌린다. 그 때문에 어른이라고 해서, 경험이 많다고 해서 잘못 뇌까리면 험한 꼴을 면치 못하니 입을 조심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계층 간 예상치 않은 벽이 점점 두터워지고 갈등이 심화하여 간다.

 

이러한 언어 문제가 어제오늘만의 일이겠는가. 그러나 언어 순화에 대한 어떤 대안도 보이지 않는다. 말 한마디에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 좋은 말일지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잘못 오해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러니 말을 잘 가려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말을 잘못하면 아랫사람에게는 훈계나 간섭으로 들릴 수도 있고, 윗사람에게는 아부나 놀림이 될 수 있다. 또 미담이나 농담이 기어(綺語, 교묘하게 꾸며댄 말)가 될 수도 있다.

 

아무리 친한 사람일지라도 말 한마디 잘못하면 금이 갈 수 있지 않은가. 막무가내 자기가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꼰대라고 하는 것도 문제이고, 자기가 다 아는 것처럼 아랫사람을 무시하거나 간섭해서도 안 될 일이다. 서로의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하고, 말의 깊이도 잘 헤아려야 할 것 같다.

 

시대가 바뀌고 신문화가 형성되면서 아이들 교육에도 크게 문제가 속출하고 언어 순화에도 구멍이 뚫리고 있다. 어찌하겠는가. 나이 많다고 입 다물고 있고 무관심할 일도 아니지만, 무조건 나이 많은 사람들의 말은 잔소리이고 꼰대라고 치부한다면 훗날 우리 미래는 불을 보듯 뻔하다.

 

모두 언어문화에 가슴을 열고 따뜻한 바람을 불어 넣어야 할 시점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