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강남의 요지에는 두 임금이 이웃하여 영면(永眠)하고 있다. 바로 성종(선릉)과 그의 아들 중종(정릉)이다. 워낙 비싼 땅이라 그런지 능역(陵域)을 싹둑싹둑 잘라 최대한도로 개발하느라고, 왕릉 바로 옆까지 길이 나있다. 정릉 옆길은 이면도로라 그나마 차들이 적게 다니는데, 선릉 옆길에는 성종이 누워있건 말건 차들이 씽씽 달린다. 성종은 살아서는 조선의 문물을 완비하였다고 하여 묘호(廟號)도 이룰 ‘성(成)’자를 써서 성종이라 했지만, 죽어서는 영 잠자리가 편안치 않다. 임진왜란 때는 왜놈들이 무덤을 파헤치고 성종의 시신을 능욕하더니만, 오늘날 후손들은 왕릉에 바짝 붙여 넓은 도로를 내었으니 성종이 무덤 안에서 영원의 잠을 제대로 누릴 수 있겠는가? 그런데 성종은 그나마 옆에 아내(정현왕후 윤씨)라도 같이 있지만, 중종은 홀로 누워있다. 임금이 영면하는 곳이면 당연히 그 옆에 왕비도 같이 있어야 하거늘, 중종은 왜 홀로 누워있는 것일까? 지금부터 그 사연을 알아보러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중종은 원래 고양시 서삼릉 내 둘째부인 장경왕후(희릉) 옆에 같이 묻혔었다.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엿새 만에 죽었으니, 중종도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사람들은 즐겨 산으로 올라간다. 산에 오르는 길옆에는 작은 도랑이 있고 거기에는 지난 가을 노랗게 말라버린 키가 큰 풀들이 여전히 가을의 뒷자락 색깔을 거둬가지 못하고 있다. 봄은 한겨울 게을러서 집 안에 있는 것만을 좋아하던 사람들을 불러내는 힘이 있는데 그 봄으로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는 조금 시간이 필요하다. 산행을 나서보면 이곳저곳에 이미 허연 솜털을 날려버린 억새들이 지난 가을처럼 손을 흔들지는 않고 그저 좀 뻣뻣하게 서 있다. 따라서 이럴 때에 지난 가을에 무반사적으로 나오던 노래와 노랫말 "아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는 의미가 없어진다. 그렇더라도 그 노랫말에 곧바로 나오는 질문은 유효하다. "으악새가 뭐예요? 무슨 새길래 슬피 우는가요?" 여기에 일행 중에서 제법 유식한 분이 목소리를 높인다. "아니 아직 그것도 몰라? 으악새는 새가 아니야. 저기 저 억새풀을 사투리로 으악새라고 하는 거야." 이 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어차피 저 풀들은 곧 잘리거나 새로 나오는 푸른 줄기에 밟힐 운명이긴 하지만... 그런데 이처럼 우리의 상식이 되어버린 으악새가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바이러스는 생명체? 세균보다 작아서 세균여과기로 분리할 수가 없으며 전자현미경을 사용하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작은 입자(粒子)를 바이러스라고 한다. 바이러스는 너무 작아서 1950년대에 전자현미경이 개발되면서 비로소 그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여기에서 입자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사실 바이러스는 무생물적인 특성이 있어서 “바이러스가 생명체다.”는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바이러스는 기존 생명체의 정의에 포함시키기가 모호하다. 생명체라고 하면 세포로 구성되어 있고, 또 대사 작용을 하고 자손을 남겨야 한다. 그러나 바이러스는 세포가 없이 단지 유전정보를 가진 핵산과 영양물질인 간단한 단백질만으로 구성되어 있을 뿐이다. 바이러스는 평상시에는 생명체의 가장 큰 특징인 성장과 복제라는 특성을 보이지 않는다. 바이러스는 소금 결정처럼, 또는 석회석이나 철분 같은 광물질처럼 수천 년 동안 변하지 않고 그대로 존재할 수가 있으므로 생명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바이러스가 일단 다른 생명체의 세포 안에 침입하면 필요한 영양물질을 흡수하고 분열을 시작한다. 그렇다면 생물학자는 바이러스를 생명체라고 말하는가, 비생명체라고 말하는가?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요즘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온 나라가 야단이지요? 코로나바이러스 예방과 치료도 문제지만 이 때문에 초래된 사회 경제적 피해도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며칠 전 일요일 저녁에 이태원에 나갔는데, 거리에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평소 주말이면 아무리 춥더라도 사람으로 붐비던 이태원 거리인데, 이렇게 거리가 설렁한 것은 처음 봅니다. 저녁을 먹고 가끔 들르던 맥주집에 들어갔는데, 한참 동안 손님이 우리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종업원들이 우리가 주문한 것 가져다주고는 자기들끼리 카운터에 모여 잡담을 하고 있더군요. 자기들도 평소 같으면 바빠야 할 시간에 자기들끼리 노닥거리고 있으니, 노닥거리면서도 어색했을 것입니다. 이 집에 이렇게 손님이 없는 것도 처음 봅니다. 아마 평소 중국 관광객들이 많이 나오던 명동도 틀림없이 썰렁할 것 같습니다. 이거~ 빨리 진정이 되어야지 이러다가 경제에도 악영향을 많이 끼칠 것 같아 걱정되는군요. 그런데 여러 나라가 중국 우한으로 전세기를 파견하여 자국민들을 데려오는 등 온 세계가 이 때문에 떠들썩하지만, 사실 이 병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중국에 304명뿐입니다. 아! 참! 필리핀에서 오늘 한 명 사망자가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지난주에 눈과 추위 실종신고서를 내려고 했더니 하늘이 입춘에 맞춰 추위를 보내준다. 이 정도 추위도 없이 올겨울을 거저먹었다는 비난을 듣기가 괴로우셨던 모양이다. 중국발 무슨 바이러스가 코로나 전염되는지 입으로나 전염되는지 갑자기 우리나라에도 감당하기 어려운 소용돌이를 몰고 오고 있는데 이런 때에 입춘에 맞춰 오는 추위가 좋은 일인지, 안 좋은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추위가 옴으로써 잊어버릴 듯하다가 생각나는 꽃이 있다. 바로 봄이 오는 것을 가장 먼저 알려준다는 매화다. 梅 매화 얼음 뼈 옥 같은 뺨. 섣달 다 가고 봄 오려 하는데 북쪽 아직 춥건만 남쪽 가지 꽃 피웠네. 안개 아침엔 빛 가리고 달 저녁엔 그림자 배회하니 찬 꽃술 비스듬히 대숲 넘나고 暗香1은 날아서 금 술잔에 드누나. 흰 떨기 추워 떠는 모습 안쓰럽더니 바람에 날려 綠笞2에 지니 애석하도다. 굳은 절개 맑은 선비 견줄만 함 이로 아니 우뚝함 말할진대 어찌 보통의 사람이라 하리. 홀로 있음 사랑해도 시인이 보러감은 용납하지만 들렘을 미워하여 狂蝶3이 찾아옴은 허락치 않는도다. 묻노라, 廟堂4에 올라 높은 정승의 지위에 뽑히는 것이 어찌 옛날 林逋5 놀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이상하다. 24절기로 보면 양력으로 분명히 지난해 12월에 소설 대설 지났고 올해 들어서는 소한 대한이 다 지났는데 겨울의 두 단골손님이 영 오지를 않는다. 하나는 눈이고 다른 하나는 추위이다. 눈은커녕 대한을 지나면서 비가 내린다. 그래서 이 두 손님에 대한 실종신고서를 작성하려 한다. 그런데 이 신고서는 어디다 내야 하는가? 눈이 오지 않으면 청소부들이 편할 것이요, 추위가 오지 않으면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웃들이 추위에 대한 비용지출이 줄어들어 편하고 좋은 것은 사실이겠지만 우리 사회라는 것을 어느 부분만 가지고 따지기보다는 보다 큰 전체를 봐야한다면 겨울은 겨울다워야 사회 전체가 그에 맞게 돌아간다는 것이 만고의 진리이고 보면 겨울이 겨울 다우려면 눈이 오고 추위가 봐야 하는데 그 두 손님이 몇 달째 실종인 것이다. 눈이 오지 않으니 눈에 관한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일화도 빛을 잃는다. 중국 동진(東晉) 때의 유명한 재상 사안(謝安)의 조카딸에 사도온(謝道韞)이 있었다. 사도온(謝道韞)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배움을 좋아했는데 특히 문장에 능했다고 한다. 사도온이 14살 되던 해 겨울, 밤사이 한바탕 서설(瑞雪)이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곧 설이다. 2020년 경자년 새해가 밝은지 한 달이 다 돼 가지만 실제로 12간지 60갑자를 따지는 것은 음력으로 하니 설이 지나야 경자년 쥐띠 해가 시작되는 것으로 봐야 옳다고 한다. 아직까지는 기해년 돼지띠인 셈이다. 말하자면 새해라고 하면서 2020년이 되었지만, 띠로 본 새해는 아직 오지 않은 셈이니 조금 복잡하고 불편하다. 이웃나라 일본은 일찌감치 음력을 폐지하고 모든 설을 양력으로 쇠니 그런 고민이 없다. 그것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하여간 새해를 맞는 헷갈림은 여전히 있는 것이다. 우리가 새해를 쇠는 습관은 언제부터일까? "진덕여왕(眞德女王) 5년(636) 정월 초하루에 왕이 백관(百官)의 조하(朝賀, 경축일에 신하들이 조정에 나아가 임금에게 하례하던 일)를 받았다. 새해를 축하하는 예법이 이때부터 비롯되었다." 고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에 기록이 되어있는 것을 보면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그 전에 고구려나 백제에서도 새해를 쇴을 것이지만 기록에 없으니 그저 신라 것을 칠 수밖에. 예전 조선시대에는 설날이 되면 일주일을 쉬는 것으로 되어있었다고 한다. 조상에 대한 예절을 중요시하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초대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는 리진의 연인이었다는 것만이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로 찍은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이 있지 않습니까? 서양의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78년 먼저 인쇄되었다고 우리가 자랑하는 불교서적 말입니다. 이 《직지심체요절》을 콜랭이 프랑스로 가져갔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 서양놈이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약탈해갔구나”라고 생각하실 분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책은 콜랭이 골동품상에게 값을 치루고 산 것입니다. 당시 조선에 온 콜랭은 동양문화에 관심이 많아 기회가 되는대로 우리의 책과 미술품 등을 사들였다는군요. 콜랭이 그렇게 수집한 책 중에 이런 귀한 책이 있었던 것인데, 당시에는 이 책을 산 콜랭이나 이를 판 상인이나 그저 고서(古書)로만 생각하고 사고판 것이지, 이 책이 그렇게 귀한 책이라는 것은 몰랐습니다. 이 책의 진가를 알아본 사람은 한국인입니다. 이 책을 프랑스로 가져간 콜랭은 1911년 이 책을 고서 경매장에 내놓아, 이를 골동품 수집가인 앙리 베베르가 샀습니다. 그리고 앙리는 죽을 때 이 책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하였습니다. 그 뒤 196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거기서 뭘 하고 있나요?" 어린왕자가 술꾼에게 말했어요. 그 술꾼은 빈 병 한 무더기와 술이 가득 찬 병 한 무더기를 앞에 놓고 말없이 앉아 있었어요. "술을 마시고 있지." 그가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했어요. "술을 왜 마셔요?" 어린왕자가 물었어요. "잊기 위해서야." "무엇을요?" 어린왕자는 어쩐지 측은한 생각이 들어서 물었어요. “내가 부끄러운 놈이란 걸 잊기 위해서야." 술꾼은 고개를 떨어뜨리며 고백했어요. "뭐가 부끄러운데요?" 어린왕자는 그를 도와주고 싶었어요. "술 마신다는 게 부끄러워!" 그는 말을 끝내고 입을 꼭 다물어 버렸어요. 프랑스의 작가 셍 떽쥐베리의 소설 《어린왕자》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술꾼들이 산다는 세 번째 별나라의 한 장면이다. 정말 술꾼들은 왜 술을 마시는지도 모르고 마시는 것 같다. 우리나라만 그런 줄 알았는데, 프랑스 사람들도 그랬음을 알게 된 것으로 다소 위안이 될까? 사람이 살다 보면 부끄럽기도 하고 근심도 많아진다. 그래서 접하게 되는 것이 곧 술인데, 술을 하면 다소 그런 근심이 일시적으로 잊어버리게 되는 효과가 있기에 예로부터 사람들은 술을 망우물(忘憂物) 곧 근심을 잊게 하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신경숙 작가의 소설 <리진>에는 홍종우(1850~1913)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홍종우는 한국인 첫 프랑스 유학생입니다. 마침 리진이 파리에 머무는 시기와 홍종우의 파리 유학 기간(1890~1893)이 겹치기에 작가는 또한 리진과 홍종우를 연결합니다. 둘은 프랑스의 유일한 조선인 남녀이었으므로 실제로도 파리에서 만났을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데, 역사에서는 이를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홍종우는 1988년 일본으로 건너가 2년 동안 아사히 신문사 촉탁 식자공으로 일하며 돈을 모은 뒤, 프랑스 유학길에 오릅니다. 프랑스 정치사상이 일본의 메이지유신에 영향을 끼쳤음을 알고 프랑스로 유학 갈 것을 결심한 것이지요. 왕권 절대주의 애국자 홍종우는 파리에서도 갓을 쓰고 도포를 휘날리며 다녔으며, 고종과 대원군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다녔다고 합니다. 서양옷을 입고 다니던 리진보다는 홍종우가 더 파리 시민들의 눈에 잘 띄었겠습니다. 소설에서는 이러한 홍종우가 리진에게 이성적인 눈길을 주자, 리진이 이를 거부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나중에 리진이 조선에 돌아왔을 때 홍종우는 계속 상소를 올려 콜랭이 리진을 데리고 갈 수 없게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