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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내의 세종한글 길라잡이

최만리의 언문 창제 반대상소의 의미

홍사내의 세종한글 길라잡이 3

[그린경제=홍사내 기자] 

하루.

   
▲ 세종실록 103권, 26년(1444) 2월 20일기사,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아뢴 내용
한글의 최초 이름은 ‘언문(諺文)’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03권, 세종 25년(1443) 12월 30일 기사에 이 새로운 글자가 처음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두 달 뒤 최만리 등 집현전 학사들이 의견을 모아 언문을 창제하는 것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다. 

중국 문헌이나 󰡔조선왕조실록󰡕에서 ‘언(諺)’이란 글자는 자주 쓰던 글자였는데, 이를 토대로 ‘언문’의 뜻을 정리하면 ‘성인의 말이나 전(傳)해 내려오는 교훈적인 말을 그대로 적을 수 있는 문자. 말을 적으면 바로 글이 되는 문자. 말소리를 적는 글자. 입말 글자’의 뜻이다. 그리고 3년 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훈민정음(訓民正音)’이란 이름을 붙였으며, 줄여서 ‘정음’이라고도 하였다.  

조선 시대 500여 년 동안 대중들은 ‘훈민정음’이란 말 보다 ‘언문’이라는 이름으로 알고 이 글자를 즐겨 써 왔는데(그러므로 언문이란 세종대왕께서 만든 글자를 업신여기거나 비하하며 부른 이름이 아님), 대한제국 때에 고종이 비로소 1894년에 칙령을 내려 ‘국문(國文; 나랏글; The national language)’이라고 승격시켰으며, 주시경 선생에 의해 1913년에 ‘한글’이란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틀.
이 새 글자가 만들어진 때는 새로운 나라 조선이 세워진 지 51년이 지났고, 할아버지 태조와 큰아버지 정종, 아버지 태종에 이어 네 번째로 세종이 임금자리에 올라 25년이 지난 때이며,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현대사와 견주어보면, 해방과 동족의 비극을 겪은 뒤 60여 년이 지난 지금의 처지와 흡사하다. 또 80년대 민주화운동을 겪은 뒤 흐른 세월은 태평성대를 이루었던 세종의 즉위 기간과 닮아 보인다.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외교적으로도 전쟁 없이 중국이라는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와 친밀한 협력관계를 가지며, 나라 안은 큰 혼란과 자연 재해도 없이 동방의 요순이라는 어질고 훌륭한 임금이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였고, 백성들의 삶은 풍요로웠다.  

하지만 딱 한 가지 풀리지 않은 숙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백성의 눈을 멀게하는 문자였다. 마치 서양이 중세 암흑기 동안 라틴어만을 강요당하며 로마의 지배를 받아 제나라 말을 사용치 못한 것과 같았다. 한자는 글자 한 자 한 자마다 뜻과 음이 다른 문자였고, 글자 자체가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문장을 만드는 것이 우리말과 전혀 달랐기 때문에 이른바 구어체로는 절대 적을 수가 없었고, 문어체로도 우리말 문법과 전혀 다른 중국말식으로 문장을 적어야 하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그러므로 글자를 배우고 문장을 써서 표현하려면 많은 세월 동안 공부를 해야 했다. 생활 속에서 주고받는 이야기는 고사하고 책을 만들어 내거나 편지를 쓰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처럼 어려웠다. 교육을 위한 서적은 모두 중국책이었고, 한자를 가지고 우리말식으로 적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물론 신라사람들은 향가에서처럼 향찰이란 글자 표기법을 쓰기도 했지만 소리와 뜻을 빌어쓰는 것에 일정한 규칙이 없었기 때문에 일반화되지 못하였다.  

사흘.
그런 가운데 외교적으로 중국어나 몽고어, 일본어를 배워야 하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그 나라 말의 발음을 표현하고 가르치고 배워야 할지 방법이 없었다. 이때 새로 어진 임금께서 조선이란 나라는 중국과 다르고, 조선말 또한 중국말과 다르다는 자주 의식을 가진 굳은 의지로서, 백성이 배우기 쉽고 알기 쉽고 쓰기 쉬운 글자를 만들어 주시니, 한자의 바른 발음도 표현하고, 교과서같은 사서삼경 따위도 우리말로 풀어서 배울 수 있었으며, 외국말을 우리말로 표현해 내는 데도 더 이상 어려움이 없었고, 이해하는 데 매우 편리하게 되었다.  

유럽 영국이나 독일은 중세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라틴어는 버렸지만 로마자는 버리지 못했다. 새로운 글자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겨레는 중국의 영향력 아래에서도 중국어를 따라하지 않았고, 한자말을 받아들이면서도 우리말에 아주 잘 맞는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썼다. 하지만 아쉽게 훌륭한 글자를 만들었음에도 갖힌 사회, 갖힌 생각으로 한자를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동서양이 활발히 교류하게 되면서 개화기 때에야 비로소 새글자의 훌륭함을 깨달았다. 그것도 외국사람들이 발견하고 깨달아 놀라는 모습을 보고서야 ‘흑진주가 보석임을, 바위가 아니라 황금임을 보는 눈을 지니게 된 것이다.  

나흘.
이 새로운 글자에 관한 기록은 그뒤 여러 문헌에서 산발적으로 찾아 볼 수 있지만 글자의 제작과 창제 원리에 대해 세밀하게 기록된 것은 잘 알다시피 원본 <훈민정음>을 능가하는 자료가 없다. 새 글자를 누가 왜 만들었으며, 어떤 원리로 만들었고, 어떻게 쓰는 것인지, 그 모양은 어떻고, 낱말은 어떻게 만드는지, 발음은 어떻게 하는지 따위가 자세히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설명은 논리적으로나 과학적으로 흠이 없는 이론을 펼쳐 보여 주었다.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글자의 창제’라는 역사적 사실을 우리가 그냥 받아들이기엔 너무도 신묘한 일이어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혁명이라고 말하듯 놀랄 만한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더욱이 왕권 중심 사회로서 매우 폐쇄된 생활과 반도라는 단절된 지형과 교통, 그리고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군사, 교육, 정치체제, 문화 등 모든 분야의 영향력은 조선의 문무 백관이나 백성들의 정신세계와 지식의 넓이를 제한하였고 큰 바위처럼 짓누르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세종은 그들 보다는 매우 다양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폭넓은 지식을 가지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였으며, 중국의 고대로부터 명나라에 걸친 역사, 제도, 문물을 수집하여 많은 책을 간행토록 하였고, 천문 지리와 역산(曆算)을 위해 주변 많은 나라의 문헌을 탐구하였다.  

예컨대 "칠정산(七政算) 내외편"은 해, 달, 수성, 금성, 지구, 목성, 토성의 운행을 살펴 일식과 월식, 하루, 한 달, 한 해를 산정한 책이며, 아라비아 역법을 조선에 맞게 계산한 결과물이다. 또한 새 글을 만들기 위해 각종 음운서와 다양한 글자에 대한 문헌을 수집하고 비교 연구를 끊임없이 했으며, 해시계, 물시계, 수표(우량측정계), 농사법, 의학서, 군기 제작 등 수많은 문헌들을 수집하고 연구하며 재정립하여 우리 실정에 맞게 고치는 작업을 끊임없이 이루었다.  

실로 세종은 당시 모든 사람이 우물 안에 있었다면 그만은 높은 산 꼭대기에 올라 세상을 바라보고자 하였고, 그 본 것을 가지고 조선 백성을 위해 활용하려 했던 깨친 눈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의문을 가지고 새로운 글자를 의심하면서 두려워하여 억측을 벌일 때 당당히 맞서 글자를 창제하고야 만 것이다. 어떤 이는 한자의 옛날 글씨체를 보고 만들었느니, 여닫는 문살의 모양을 보고 만들었느니 하면서 의견이 많았다.  

닷새.
사실 언제부터 얼마동안 어디서 만들었는지는 이 󰡔훈민정음󰡕에는 잘 나타나 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당시 집현전 학사 중에 최고위급 대학자인 최만리를 으뜸으로 하여 유학자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 등이 부당함을 글로 써서 임금에게 올린 이 상소문 내용은 󰡔훈민정음󰡕에 기록된 서문과 해례 이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닐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상소란 신하로서 임금에게 문제점과 잘못, 또는 태도와 자세 따위를 지적하여 개선코자 할 때 올리는 글로서, 학문적 바탕을 총동원하여 글을 써야 하고, 근거와 타당성을 갖추어야 했으니, 목숨을 건 글쓰기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세종이 언문을 창제하였다고 발표하자 두 달이 지나서 올린 이 상소의 내용으로 우리는 당시 국내외 정세를 좀더 자세히 알게 되고, 학자들의 문제제기와 그들이 이해하는 글자의 장단점을 보면서 객관적 안목을 넓힐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이 상소문이 없었고, 세종이 이런 논의를 거치지 않고 독단적 왕권으로 밀어붙였다면, 강압적인 정책으로 새 글자의 사용은 매우 빠르게 확대되고 진척되었겠지만 여러 반대론자들이 목숨을 잃거나 세종의 위대함은 그만큼 땅에 떨어졌을 것이다.  

엿새.
물론 한글은 지금 우리에게 산소같은 존재로서 한글 없는 세상을 상상조차 못할 정도가 되었지만 100여년 전만 해도 이 글자는 교육과 정책, 제도와 기록에서 멀리 떨어져 따돌림을 받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우물 안 개구리처럼 그저 중국문화가 가장 좋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개화기를 맞아 우리나라는, 서양의 문화가 들어와 세상에는 많은 사상과 철학과 종교가 있다는 것과, 많은 문화와 글자와 문헌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 글자가 얼마나 훌륭하고 위대한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 많고 다양한 문화와 종교, 사상, 철학을 쉽게 설명하고 적을 수 있는 것이 한글임을 알게 된 것이다.  

한자와 한문으로만 배우고, 가르치고, 느끼고 설명하고, 전달하고, 기록하기엔 버거웠다. 봇물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동서양의 다양한 학문과 문화, 사실과 사물에 대한 기록을 감당하기엔 한문(자)로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이때 한글의 위력이 나타났다. 무엇이든지 담아내고 표현하고 설명하고 기록하고 전달하는 한글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글은 우리말과 매우 잘 어울려 각양각색의 문화를 쉽게 배우고 표현할 수 있었으니, 눈이 확 뜨이고 머리가 뻥 뚤린 것이다. 더욱이 민주사회에서는 계층과 빈부의 차이 없이 평등하게 쓸 수 있는 문자이며, 과학과 정보통신 사회에서는 과학적인 특성을 가진 글자로서 놀랄 만큼 활용 가치가 높은 문자로서 거듭나고 있다.  

이레.
다음 편에는 최만리의 주장이 무엇인지 알아볼 것이다.
2013.8.26.Ⓒ홍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