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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민족

교황의 광화문 시복식과 종교적 화해와 상생

벽이단과 위정척사의 변용 문제를 중심으로

[그린경제/얼레빗=진용옥 명예교수]   2014년 8월16일 경복궁 앞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윤지충(바오로1759~1791)을 포함해 124위에 대하여 복자 시복식을 거행한다. 이에 앞서 1984년 한국인 103인 성인에 대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5월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시성식을 거행했다. 103위 순교 성인들이다.
 
한국 천주교는 1645년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 세자가 북경에 온 독일 선교사 마테오 리치 신부와 조우하고 수차의 교류를 통해 그 실체를 알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서학’(西學)이라는 이름으로 학문적 차원에서 전래되었지만 양명학과 실학으로 수용되었다가 서교(西敎)로 발전하면서 종교적 실체로 발전했다.
 
이어서 1784년 이승훈(1756 ~ 1801)은 북경에서 베드로(반석)라는 세례명을 받고 귀국했다. 세계적으로 유래가 드문 자발적 태동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7년 후에는 박해가 시작되고 최초의 순교자가 나왔다. 전라도 양반 가문 진사 출신인 윤지충은 제사를 거부하고 어머니의 장례를 천주교 예절에 따라 치른 이른바 '진산(충청도 금산)진사 사건'으로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했다. "육신의 부모보다 더 높은 부모, 임금보다 더 높은 하느님을 섬기기 때문에 그의 명을 거절할 수 없다"고 끝까지 신앙을 지켰지만 유교 쪽으로 보면 전례(典禮)의 벽이단 빌미를 제공한 셈이다.
 
   
▲ 이승훈의 세례(한국순교복자수녀회)
 
   
▲ 전주 전동성당 앞의 윤지충・권상연의 순교상
 
이후 신해박해(1791), 을묘박해(1795), 정사박해(1797), 신유박해(1801년 55명 시복), 을해박해(1815), 정해박해(1827), 기해박해(1839), 병인박해(1866~1888) 등을 거치는 100여 년 동안 순교자가 1만여 명에 이르렀고 수많은 성인과 복자를 탄생시켰다. 한마디로 ‘자발적 태동’과 ‘순교의 역사’로 점철 되었다.
 
문제 숭유 척불 - 조선건국과 벽이단(闢異端-Excluding Heresy)
 
벽이단(闢異端)이란 정통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교리나 교파 따위를 척결하는 것이다. 학문적으로는 자기가 지지하는 학설이나 이론에 어긋나는 다른 학설을 물리치는 경우를 말한다. 이 문제는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정한 초기부터 시작하였다. 조선은 고려 불교의 타락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유학과 유교를 세웠으며 숭유 배불을 정책 기조로 삼았다.
 
이에 대한 이론적 초석을 제공한 이는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1342~1398)이다. 그는 벽이단 논리에 따라 성리학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유학의 자기 성찰과 함께 도교와 불교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그는 숙청을 당했지만 이후에도 성리학적 가치는 조선왕조 500년을 지탱하는 가치 체계로 확고히 지리 잡았다. 벽이단의 두 번째 사례는 조광조의 소격서 혁파에서 나타난다.

 
정암 조광조의 소격서 혁파
 
   
▲ 정도전(왼쪽)과 조광조 영정
 
   
▲ 소격동 지도
 
소격서는 도교의 제천행사로 삼청성진(三淸星辰,上淸•太淸•玉淸은 신선들이 살고 있다는 곳)에 지내는 초제(醮祭)를 담당했던 국가기관이었다.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도교의 여러 궁관(宮觀)과 전당(殿堂)을 없애고 소격전과 대청전(大淸殿)만 남겼지만 1396년(태조 5) 한양 천도와 더불어 지금의 서울 종로구 소격동(삼청동)에 소격전과 삼청전을 새로 설치했다.
 
1466년(세조 12) 관제 개정 때 이름을 소격서로 바꾸었고 《경국대전》에도 수록되었다. 그러나 유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소격서 혁파 논의가 대두했다.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1518년(중종 13) 유림과 유생들의 집요한 요청으로 소격서를 혁파했다. 그러나 이들이 쇠퇴하자 다시 복설되었으나 사림들이 득세하던 선조 이후에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두 번째 벽이단 문제는 논의된 지 70여년 만에 소격서의 폐지로 막을 내렸지만 벽이단이 문제로서 위정척사 논란으로 이어지는 계기를 제공한 셈이다. 종교 문제에서 교리적 논란은 매우 엄격함을 시사해 주는 대목이다.
 
 
벽이단과 위정척사 운동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유교적 질서는 공(孔)・맹(孟)・정(程)・주(朱)의 학통을 유일한 정학으로 보았으며 이후 등장한 양명학(陽明學)과 실학, 불교(佛敎)와 도교(道敎) 서학(西學)과 동학 등 모든 다른 사상과 학문 종교는 모두 이단적 사학(斯學)이라 규정하였다. 물론 벽이단 현실은 유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기독교에서는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우상 배척 논은 기독교적 벽이단이다
 
천주교 박해는 이런 유교적 벽이단의 논리에서 시작되었지만 천주교가 용인되면서 천주교의 박해는 사라졌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고 방향을 바꾸어 이제는 전통 사회체제를 고수하고 유교적 질서를 고수하는 반외세 운동의 이념적 바탕이 되었다. 위정척사 운동으로 발전했으며 실사구시적 개화사상과 더불어 유교의 한 유파를 형성했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에는 이항로(李恒老)・기정진(奇正鎭) 등이 서양세력의 침범은 국가 존망의 위기를 조성한다고 주장하면서 서양문물을 배척하고 통상에 반대하였다.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뒤에는 최익현(崔益鉉)이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을 내세웠다..
 
특히 문호개방 이후 실학적 개화사상이 고조되면서(東道西器論) 외세 침투에 주체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위기의식에서 위정척사 운동으로 발전해 나갔으며 국권 상실 전후에는 실학적 개화 세력과 더불어 의병 학쟁과 해외 망명투쟁으로 변전해 갔다.
 
결국 이 두 유파는 임시 정부의 활동을 통해 대한민국 건국이념으로 투영되었다. 이 두 유파에서 내세웠던 이론적 근거와 활동의 지향점은 모두 소현세자가 시도했던 서학의 전래에 그 뿌리를두고 있으며 천주교 전래가 그 단초를 제공한 셈이다. 한국 천주교가 자생적 태동과 함께 한국의 역사 발전에 끼친 지대한 공헌의 한 사례로 소중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 채용신 그림 의병장 초상화
 
 
2014년 광화문 시복(諡福, Beatificatio)식
 
시복이란 가톨릭에서 성덕이 높은 이가 죽으면[ 선종(善終)]하면 일정한 심사를 거쳐 성인의 전 단계인 복자로 추대하는 것을 말한다. 복자란 공식 선포한 사람을 말하고 이를 선포하는 교황의 선언을 시복식이라 한다. 이번 한국의 시복식에 127위 복자가 시복되었는데 거의가 순교자다. 시복식에 설치되는 제대 [그림참조] 초상화는 모두 한국적 풍미가 물씬 풍긴다. 223년의 역사와 전통도 있겠지만 1984년 바티칸에서 열린 시성식에서 사용된 초상화는 이탈리아 사람이 그려 왜색 풍미가 농후해 한국인의 빈축을 샀다. 작가는 몰라서 그런 실수를 했다고 해명했지만 뒷맛이 씁쓸했던 기억이 남는다.
 
복자의 초상화 그림에서 윗줄 왼쪽은 윤지충 바오로 복자인데 최초의 순교자이고 고종사촌 정약용을 통해 신앙을 접했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1752∼1801는 중국인으로 한국천주교회가 모셔온 신부다. 그가 입국해 선교한 지 6년 만에 조선의 신자 수가 1만 명으로 늘었다고 한다. 강완숙(골룸바, 1761∼1801)는 조선의 첫 여성 신도 회장이다. 유중철 요한 (1779∼1801)과 이순이(1782∼1802)는 자신들을 온전히 하느님에게 바치고자 결혼 뒤에도 동정을 지킨 부부다.
 
   
▲ 2014년 8월 16일 복자품에 오를 124위 순교자 중 주요 인물 초상(한국천주교주교회의)
 
아랫줄 왼쪽부터 황일광 시몬 복자는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천한 신분 출신이고, 이순이 루갈다는 유종철과 부부간이다. 이시임 안나(1782~1816)는 아이를 낳았으나 옥중에서 잃었으며 마리아(1801~1840)는 한국의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 번째로 서품된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다. 그와 최양업 신부는 조선인으로는 두 번째로 사제가 된 사람이다. 신앙을 증거한 관점에서 볼 때 김대건 신부의 순교는 전형적인 피의 증거이고, 최양업 신부의 사목 활동은 땀의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맺음
 
우리나라는 다 종교의 나라이다. 단군 시대의 토속적 신앙에 기반을 둔 무교[巫敎]와 도교적 자연주의 선교[仙敎]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 상황에서 불교가 전래되면서 토작종교와 마찰을 빚었지만 이차돈의 순교를 통행 상생하게 되었으며 통일신라와 고려에서 주류적 위치를 점했다. 조선 왕조에서는 도교과 불교를 억압했다. 소격서는 혁파되었다. 중 후기에 이르러 천주교가 전대되고 박해가 이어졌다.
 
이렇게 지속적인 것은 벽이단 자세 이외도 한국인의 종교적 정서의 관념상의 괴리 때문 일 것이다. 물론 일본에 견주면 매우 인간적이었고 관대했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교세를 보면 우리나라 천주교 신자는 2012년 말 현재 510만여 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세계 227개 국가에서 45번째였으며, 아시아에서는 필리핀(77,344,000명), 인도(19,253,000명), 인도네시아(7,347,000명), 베트남(6,404,000명)에 이어 다섯 번째로 신자가 많다. (교황청 국무원 통계처가 발행한 <교회 통계 연감>)
 
그러나 이번 시복식을 보면서 좀 허전함이 든다. 그 까닭은 가톨릭의 용서와 화해가 돋보이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박해를 가했던 주체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유교적 벽이단론에 의하여 박해를 가했던 주제들은 대부분 관료들이지만 이들은 성리학으로 무장된 사림들이고 혹세무민이란 구호를 내건 종교적 왕따요 탄압이었다.
 
그러나 위정척사와 실천 개화운동은 외세의 저항과 실용으로 바뀌면서 항일투쟁과 국권회복으로 연계시켜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건국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식민 정책의 혹독한 탄압과 억압으로 서슬 퍼런 위정척사나 실천 개화운동의 칼날은 무디어 지고 일제에 순응하면서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지금은 스스로 가누기도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렸다. 박해의 상대에게 화해나 용서를 빌 능력을 상실한 체 무기력한 모습이라 안타깝다 시성식을 바라보면서 230년이 지났지만 가해자와 피해자는 함께 용서와 화해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리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