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19세기 많은 조선 난민들이 연변지역에 이주해 와 도문강 연안에 정착하였다. 1905년 일로전쟁(러일전쟁)후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되었다. 1907년 8월 일본은 소위 조선사람의 생명 안전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용정촌에 기어들어 불법적으로 통감부간도파출소를 세우고 중조변계분쟁을 일으켰다. (가운데 줄임) 그뒤 1909년 11월 2일 간도일본총영사관을 세워 산하 5개 영사분관을 두고 방대한 경찰 기구를 설립하여 간도를 포함한 동북지방의 침략 발판으로 삼았다. 전시실은 진실한 물증과 역사자료를 이용하여 간도일본총영사관의 내막을 폭로하고 있다. (필자가 문구를 읽기 쉽게 수정) ▲ 악명 높은 용정 시내의 간도총영사관 건물, 지금은 용정시인민정부 청사로 씀 이는 길림성 용정 육도하로(六道河路 869)에 있는 옛 간도일본총령사관 터에 있는 간도일본총영사관 죄증 전시관 앞에 있는 안내문이다. 1909년에 세운 건물 치고는 제법 튼튼해 보였는데 옛 간도일본총사령관 터에 여러 채의 건물이 옛 모습 그대로 자리하고 있었다. 현재 중앙 건물은 룡정시인민정부 청사로 쓰고 있으며 청사 건물 뒤에는 일본의 잔학성을 전시하고 있는 중국식 표현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 속풀이에서는 묵계월 명창이 목이 좋거나, 운이 좋아서, 또는 선생을 잘 만나서 명창이 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끊임없는 노력과 훈련의 결과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20세 이전에 방송을 통해서 젊은 명창 묵계월의 이름은 온 나라에 퍼져 나갔다는 이야기, 노래뿐이 아니라 송서로 유명한 이문원의 삼설기(三說記)를 착실하게 배워 오늘에 이어준 고마운 존재라는 이야기, 송서는 다른 노래를 배우지 않고는 부르기 어려운 소리라는 점도 이야기하였다. 힘차면서도 구성진 묵계월 명창의 소리는 연습을 통해서 얻은 결과라는 이야기, 무엇보다도 묵계월의 소리속을 제대로 맛보려면 성음사에서 제작한 민요삼천리라는 음반을 들어 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 음반을 추천하는 이유는 죽헌 김기수(金琪洙)선생이 민요 반주를 위해 관현악으로 편곡하였는데 묵계월의 노래와 반주음악, 합창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우리민요의 멋과 특징을 그대로 표출하고 있는 명반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경기창은 묵계월과 김옥심(金玉心)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고, 남도창은 성창순, 성우향, 한농선, 오정숙, 남해성 등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지난 9월 27일 분화 이후 계속해서 희뿌연 화산구름과 화산재를 내뿜는 일본 나가노현의 온타케산(御岳山, 御嶽山) 분화 사건으로 지금 일본열도는 놀란 가슴을 진정 시키지 못하고 있다. 연일 방송과 신문에서 머리기사로 보도되고 있는 온타케산의 비극은 이 산을 오른 등산객들이 맞이한 참혹한 죽음일 것이다. 10월 7일 현재 희생자가 54명으로 밝혀진 상태에서 행방불명자들을 찾기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고 언론들은 보도하고 있다. 이번에 분화한 온타케산은 표고 3,067미터로 나가노현에서 향토후지(鄕土富士)라고 불릴 만큼 지역민들에게 사랑 받는 산이었다. 향토후지란 지방에 있는 산으로 후지산에 견줄 만큼 높고 큰 산을 말한다. 이제 바야흐로 단풍철인지라 산을 찾는 이들이 점점 늘어가는 이때 아무런 사전 예고도 없이 맞닥트린 산정상의 분화에 등산객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 중 등산을 떠난 집에서는 노심초사가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소리가 들린다. ▲ 일본 나가노현의 온타케산(御岳山, 御嶽山) 분화를 알리를 방송 ▲ 분화 전의 온타케산(御岳山, 御嶽山) 섬나라이면서도 산악국가라고 할 만큼 높고 험한 산이 많은 일본은 온타케산을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우리가 흔히 경기소리의 계보를 이야기 할 때, 추, 조, 박을 화두로 삼는다. 추는 추교신(秋敎信), 조는 조기준(曹基俊), 박은 박춘경(朴春景)이라는 명창이다. 추교신의 소리는 장계춘을 거쳐 최경식에게 전해졌고, 최경식의 소리는 최정식을 비롯하여 이창배, 유개동, 박인섭, 김태봉, 정득만, 김순태 등으로 이어졌다. 이창배의 문하에서 최창남을 비롯한 황용주, 박상옥, 백영춘, 임정란, 이춘희, 김금숙, 김혜란, 김국진, 김영임, 이호연, 최영숙 등 현존 한국의 유명 경기명창들이 대거 배출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목청이 좋고 소리 잘하는 사람이 예능보유자(세칭-인간문화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소리의 전승과정이 충실하고 원형에 얼마나 충실한가 하는 점이 관건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연주자에겐 악기가 좋아야 하듯, 특히 경서도 소리는 아름다운 목청이 기본인데, 묵계월의 목청은 시원시원하고 힘차며 맑고 아름다워 하늘이 낸 목이라 하였다. 목청뿐이 아니라 넓은 음폭(音幅)을 지니고 있으며 그 위에 끊임없는 훈련과 반복 연습의 생활화가 묵계월을 명창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 등을 했다. 주수봉 선생에게 소리를 배우고 있던 묵계월은 어린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일본의 절에는 한국처럼 대웅전(본당)이 있고 웬만한 곳이면 목조탑이 있게 마련이다. 한국처럼 돌탑은 드물고 대부분 나무로 탑을 만드는데 나라(奈良) 흥복사 5층탑 같은 것은 아름다운 탑으로 손꼽히고 있다. 일본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한 백제 성왕 때는 아스카 지방이 불교가 성했고 이어 나라, 교토 순이다 보니 당시로서 천리길이나 되는 동경은 그다지 불교가 성하지 못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북쪽 지방인 아키다(秋田) 같은 곳은 더더욱 불교 전래가 뒤처졌다. 이러한 아키다현에 손꼽히는 3중목탑이 있어 이채를 띤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목탑이 들어선 곳이 절이 아니고 신사(神社)다. 아키다현(秋田縣)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이 삼중탑은 히요시하치만진자(日吉八幡神社) 안에 세워져 있는데 이 이름 또한 특이하다. ▲ 아키다현 히요시하치만신사(日吉八幡神社)에 있는 삼중탑 일본에는 히요시신사(日吉神社)와 하치만신사(八幡神社)가 원래 각각의 독립된 신사다 그런데 유독 이곳만은 이 두 신사가 하나가 돼 있으며, 게다가 신사에 삼중탑이 들어 선 것도 특이한 일이다. 이곳 신사에 불교를 상징하는 삼중탑이 들어 선 것은 1707년인데 지금으로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지난 주 속풀이에서는 묵계월이 소리를 배우기 위해 주수봉(朱壽奉)에게 찾아갔고, 2년 후에, 주 명창은 남다른 소질을 보이는 그녀를 최정식(崔貞植)에게 보냈다는 이야기, 최정식은 금강산타령, 풍등가 등을 작사, 작곡한 당대 속요(俗謠)계를 주름잡던 거성이었다는 이야기, 소질이 있고 재주가 있는 제자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폐습이 잔존해 있는 것이 이 바닥의 일반적인 생리이거늘, 자기가 아끼는 제자를 큰 선생에게 보내주는 주수봉이라는 명창의 넓은 마음이나 결단도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최정식의 스승은 아호가 학강(鶴崗)인 최경식 명창이었는데 당대 대명창으로 그에게 배우지 않은 사범급 명창이 없을 정도였으며 제자들에게 결코 월사금을 받지 않은 사범으로 유명했다는 이야기, 학강의 제자로는 최정식, 유개동, 박인섭, 김태봉, 김순태, 정득만, 이창배 등이 있지만, 선생 앞에 오랫동안 소리를 배워서 선생의 뒤를 이은 명창이 바로 벽파 이창배 사범이라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그러므로 주수봉을 통해 묵계월이 만나게 된 최정식은 당대 최고의 학강 선생의 제자였고, 학강은 그 윗대의 장계춘, 그리고 그 윗대의 추교신으로 이어진 경기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일본말에 시니세(老鋪)라는 말이 있다. 노포라고 한자로 쓰는 이 말은 말 그대로 오래된 점포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단순히 오래되었다는 뜻만을 지닌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한국말로 옮기기가 쉽지 않다. 일본국어사전 풀이를 보면 선조 대대로 가업을 지키며 이어 가는 것 이라고 되어 있으니 전통을 이어가는 가게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 시니세의 하나인 오뎅집으로 유명한 다까키야(高木屋) 이러한 시니세는 578년 창업한 회사로 기네스북에 오른 일본 유수의 건축회사인 금강조(金剛組)를 비롯하여 된장류를 만드는 670년 된 마루야핫쵸된장식품(まるや八丁味), 가마쿠라 말기인 1333년에 창업한 전통과자점 구로다센넨도(田千年堂)가 있다. 전통과자나 빵집으로 치자면 시니세(老鋪)가 가장 많은 분야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1000년 가까운 전통 가게가 일본 전국적으로 즐비하다. 또한 국수를 만드는 미와소멘야마모토 (三輪そうめん山本)도 1717년에 창업을 했으니 올해로 297년째이고, 술 만드는 가게 역시 겐비슈조(菱酒造,1505년 창업)처럼 500년 이상 된 가게가 수두룩하다. 또 시니세로 빼 놓을 수 없는 곳이 차를 생산하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지난주 속풀이에서는 1910~20년대에는 《증보신구잡가(增補新舊雜歌)》를 비롯하여 《고금잡가편(古今雜歌編)》 등 많은 종류의 노래 사설 모음집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 내용은 가곡이나 가사, 시조와 같은 노래뿐 아니라 오늘날 민속음악으로 분류되고 있는 각 지방의 소리들, 예를 들면 초한가(楚漢歌)를 비롯한 서도지방의 소리, 육자배기를 비롯한 남도의 소리, 그리고 서울이나 경기지방의 긴 좌창, 앞산타령이나 뒷산타령과 같은 선소리, 그 외의 일반 민요, 단가(短歌)나 회심곡, 병창 등 성악의 전 장르를 망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러한 노래들이 하나의 노래책 속에 들어 있기에 책 이름도여러 노래의 모음집이란 뜻의 잡가(雜歌)로 명명한 것이라는 이야기, 절대 노래 자체가 잡스럽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란 점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명칭은 경기소리꾼들이 자신들의 소리를 스스로 낮추어 부른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이창배의 《한국가창대계》에서도 12잡가, 휘몰이잡가, 입창이나 송서, 각 지방의 민요 등으로 구분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또 경기잡가뿐 아니라 기악의 산조음악도 한때는 헛튼가락,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일본 사이타마현에는 움직이는 지장보살 신앙(마와리지조우, まわり地藏)이 남아 있는데 이는 지장보살상을 보관함(子)에 담아 집집으로 옮겨 모시는 신앙이다. 올해로 261년째인 이 풍습은 사이타마현 하뉴시 혼가와마타(埼玉 羽生市)에서 지금도 지켜지고 있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관동지방을 흐르는 큰 강인 도네강(利根川)이 흐르는 지역이다 보니 잦은 홍수 피해가 있던 곳이다. 치수시설이 여의치 않던 시절 홍수가 나면 강 인근 주민들은 큰 피해를 입게 되는데 이러다 보니 자연재해를 막아주길 바라는 민간신앙이 성행 할 수밖에 없었다. ▲ 이동용 지장보살상(왼쪽), 마을 주민이 지장보살상을 지고 다른 집으로 모셔가는 모습 오지조사마(지장보살님)라 부르는 이 불상은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보관함에 담아 집에서 집으로 옮겨 모시고 있는데 이를 처음 만든 것은 천초종원사(淺草宗円寺)의 한 스님이 이 지역에 오고나서부터다. 쇼아쇼닌 (松阿上人)이라 불리는 이 스님은 이 마을에 와서 마을사람들이 늘 불안하게 사는 것을 보고 300여 집을 찾아다니며 시주금을 모아 지장보살상을 만들게 된다. 노송나무로 불상을 만든 스님은 불상을 담을 함을 만들어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2014년 봄, 이은관 명창에 이이 경기민요의 예능보유자 묵계월 명창도 떠났다. 그는 이 시대 가장 널리 알려진 여류 경기명창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94살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서울의 12좌창(坐唱)으로 예능보유자가 되었는데, 그가 즐겨 부른 좌창을 잡가(雜歌), 또는 긴잡가라 부르고 있으며 이러한 노래들을 좌창(坐唱)이라고 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 연창하는 형태가 단정하게 앉아 조용하게 부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점을 이야기했다. 양반들이 부르던 노래를 정가(正歌)라고 통칭하는데 반해, 일반 대중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는 민속가(民俗歌), 또는 속가(俗歌)라고 불렀고 이러한 민속가를 통칭 잡가(雜歌)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는데, 잡(雜)이란 의미는 원래 순수한 것이 아닌, 뭔가 뒤섞여 있는 것, 장황하고 번거롭다는 뜻인데 노래분위기와 맞지 않는다 점, 특히 1910년대 이후 쏟아져 나온 각종 노래 사설집의 이름을 잡가집이라 한 것은 각 지방의 민요나 특징있는 노래들을 망라해서 싣고 있다는 의미, 그래서 잡가의 잡은 여러 장르의 노래들이 섞여있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