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천평(天平, 729-749) 조각의 작가는 대개가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러나 큰 절에는 반드시 뛰어난 조각가 또는 조각가군(群)이 있었다고 본다. 그것을 담당한 사람들은 어쩜 승려였을지도 모른다. 삼월당(三月堂)의 양변(良弁, 689-774)이 뛰어난 조각가였다는 전설 등은 배척하기 어려울 것이다. 삼월당의 건축이라 함은 당내의 조각을 말하며 양변과 관련 있는 것은 대부분이 일류 걸작품이다. 이는 적어도 양변이 뛰어난 예술가이거나 아니면 매우 뛰어난 예술가를 곁에 두었다는 증거이다. 만일 그 양변상(良弁像)이 자작품이라면 양변은 초일류 조각가이다. 하지만 아니라 해도 그의 곁에 있는 조각가 또는 그 제자가 조각을 했다면 양변은 천하제일의 조각가를 양성한 셈이 된다. 이 글은 사찰순례기의 바이블이라는 《고사순례(古寺巡禮)》를 쓴 일본의 철학자이자 문화사가인 와츠지데츠로(和辻哲郎, 1889~1960)가 쓴 백제스님 양변에 관한 글이다. 나라(奈良) 동대사의 첫 주지였던 백제스님 양변이 조각가였을 것이라는 주장은 어쩌면 생소한 이야기일지 모른다. ▲ 어린 양변을 독수리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백영춘이 청구고전성악학원의 벽파 이창배선생을 찾아 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남자 제자가 흔치 않던 시기여서 그에 대한 기대가 컸다는 이야기, 벽파의 수업 방식은 성악의 기초를 정가(正歌)라고 생각하고 시조나 가사, 때로는 가곡도 지도하면서 발성이나 호흡을 강조한 다음, 선소리 산타령이나 좌창 등을 지도했다는 이야기, 그것도 실기와 함께 이론적 배경, 즉 민요의 역사, 종류, 사설의 이해, 고어(古語)풀이 등 이론적인 바탕을 지도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뿐난 아니라 벽파선생의 강의는 언제나 풍부한 내용으로 재미있고 교훈적이었으며 판서 자체가 너무 멋있어 수업이 끝나도 지우지 못했다는 이야기, 이러한 영향을 받은 백영춘 역시 제자들에게 폭 넓은 소리의 세계를 안내해 주고 있다는 이야기, 백영춘은 스승의 뜻을 받들어 소리공부와 장단 등 모든 과정을 마치면서 강습과 각종 공연에 참여하기 시작했으며 1975년, 국악협회가 주최한《전국민요경창대회》에서 당당하게 장원을 하였고 다음해에 이수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 장대장타령을 하는 백영춘 명인 이번 주에는 그가 재담소리와 만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금당은 동쪽 입구로부터 들어가게 되어 있다. 우리는 그곳(벽화)으로 가기 위해 먼저 본존 앞에서 왼쪽으로 꺾었다. 약사삼존불 앞에 왔을 때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서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일렬로 나란히 줄지어져 있는 오래된 불상과 검은 기둥 사이의 서쪽 벽에 아미타불이 밝은 모습으로 합장한 손의 모습까지 확실히 보이는 것이었다. 동쪽 입구에서 조금 먼 거리에 있는 아미타불이 이렇게 확실히 보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이 정도의 거리를 두고 바라다본 벽화의 조각적인 아름다움이 선명하게 눈에 새겨지는 것 또한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벽화에 이르는 길목의 본존불과 좌우 조각에는 눈도 주지 않고 우리는 아미타불쪽으로 내달았다. 이 그림이야말로 동양회화의 절정이다. 꽤 박리된 부분이 있었지만 그 흰 박리(剝離)면조차 벽화의 신선한 생동감으로 느껴졌다. 이 벽화 앞에 서면 아무 생각을 할 수 없다. 아무것도 보태고 더할 것이 없다. 그저 바라다보고 취할 뿐이다. 이것은 금당벽화로 유명한 나라의 고찰 법륭사 금당(대웅전)에 화재가 나기 전 금당벽화를 본 일본의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와츠지데츠로(1889~1960)가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 속풀이에서는 백영춘에게 영향을 준 라디오 속의 명창들 중에는 장학선 외에 이반도화(李半島花), 이정렬, 이부용, 장금화 등도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평양의 기성권번 김밀화주의 제자들이란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므로 현재 남한에서 전통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서도소리의 뿌리는 김밀화주의 소리이며 그 소리를 이어받은 장학선을 국가에서는 중요무형문화재 서도소리의 최초 예능보유자로 인정하였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 이후는 김정연과 오복녀가 서도소리를 전승해 왔고, 이들의 제자들이 현재 그 소리를 이어가고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백영춘에게 소리의 길을 가도록 영향을 준 장학선, 이정열, 이반도화, 이진홍, 이소향, 유개동과 같은 명창들은 1900년대 초 한일강제합병 앞뒤로 태어나서 어려운 시대를 소리와 함께 살다간 진정한 예능인들이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또 백영춘은 라디오를 들으며 소리를 익히던 중, 방송국이 주최하는 민속의 잔치에 출전하여 실력을 발휘하였고,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벽파 이창배 사범에게 부름을 받았다는 이야기, 그래서 소리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 청구고전성악학원을 찾아 선생의 제자가 되었고 그 학원에서 시조며 가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곡우(穀雨), 봄비가 내려 백 가지 곡식을 기름지게 한다는 날이다. 그래서 이 무렵 농가에서는 못자리할 준비로 볍씨를 담근다. 또 곡우 무렵부터는 찻잎을 따서 덖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즈음 언론들은 이를 취재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언론이 죄다 녹차라며 보성 차밭만 취재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녹차는 우리 고유의 전통차가 아니라는 것이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여러 차 관련 문헌을 봐도 차(茶)라고만 나오지 녹차(綠茶)는 없다. 그 까닭은 우리 전통차가 녹차와는 다를뿐더러 예전부터 그냥 차라고만 했기 때문이다. ▲ (그림 뉴스툰 제공) 2천 년 전통차와 일본 역수입 녹차 전통차와 녹차는 우선 품종이 다르고 가공 방법이 다르며, 우려내면 빛깔이 다르다. 먼저 전통차는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래 야생으로 맥이 이어져 왔다. 그리고 가공방법은 솥에 열을 가하면서 비비듯 하는 덖음방식이다. 그렇게 해서 만든 차를 우려내면 빛깔은 다갈색을 띈다. 그러나 우리 차나무가 일본으로 건너가 오랫동안 토착화 과정을 거치며 녹차가 되었다. 가공방법은 찐차(증제차)이고 차를 우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뜻하지 않은 지진으로 지금 큐슈지방의 구마모토는 불안의 연속이다. 그걸 반영하듯 뉴스에선 시시각각으로 작은 여진이라도 보도하느라 바쁘다. 하루빨리 여진이 멈춰 불안에 떠는 주민들이 지진복구에 힘쓰길 빌어본다. 구마모토(熊本)라고 하면 일본의 3대성으로 꼽히는 구마모토성(熊本城)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이밖에 나고야성(名古屋城), 오사카성(大阪城)을 합쳐 3대성이라고 할 만큼 구마모토는 성곽도시다. 성곽도시는 성주들이 각각 있게 마련이다. 각 성주들은 성곽 안에서 만큼은 왕과 같은 존재이다. ▲ 아름다운 구마모토성(熊本城)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시대부터 왕권이 아니라 장수들이 각 성을 중심으로 권력을 서로 쥐고자 다툼이 끊이질 않았다. 조선이 중앙집권체제였다면 일본은 일찍부터 지방분권제가 발달한 셈이다. 성주들은 서로의 성을 지키고자 전쟁을 일삼았으며 빼앗았는가 하면 빼앗기는 일이 반복되기를 무신정권 내내 근 700여 년간 크고 작은 전쟁 속에 살아야 했다. 풍신수길의 오사카성이 철통같이 방어 된 것 같아도 결국은 덕천가강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에도성에 그 명성을 넘겨주지 않았는가 말이다.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재담소리를 복원하여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은 백영춘은 어떤 인물인가? 어떤 인연으로 소리꾼이 되었을까? 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를 따라 장터에서 무나 배추 또는 파를 단으로 묶어 파는 일을 돕기도 했는데, 파 단을 셀 때 단순하게 수량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가락이나 장단을 넣어 구수하고 음악적이어서 주변에 널리 알려졌다는 이야기, 그 소리를 듣기 위해 일부러 시장에 나오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여서 시장 내에서 밖으로 이름이 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한국 장단(長短)은 3분식 구조인데, 장-단의 단조로운 구조보다는 중간에 단 장-으로 변화를 주어야 재미가 있다는 이야기, 백영춘은 작업장에 갈 때면 늘 라디오를 지니고 다니면서 당대 명창들의 소리를 놓치지 않고 따라 불렀다는 이야기를 겻들였다. 그가 좋아했던 명창 중에서 장학선(1905~1970)에 대해서는 1920년대 초, 다나베가 쓴대동강주유기(大同江舟遊記)에 나오는데, 대동강에서 4인의 기생과 뱃놀이를 할 때, 제일 소리가 뛰어나 인상적이었던 사람이 15세의 장학선(張鶴仙)이었다는 이야기, 그녀는 10세 때 평양 관우물 소리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3월 29일 저녁 정효재단 설립기념으로 백영춘, 최영숙 등이 무대에 올린 개막 공연 이야기를 하였다. 주로 서울지방에서 불리고 있는 아리랑을 비롯한 민요창과 장대장타령이라는 재담소리를 위주로 하였다는 이야기, 스승 이창배 명인의 활동이나 공적으로는 노랫말 속에 나오는 어려운 고사(古事)나, 한문구(漢文句)의 해설, 부정확한 발음이나, 왜곡된 표현, 저속한 내용은 수정하였으며 그래서 오늘날 교육현장에서 전통민요의 교재를 만들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이날 개막공연은 박춘재의 재담소리와 이창배의 경서도소리가 중심이었지만, 앞으로 이어지는 4개월간의 공연에는 회심곡 탑돌이 등의 불가(佛歌), 무가(巫歌), 신민요 등, 경서도창의 과거와 현재의 모든 노래를 포함하며 공연과 함께 명창으로부터 소리도 배우고, 대화도 나누는 시간을 마련한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이창배 사범과 함께 경서도창 전승에 공이 있는 정득만 명창 과천패 소완준의 제자로 산타령을 이어오는 한편, 시조와 가사, 긴잡가도 잘 불렀으며 박춘재의 사랑방에 드나들며 귀에 익힌 재담소리를 백영춘에게 일러주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현재의 경서도 명창 중에서 이창배,
[우리문화신문=진용옥 명예교수] 고종의 전화 봉심(奉審- 능 참배) 《고종실록》 고종 37년(1900년) 3월 14일에 함흥과 영흥의 본궁으로 떠나는 윤용선과 이용직을 소견하다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은 기록이 나온다 [전략]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전화과 주사(電話課主事)가 기계를 가지고 동행하여야 할 것이니, 전화로 먼저 아뢰면 필경 빠를 것이다.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그렇게 하면 이보다 더 편리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북도(北道)의 능침(陵寢)을 봉심(奉審)하는 것은 원래 연한이 있는데 갑오년(1894) 변란 이후로 오랫동안 예를 행하지 못하여 항상 송구스러웠다. 경이 어진(御眞)을 배종(陪從)하는 일로 북도에 내려 가거든 예조(禮曹)의 당상(堂上) 함께 각릉(各陵)에 봉심하고 만약 고쳐야 할 곳이 있으면 편의대로 잘 처리하라. 해도의 도신(道臣)과 겸장례(兼掌禮)에게 분부하여 일체 봉심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그동안 고종과 순종이 문상 또는 봉심을 전화로 했다는 사실이 구전으로 전해오기는 했으나 기록으로 처음 확인되었다. 능침 봉심에 전화과 주사가 기계를 가지고 동행한다는 것이다. 봉심이란 왕명을 받들어 찾아본다는 뜻인데 참배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완연한 봄기운이 도는 요즈음 서울 여의도는 벚꽃잔치(놀이)를 한다고 법석이다. 국회의사당을 둘러싼 윤중로 주변은 흐드러진 벚꽃을 배경삼아 사진 삼매경에 빠진 사람들로 북적인다. 여의도뿐만이 아니다. 전국 곳곳에서 비슷한 벚꽃잔치가 한창이다. 마치 일본 같다. 벚꽃잔치라고 하면 일본의 하나미(花見)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나라꽃인 벚꽃을 일본말로는 사쿠라라고 하는데 이상한 것은 벚꽃잔치를 ‘사쿠라마츠리’라 하지 않고 ‘하나미’라고 부르는 점이다. 하나미(花見)를 직역하면 ‘꽃을 본다’라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달맞이도 ‘츠키미(月見)’라고 하는데 직역하면 ‘달을 본다’라는 뜻이다. ‘꽃놀이’, ‘달맞이’와 같은 우리말과 견주면 좀 맹숭맹숭한 느낌이지만 어쨌거나 벚꽃잔치는 원래 우리의 오랜 습관은 아니다. ▲ 벚꽃잔치인 하나미[花見] 특집을 알리는 광고 일본인들의 꽃놀이 풍습은 나라시대(710-794)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귀족들의 꽃놀이 행사였는데 당시에는 주로 매화꽃놀이였다. 그러던 것이 헤이안시대(794-1192)로 들어서면 서서히 벚꽃으로 바뀐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