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8.15광복 직전의 국악계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일본의 지배 아래에서는 모든 분야가 주도적으로 활동할 수 없었던 것처럼, 조선음악협회도 그랬다는 점, 그래서 쟁쟁한 명인명창들이 개인적이고 창의적인 예술활동을 할 수 없었다는 점, 광복이 되자 조선음악단이나 조선가무단 등은 자연적으로 해산이 되었고, 종전의 이왕직아악부는 구황국아악부로 별도의 독립을 하였음을 얘기했다. 또 재야 국악인들은 1945년, 10월에 국악원을 만들었으며 48년에는 대한국악원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함화진을 대표로 부원장은 박헌봉, 그리고 유기룡, 이병성, 김천흥, 최경식, 임서방, 김아부, 남경흥 등이 간부로 활동하였다는 점도 아울러 얘기했다. 가무연구회는 해방 이후 회원 수가 많아졌는데, 그 까닭은 흩어져 활동하던 소리꾼들이 몰려들었고, 가정으로 돌아갔던 여류 국악인들이 다시 합세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라는 점, 여기서 벽파는 각종 사업진행이나 민요가사 수정, 신(新)가사의 작사, 그리고 왜곡된 가사를 바로잡는 작업을 했다는 이야기, 해방이 되면서 애호가들이 대한국악원으로 배우러 나왔다는 얘기도 했다. 특히 대학생들의 참여가 고무적이었다는 점, 또한 권번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셋째 경칩(驚蟄)이다. 원래 이름은 중국 역사서 한서(漢書)에 열 계(啓) 자와 겨울잠을 자는 벌레 칩(蟄)자를 써서 계칩(啓蟄)이라고 되었었는데 뒤에 한(漢) 무제(武帝)의 이름인 계(啓)를 피하여 대신 놀랠 경(驚)자를 써서 경칩(驚蟄)이라 하였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겨울잠 자던 동물은 음력 정월에 활동하기 시작하는데, 절기로는 경칩에 해당하며, 음력 9월에는 겨울잠을 자기 시작하는데 절기로는 입동(立冬)에 해당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기(禮記)》 「월령(月令)」에는 “이월에는 식물의 싹을 보호하고 어린 동물을 기르며 고아들을 보살펴 기른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경칩이 만물이 생동하는 시기이므로 이를 보호하고 관리하는 때임을 뜻한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임금이 농사의 본을 보이는 적전(籍田)을 경칩이 지난 해일(亥日)에 선농제(先農祭)와 함께 행하도록 정하였으며, 경칩 이후에는 갓 나온 벌레 또는 갓 자라는 풀을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불을 놓지 말라는 금령(禁令)을 내리기도 했다. 《성종실록(成宗實錄)》에 “우수에는 삼밭을 갈고 경칩에는 농기구를 정비하며 춘분에는 올벼를 심는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오래된 일본 과자점 관영당본점(寬永堂本店)은 긴테츠나라역(近鐵奈良驛) 바로 앞에 있다. 이곳은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에 생긴 유서 깊은 과자점이다. 전국에 여러 지점이 있는 관영당 과자점은 간판에 창업 시기를 관영(寬永)이라고 써 두었는데 관영(寬永, 칸에이)이란 일본의 연호로 1624년에서 1645년 기간을 말하며 에도시대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과자점 안을 기웃거리자 단정한 옷을 입은 종업원이 상냥한 인사를 건넨다. 보기에도 군침이 도는 노릇노릇하게 구운 도라야키(どら燒き)가 눈과 코를 자극한다. 도라야키는 밀가루, 달걀, 설탕을 넣어 반죽을 한 뒤 둥글납작하게 구워 두 쪽을 맞붙인 사이에 팥소를 넣은 일본과자를 말한다. 이 도라야키를 오사카와 나라(奈良)지방에서는 미카사(三笠)라고도 한다. 미카사란 과자 모양이 나라현의 미카사산(三笠山)과 닮은 데서 그렇게 부른다. 서양 과자점을 양과자(洋菓子)라고 한다면 일본 과자는 화과자(和菓子)이다. 그러고 보면 일본에는 관영당 같은 화과자점이 많다. 이곳에서는 카스텔라나 케이크 같은 양과자는 팔지 않고 대대로 화과자점 만의 독특한 전통 과자를 판다.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벽파 이창배의 《가요집성》은 경서도 소리꾼들에게는 교과서가 되었기에 지역마다, 혹은 명창마다 조금씩 다르게 불러온 고어(古語), 또는 원색적이고 직설적인 사설들은 고쳐졌다는 이야기와 함께 지난주에는 가무연구회의 활동, 조선 총독부내에 《조선음악협회》이야기를 하였다. 협회 내에는 일본음악의 방(邦)악부, 서양음악의 양(洋)악부, 그리고 조선악부가 있었는데, 이 조선악부는 음악단과 가무단이 존재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광복을 앞둔 1940년대 전후는 태평양 전쟁이 긴박해지고 있던 시기여서 강제 징용이나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음악단이나 가무단으로 몰려들었다는 이야기, 그러나 실기와 필기시험을 통과해야 기예증을 받을 수 있었고, 기예증이 있어야 위문공연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위문단은 가는 곳마다 그 인기가 대단해서 입장하지 못한 관객들이 큰 소동을 벌이는 사태까지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당시《조선악부》책임자로는 함화진, 조선음악단 단장에는 박헌봉, 조선가무단 단장에는 최경식이었고 여기에 소속된 연주진용은 심상건, 이충선, 김계선, 김봉업, 임유앵, 박초월, 장채선, 이창순, 경부용, 산타령의 엄태영, 최정식,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딸 가진 엄마들의 소원은 무엇일까? 전통사회에서는 곱게 키워 출가 시키는 것이겠지만 현대 사회는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활발한 만큼 딸에게 거는 기대와 소원도 다를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도 변치 않는 것은 딸아이의 건강과 올바른 성장'임은 틀림없다. 일본에서는 딸아이가 태어나면 할머니들이 건강하고 예쁘게 크라는 뜻에서 히나 인형을 선물하는 것이 보통이다. 예부터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이 풍습을 히나마츠리(ひな祭り) 라고 한다. 히나마츠리는 혹시 모를 미래에 딸에게 닥칠 나쁜 액운을 덜기 위해 시작한 인형 장식 풍습인데 이때 쓰는 인형이 히나인형(ひな人形)이다. 히나마츠리를 다른 말로 모모노셋쿠(桃の節句) 곧 복숭아꽃 잔치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복숭아꽃이 필 무렵의 행사를 뜻하는 것으로 예전에는 히나마츠리를 음력 3월 3일에 치렀다. 히나인형은 원래 3월 3일 이전에 집안에 장식해 두었다가 3월 3일을 넘기지 않고 치우는 게 보통이다. 3월 3일이 지나서 인형을 치우면 딸이 시집을 늦게 간다는 말도 있어서 그런지 인형 장식은 이 날을 넘기지 않고 상자에 잘 포장했다가 이듬해 꺼내서 장식하는 집도 꽤 있다. 그러나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일제강점기 말 가무연구회의 자체발표회나 흥행 공연에서 산타령을 불렀던 이창배와 정득만(鄭得晩)을 소개하였다. 정득만은 선소리 산타령이 국가지정 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최초의 예능 보유자 5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벽파 이창배와 함께 80년대 초반까지 경서도 소리의 중흥을 위해 애쓴 명창이라는 이야기, 20세 이후, 문세근과 최경식에게 배웠으며 맑고 높은 목소리를 지니고 있고, 특히 사설지름시조를 비롯해 12잡가 중 유산가, 소춘향가, 제비가와 노랫가락, 건드렁타령, 금강산타령, 풍등가 등을 잘 불렀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의 창법 중, 조르는 목은 누가 흉내를 내지 못했으며 강약이 분명해서 맛깔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는 이야기, 아끼는 제자가 공부를 소홀히 한다면 찾아가 지도해 줄 정도로 경기소리의 내일을 걱정했던 명창이었다는 이야기, 정득만이 부르던 산타령은 과천패의 모갑이 소완준이 전해준 산타령이며 합창으로 부르는 경우, 가사나 가락, 장단, 시김새가 서로 다르게 전해오고 있는데, 이를 인지한 벽파 이창배는 사설만이라도 통일시키기 위해 《가요집성》을 저술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벽파 이창배가 지은 《가요집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하늘에 보름달이 휘영청 떠 있다. 구름 타고 천천히 운명을 항해하는 저 보름달을 본다. 뒷동산에 올라 너그럽고 따뜻한 달빛에 온몸을 맡긴 채 지난 어린 추억을 더듬는다. 오늘은 우리 명절의 하나 정월대보름(음력 1월 15일)이다. 정월 대보름의 달은 한해 가운데 달의 크기가 가장 크다고 한다. 가장 작은 때에 비해 무려 14%나 커 보인다는데 그것은 달이 지구에 가장 가깝게 다가서기 때문이란다. 조선 후기에 펴낸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초저녁에 횃불을 들고 높은 곳에 올라 달맞이하는 것을 ‘망월(望月)’이라 하며, 먼저 달을 보는 사람에게 행운이 온다.'라고 적혀 있다. ▲ 정월대보름 달맞이, 맨 먼저 본 사람에게 행운이 온다고 믿었다.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우리나라는 농사를 기본으로 음력을 사용하는 전통사회였다. 또 음양사상(陰陽思想)에 따르면 해를 '양(陽)'이라 하여 남성으로 인격화하고, 달은 '음(陰)'이라 하여 여성으로 본다. 달의 상징적 구조를 풀어 보면, 달-여신-땅으로 표상되며, 여신은 만물을 낳는 지모신(地母神)으로 출산하는 힘을 가진다. 이와 같은 우리 문화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국 사회도 나이가 들고 병이 생기면 아들딸과 함께 살기 보다는 노인요양 시설로 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물론 여기에도 돈의 힘이 작용하게 마련이라 좀 더 안락하고 쾌적한 시설로 들어가려면 든든한 노후 자금이 필요하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꽤나 값나가는 시설에 들어갔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느냐하면 그렇지도 못하다는 게 문제다. 2월 16일 마이니치신문 보도에 따르면 도쿄 인근 가와사키시 사이와쿠(川崎市幸)에 있는 고급 유료 노인홈 S 아뮤 가와사키 사이와이쵸에서 잇단 노인 추락사를 일으킨 사람이 직원이었음이 밝혀지면서 일본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고 있다. ▲ 일본의 한 요양원 직원, 입원한 노인을 추락사시키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이름하여 입소자 연속 추락 살해 사건을 일으킨 사람은 다름 아닌 이곳에 근무했던 젊은 남자 직원으로 그는 새벽 시간을 틈타 베란다에 나와 있는 노인들을 밀어서 추락사 시켰던 것이다. 범인은 태연하게 추락사한 노인을 처음 발견한양 쇼를 부렸지만 결국 철창신세를 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범인은 노인학대도 서슴지 않았는데 비상시 누르게 되어 있는 빨간 버튼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변방잔존(邊方殘存)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이 말의 뜻은 대도시나 중심지는 그 시대 상황에 따라 늘 변화하는 양상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에 옛 문화를 접해보려면 변두리 지역이나 또는 이민자들이 많이 모여 사는 외국이어야 더욱 확실하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이태리의 스파게티를 먹으려면 미국 뉴욕의 리틀 이태리에 가던가, 한국의 옛 음식을 먹으려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가야 된다는 의미가 된다. 1935년에 제작한 《조선어독본》이라는 고음반 6매는 지난 2004년에 CD음반으로 다시 제작되었는데, 그 내용은 당시 사범부속초등학교 학생들이 책 읽는 방법을 실제 녹음한 것이라는 이야기, 지금이라도 책 읽는 방법을 전국 지역으로 확산해야 하고 가능하다면 북한이나, 연변지역, 또는 세계에 나가있는 교포들까지도 확산해야 송서율창의 확산 운동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또한 훈민정음 스물여덟글자 중 지금은 스물네 글자만 쓰고 있는 점에서 우리의 표현 영역이 축소되었다는 이야기, 사람의 소리는 영혼의 소리여서 축문이나 종교의 의식에서 소리 내며 읊는 전통이 이어진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그 외의 송서 율창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1919년 3ㆍ1만세운동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반드시 2ㆍ8동경독립선언을 이야기 한다. 엊그제 설날이 바로 97년 전 동경 YMCA에서 유학생들이 나라의 독립을 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적국 일본에서 만세운동을 펼친 날이지만 그만 설날에 묻혀버려 아무도 이 날을 기억하지 않아 씁쓸했다.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조선유학생들은 유학생 학우회 총회를 한다는 명목으로 4백여 명의 학생들이 재일본도쿄조선YMCA (현재의 재일본한국YMCA) 강당에 모였다. 동경 경시청에서도 이미 눈치를 채고 오전부터 수십 명의 정사복 경찰을 파견하여 삼엄한 감시를 했다. 그런 가운데 식은 진행되어 회장인 백남규의 개회선언, 최팔용의 조선청년 독립단의 발족 동의, 백관수의 독립선언서 낭독, 김도연의 결의문 낭독에 이어 서 춘이 연설하려 하자, 일본 경찰이 무력으로 개입하여 학생 대표들을 모조리 검거하였다. 송계백 선생도 이날 함께한 유학생이었다. 선생은 평안남도 평원(平原) 사람으로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재학 중, 2ㆍ8 독립선언에 참가한 11명 대표 가운데 한 분이다. 선생을 포함한 재일 유학생들은 자나 깨나 조국광복의 꿈을 키워 왔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