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 이야기는 다나베의 대동강주유기(大同江舟遊記)를 보면서 그가 평양에 대한 인상이 매우 좋았기에 여러 가지 아름답게 묘사된 이야기를 하였다. 예를 들면 길거리에서 만나는 여인들 중에도 아주 예쁜 사람이 많다는 대목이라든가, 아름다운 곡선으로 어우러진 건축물을 극찬하는 등, 조선의 건축 문화에도 탄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뱃놀이에 동행을 하게 된 4인의 기생 중에서 장학선(張鶴仙)은 훗날 월남하여 60년대 말, 중요무형문화재 29호 서도소리의 초대 예능보유자가 되었던 인물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또 그는 10살 때 평양 관우물 소리방에서 노래를 배우기 시작하다가 14살 때부터는 평양의 기성권번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김밀화주(金蜜花珠) 명창에게 소리를 배웠다는 이야기, 김밀화주의 제자들로는 장학선 외에도 이반도화(李半島花), 이정렬, 이부용, 장금화 등, 쟁쟁한 명창들이 많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기성권번 출신의 장학선이라는 명창은 일제강점기 콜롬비아나 빅타 레코드회사 등에서 서도소리 음반을 취입하기 시작하였으며 1959년에는 그 유명한 전국의 명창대회 8도 명창대회에서 당당히 1등을 하여 그의 존재를 다시 한 번 세상에 알렸
[한국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죽은 아버지의 유품이 71년 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면 어떤 느낌이들까? 올해 78살인 사사키 씨는 27일 71년 만에 돌아온 아버지 유품을 끌어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사사키 씨 아버지의 유품은 대어기(大漁旗)로 출어시에 고기잡이배에 꽂는 깃발이다. 깃발의 주인공인 그의 아버지 미우라 씨는 태평양전쟁 때 구일본군에 징용되었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군수송선겸 감시선용으로 자신의 배가 차출되자 기관장으로 전장에 나가게 된다. 그러나 이 어선은 곧 침몰하게 되고 침몰한 어선에서 한 미국인이 이 깃발을 건져 보관해 오던 것을 미야자키현에 주소를 둔 미우라(三浦三之助)씨 딸인 사사키사요코(78살)에게 전해진 것이다. 이 깃발을 보관해온 사람은 미국 오하이오주에 사는 전 미군사무원이자 화가인 피터 럿쉬 씨(93살)로 그는 태평양전쟁 중 침몰한 일본배에서 이 깃발을 회수한 지인을 통해 이 깃발을 입수하여 보관해왔다고 한다. 대어기(大漁旗)는 가로 190센티, 세로 140센티 크기인데 이 깃발에는 텐요마루(天洋丸)의 미우라(三浦三之助)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이번에 그 가족의 품에 반환될 수 있었다. 럿쉬 씨는 이 깃발을 1942년 과
[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부여에서 개최되는 내포제 시조강습회, 그리고 때를 같이해 김연소 보유자의 시조창 발표무대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시조창은 3장 6구체의 시조시에 가락을 얹고 장단을 배열한 노래라는 점, 영조 이전 시대에는 5장 형식의 가곡(歌曲)이라는 틀에 얹어 불렀는데, 가곡은 16박이 한 장단이고, 구성음이나 잔가락이 많다는 점, 시조창도 촉급하지 않은 속도와 장중한 창법으로 부르기 때문에 한가하면서도 유장미를 느끼게 되는 노래라는 점, 그러나 현대인들에게 외면을 당하고 있으며 겨우 노인층에서만 명맥을 잇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에 놓여 있다는 점을 이야기 하였다. 또 지방정부에서는 지방 고유의 시조를 지방문화재로 지정하는 등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점, 시조창은 세련 정제된 형식미, 유장미, 표현의 절제미, 그리고 창법의 장중미를 느끼게 되는 노래로 5박과 8박의 장단구조와 3음 중심의 간단한 선율형으로 이어진다는 점, 그래서 세상 영욕(榮辱)이 한낱 뜬구름에 불과한 것임을 스스로 깨닫게 되는 노래라는 점, 6월 내포제 시조강습회가 해마다 성황을 이루어서 지역의 큰 축제로, 한국의 대표적인 시조창 축제로 자리잡아 가기를 기대한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장장채승(長長彩繩:오색의 비단실로 꼰 긴 동아줄) 그넷줄 휘늘어진 벽도(碧桃, 선경[仙境]에 있다는 전설상의 복숭아)까지 휘휘 칭칭 감어 매고 섬섬옥수(纖纖玉手) 번듯 들어 양 그넷줄을 갈라 잡고 선뜻 올라 발 굴러 한 번을 툭 구르니 앞이 번 듯 높았네. 두 번을 구르니 뒤가 점점 멀었다. 머리 위에 푸른 버들은 올을 따라서 흔들 발밑에 나는 티끌은 바람을 쫓아서 일어나고 해당화 그늘 속의 이리 가고 저리 갈제” ▲ 혜원 신윤복의 <단오풍정>, 그네뛰기와 창포물에 머리감는 모습이 나온다. 이 구절은 판소리 <춘향가> 가운데서 춘향이가 그네 타는 장면인데, 그네뛰기는 단옷날의 대표적 민속놀이다. 우리 겨레는 예부터 설날, 한식, 한가위와 함께 단오를 4대 명절로 즐겼지만 이제 그 명맥이 끊길 위기에 놓였다. 단오의 이름들과 유래 단오는 단오절, 단옷날, 천중절(天中節), 포절(蒲節 : 창포의 날), 단양(端陽), 중오절(重午節, 重五節)이라 부르기도 하며, 우리말로는 수릿날이라 한다. 단오의 '단(端)'자는 첫 번째를, '오(午)'는 다섯으로 단오는 '초닷새'를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우리에게 좀 낯선 말이지만 실심실학(實心實學)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의 실심실학자를 꼽는다면 양명학 연구를 발전시켜 사상적 체계를 세운 하곡 정제두 (鄭齊斗, 1649-1736) 선생을 꼽을 수 있다. 하곡 선생이 말하는 학문 곧 실심학문이란 외적인 남의 학설로 기준(定理)을 삼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내적인 기준(良知)에 의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그의 실심은 생명이 약동하는 실상과 원리(生理)를 참되게(眞理) 그대로 나타내는 마음이며, 그의 학문은 명분과 대의를 내세워 죽음으로 내모는 의리학(義理學)이 아니라 생명의 내실과 그 원리를 중시하는 삶의 학문(仁學)이라고 평가 받고 있다. 일본에도 그러한 실심실학자가 있다. 도쿠가와시대의 인물인 구마자와반잔(熊沢番山, 1619-1691)과 미우라바이엔(三浦梅園, 1723-1789)을 들 수 있다. 구마자와반잔은 17세기 오카야마번에서 봉사하면서 치산치수 사업을 했는데 그는 산림이야말로 나라의 근본이라는 신념으로 치산치수에 노력하였다. 구마자와는 진리가 있는 곳에서는 무엇이나 배우는 정심수신(正心修身)의 자세로 실학을 실천한 실심실학자였다. ▲
[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최창남 명창의 경서도소리 발표회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80을 넘긴 최창남 명창은 10대에 입문해서 평생을 올곧게 소리를 하며 살아온 명창이라는 이야기, 해마다 발표무대를 만들고 있는 모습은 실로 젊은 국악인들에게 귀감이 되며 의지와 집념은 실로 존경받아 마땅하다는 이야기, 그는 1945년 해방되던 해, 황해도에서 인천으로 내려왔고, 그곳에서 이북 출신의 서도 명창들에게 산염불이나 난봉가 류의 소리를 익혔으며, 이은관을 따라 공연을 하면서 배뱅이굿도 익혔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벽파 이창배는 최창남의 목과 기교, 목구성을 높게 평가하며 조교로 채용하였고 그 인연으로 최창남 앞에 소리를 다듬지 않은 명창들이 드물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는 강하고 부드러운 소리, 밝음과 어두운 소리, 그리고 진함과 옅음의 표현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현란한 기교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어서 경서도 소리를 좋아하던 옛 애호가들이나 이름난 명창들, 전문 국악인들이 주된 관객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 산타령과 난봉가류의 서도소리 외에 최숙희 팀의 장기타령, 큰 제자들인 한진자, 정재경, 이장학, 강연지가 부르는 노래가락과 창부타령, 임춘희, 조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약 200여 년간 일본을 12번에 걸쳐 방문하였다. 도쿠가와 막부의 경사나 쇼군(將軍)의 계승이 있을 때마다 방문하여, 조선 국왕의 국서를 전달하고 도쿠가와 쇼군의 답서를 받았다. 제2회 방문은 교토의 후시미(伏見), 제12회 방문은 쓰시마(馬)까지였으나, 그 밖에는 모두 에도까지 왕복하였고 제4회 부터 제6회까지는 닛코(日光)에도 방문했다. 조선통신사는 정사(正使)부사(副使)종사관(從事館)의 삼사(三使) 이하, 화원(員)의원(院)역관(官)악사(樂士)등 총 400명에서 500명에 이르는 큰 사절단이었다. 이들은 조선의 수도 한양을 출발하여 일본의 수도인 에도(江戶)까지 반년 이상이 소요되는 왕복 약 3,000㎞에 이르는 긴 여정 길에 올랐다. 조선통신사는 정사 외에 곳곳에서 일본의 많은 문인들과 필담을 나누고 노래와 술잔을 주고받기도 했다. 여기서 1636년의 기록을 보자. 때는 인조 14년 8월 11일. 통신사 일행은 한강을 출발하여 수로와 육로를 거쳐 9월 6일 부산에 도착, 여러 준비를 거쳐 10월 6일 부산을 출발했다. 이후 대마도를 거쳐 10월 27일 후쿠오카에 도착한다. 이어
[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산타령이란 산을 노래한다는 의미이다. 지난주는 지역에 따라 경기지방의 산타령, 서도 산타령, 남도 산타령으로 구분이 되고 있으며 서도지방의 산타령은 전쟁이후, 서도 명창들이 적었기에 배우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으며 경기지방의 명창들이 전수해 줄 정도였다는 이야기, 경기지방의 산타령은 입타령(口音)이 많고, 장단이 들쑥날쑥하며 강약이나 호흡조절이 까다롭고, 또한 고음역의 선율을 통성으로 질러대는 부분들이 많아 다소 남성취향의 노래로 알려져 있다는 이야기, 그러나 지금은 여성들이 소리패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이야기, 경기와 서도 산타령의 차이는 목을 쓰는 창법과 말 붙이는 자리가 다르며 장단도 경기보다는 서도가 빠르다는 점이 비교 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산타령은 산천경개를 두루 두루 노래하기 때문에 사설의 내용이 매우 건전하고 상식이 풍부해 진다는 점, 독창보다는 합창으로 부르며 통일성이 강조되는 노래라는 점, 협동을 통해 남과 더불어 사는 방법이나 질서를 배울 수 있다는 점, 2박, 3박, 4박 등의 장단형태나 3분박, 2분박의 리듬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씩씩하고 활달한 창법이나 다양한 표현법을 익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도시에 살다 보면 인구감소니 인구위기론 같은 말이 남의 일처럼 느껴진다. 아침 출근시간의 교통지옥 속에 사는 사람들은 더더욱 실감나지 않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나 이웃나라 일본에 바로 그 심각한 문제를 다룬 기사들이 앞 다투어 나와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특히 중앙공론 2014년 6월호 등에는 이러한 인구감소가 예견되는 시정촌(市町村, 우리의 시읍면) 523곳을 발표하여 일본사회를 공포로 몰아넣기도 했다. 홍수 같은 물난리가 아니라 인구가 빠져나가 도시가 폐허화 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라. 일본은 이미 중소도시의 인구감소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고 그 대책을 위한 작업에 머리를 모으고 있다. 그러나 대책이란 것이 하루아침에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이 골칫거리다. 그러한 가운데 지역의 기업가를 응원하는 미디어인 Future League 지에 실린 이케다하야토 씨의 기고문이 눈길을 끈다. 이케다 씨는 오랜 기간 북적대는 동경에 살다가 은퇴 후 조용한 삶을 보내고자 동경에서 머나먼 고치현(高知)으로 이사했다. 이곳에 거주하면서 이케다 씨가 발견한 것은 자신이 정착한 마을의 쇠퇴보다도 대도시의 베드타운 도시를 걱정하고 있
[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23회째 준비한 산타령의 발표공연 이야기를 하였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만 해도 산타령은 한국의 대표적인 합창곡으로 극장가에서는 선소리패를 초청해서 소리판을 벌렸다는 이야기, 산타령의 쇠락배경은 명인 명창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점이나, 타 장르의 구경거리가 동시에 등장했다는 점을 들었다. 60년대 말, 선소리 산타령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당시에는 김태봉, 유개동, 정득만, 이창배, 김순태 등 5인이 보유자로 인정되었으나, 현재는 이창배와 정득만의 제자들인 황용주, 최창남 외에 선소리산타령보존회회원들이 전승하고 있다는 이야기, 산타령은 1800년대 중반, 사당패들이 산타령 관련악곡들을 연행하였으며 그 이후에는 예인집단이나 세속 음악인들이 전승시켰다는 점, 산타령의 곡명은 1910년~1920년대 문헌인『증보신구잡가-增補新舊雜歌』를 비롯한 여러 자료에 보이고 있다는 점, 무엇보다도 다리밟기 놀이에서 빼놓을 수 없는 노래였으며살고지다리에서는 정월 대보름에 서울, 경기 일원의 산타령패(牌)들이 전부 모여 축제를 열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 혼신을 다해 소리를 하는 황용주 명창 산타령은 산을 노래하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