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귀신도 떡 하나로 쫓는다. / 귀신 떡 먹듯 한다. / 귀신에게 비는 데는 시루떡이 제일이다. / 아닌 밤중에 웬 찰시루떡이냐? / 귀신은 떡으로 사귀고 사람은 정으로 사귄다. / 떡 본 귀신이다. /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 / 떡이 있어야 굿도 한다." 우리 겨레는 이렇게 유난히 떡과 관련한 속담이 많습니다. 이틀 뒤면 우리 겨레의 가장 큰 명절 한가위입니다. 우리 겨레는 설이나 한가위 같은 명절은 물론이고 혼인이나 아기의 돌잔치 때에도 떡을 해먹었지요. 그런가하면 제사 때도 떡이 쓰였으니 떡과의 인연이 참으로 깊습니다. 그 가운데 송편은 대표적인 한가위 음식입니다. 그래서 조선 후기인 1849년에 펴낸 《동국세시기》에 한가위 때면 햇벼로 만든 햅쌀 송편을 먹는다고 했고, 1925년에 펴낸 《해동죽지》에도 한가위에 햅쌀로 송편을 빚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가위와 송편의 관련 기록은 주로 근대 문헌에 보일 뿐입니다. 예전의 문헌 기록들을 보면 계절에 관계없이 특별한 날이면 빚어 먹던 겨레의 으뜸 떡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19세기 초반의 문집인 《추재집》에는 정월 대보름에 송편을 놓고 차례를 지낸다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사흘 뒤면 우리 겨레의 가장 큰 명절 한가위입니다. 그 한가위 큰 명절의 각종 세시풍속 가운데는 '거북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거북놀이는 수수 잎을 따 거북이 등판처럼 엮어 등에 메고, 엉금엉금 기어 거북이 흉내를 내는 놀이입니다. 이 거북이를 앞세우고 “동해 용왕의 아드님 거북이 행차시오!”라고 소리치며, 풍물패가 집집을 방문하지요. 대문을 들어서면서 문굿으로 시작하여 마당, 조왕(부엌), 장독대, 곳간, 마구간, 뒷간 그리고 마지막에는 대들보 밑에서 성주풀이를 합니다. 조왕에 가면 “빈 솥에다 맹물 붓고 불만 때도 밥이 가득, 밥이 가득!” 마구간에 가면 “새끼를 낳으면 열에 열 마리가 쑥쑥 빠지네!” 하면서 비나리를 하지요. 이렇게 집집이 돌 때 주인은 곡식이나 돈을 형편껏, 성의껏 내놓는데이것을 공동기금으로 잘 두었다가 마을의 큰일에 씁니다. 이와 같이 거북이놀이와 성주풀이는 풍물굿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세시풍속의 하나입니다. 또 재미있는 놀이로 전남 진도의 “밭고랑기기”가 있지요. “밭고랑기기”는 한가위 전날 저녁에 아이들이 밭에 가서 발가벗고, 자기 나이대로 밭고랑을 깁니다. 이때에 음식을 마련해서 밭둑에 놓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꼬리가 긴 남은 더위도 차츰 물러가고 산양에는 제법 추색(秋色, 가을빛)이 깃들고 높아진 하늘은 한없이 푸르기만 하다. 농가 초가집 지붕 위에는 빨간 고추가 군데군데 널려 있어 추색을 더욱 짙게 해주고 있는가 하면 볏논에서는 어느새 ‘훠이 훠이’ 새를 날리는 소리가 한창이다.” 위는 “秋色은 「고추」빛과 더불어 「白露」를 맞으니 殘暑도 멀어가”란 제목의 동아일보 1959년 9월 8일 치 기사 일부입니다. 오늘은 24절기의 열다섯째 <백로(白露)>인데 백로 즈음의 풍경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백로는 “흰이슬”이란 뜻으로 이때쯤 밤에 기온이 이슬점 이하로 내려가 풀잎이나 물체에 이슬이 맺힌다는 뜻이지요. 백로부터는 그야말로 가을 기운이 물씬 묻어나는 때입니다. 이때쯤 보내는 옛 편지 첫머리를 보면 “포도순절(葡萄旬節)에 기체만강하시고…….” 하는 구절을 잘 썼는데, 포도가 익어 수확하는 백로에서 한가위까지를 <포도순절>이라 하지요. 또 부모에게 배은망덕한 행위를 했을 때 <포도지정(葡萄之情)>을 잊었다고 하는데 이 “포도의 정”이란 어릴 때 어머니가 포도를 한 알, 한 알 입에 넣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벚꽃의 명소로 도쿄 한 복판에 자리한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 이하 ‘야스쿠니’)는 일본 군국주의 상징의 현충시설이다. 이곳에서는 A급 전범(戰犯)뿐 아니라 우익의 원조이자 정한론자(征韓論者)인 요시다쇼인과 이토히로부미를 신으로 모시고 있으며 1910년 9월 15일 한국인에게 치욕스런 한국병합 봉고제(奉告祭)를 올린 곳이다. 야스쿠니에는 일제침략기 징용으로 전쟁터에 강제로 끌려 나가 숨진 한국인 21,000여명과 대만인 등이 합사(合祀)되어 있어 한국을 비롯한 전쟁 피해 당사국으로부터 끊임없는 문제제기를 받고 있는 영령 추도시설이기도 하다. 야스쿠니는 총면적 93,356㎡(28,289평)로 일본에 있는 수많은 신사(神社)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며 1869년 도쿄초혼사(東京招魂社)로 시작하여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라는 이름으로 바꾼 것은 1879년이다. 이곳에서는 에도막부 말기(1853)부터 명치유신(1868)을 거쳐, 러일전쟁,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 일본이 저지른 국내외 전쟁에서 숨진 군인, 군속 등 전사자의 영령을 제사한다. 야스쿠니에는 태평양전쟁 사망자 213만 3,915명, 중일전쟁 19만 1,250명, 러일전쟁 8만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경복궁 지경다지기>에 관한 간단한 소개를 하였다. 경복궁(景福宮)은 서울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 이름이고, 지경다지기란 집을 지을 때, 집터를 단단하게 다지는 것을 말함이고,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을 지을 당시의 지경다지기 재현 과정은, 궁터 고르기, 동아줄 디리기, 초 지경다지기, 마당놀이, 자진 지경다지기Ⅰ, Ⅱ(이엿차), 뒷놀음 등으로 짜여져 있다는 점, 궁터를 고르는 가래질소리는 모갑이의 ‘오험차 다루세’로 시작되는 메기고 받는 형식의 노작요이고, 제2과장 지경줄 디리기는‘디리세, 디리세, 지경줄을 디리세.’를 후렴귀로 하는 소리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번주에는 <경복궁 지경다지기>의 3과장인 지경다지는 과정을 소개를 해 보도록 한다. 이 과정은 기수(旗手)를 제외한 전원이, 큰 돌에 지경 줄을 묶어놓고 원으로 둘러선 다음, 하나의 지경 줄에 여러 명이 줄을 잡는다. 그리고는 줄을 당겨 큰 돌을 동시에 들었다, 놓았다 하며 지경을 다져나가는 과정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모갑이(우두머리 선소리꾼)의 메기는 소리에 전원이 장단과 호흡을 맞추어 가며 뒷소리를 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차별과 빈곤에 맞서온 인권 변호사 우츠노미야 겐지(宇都宮健兒, 73살) 씨는 요즘 한국 언론에 자주 등장한다. “인권을 침해당한 사람의 피해회복이 문제의 핵심인데 당사자 없이 국가 간에 전부 결정을 내려 버렸습니다. 일본이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진지하게 반성하며 행동으로 나타내는 일이 필요하고 그것을 정부와 국민이 함께 해야합니다.” 후덕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인상의 우츠노미야 겐지 변호사(전 일본변호사연합회 회장)는 지난 8월 24일 YTN과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베정권이 우리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 판결에 반발해 수출규제와 백색 국가 제외 조치를 단행한 이후 이른바 양심적인 일본의 지식인 들은 우츠노미야 겐지 변호사처럼 저마다 ‘아베정권의 철딱서니 없는 처사’에 강한 불만과 질책을 쏟아내고 있다. 에히메현(愛媛県)의 남서부에 있는 세이요시(西予市)에서 태어난 우츠노미야 겐지 변호사는 1946년생으로 그가 태어난 시기는 패전으로 일본 전역이 폐허 더미였을 시기였다. 그가 태어난 고향 아케하마쵸(明浜町)는 반농반어(半農半漁) 지역으로 그는 9살 되던 해에 가족과 함께 오이타현(大分県)으로 이사했다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박상옥명창이 불러준 장기타령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는 현재 서울시 무형문화재 휘모리잡가의 예능보유자로 어려서부터 지역의 농요라든가, 상여소리, 일반 민요창 등을 동네 어른들로부터 자연스럽게 배운 바탕위에 벽파 이창배 스승으로부터 다양한 경기소리를 배워 남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는 소리꾼이라는 이야기, 그가 불러주는 소리 속에는 힘이나 음색, 강약의 조절이 자연스럽기에 그렇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번 주에는 그가 특별히 관심을 갖고 있는 <경복궁 지경다지기>에 관한 곧 여기에 들어있는 소리와 춤, 놀이 등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기로 한다. <경복궁 지경다지기>라는 말에서 경복궁(景福宮)은 서울 종로구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의 이름이고, 지경다지기란 집을 지을 때, 집터를 단단하게 다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경복궁 지경다지기> 소리란 경복궁을 지을 때, 땅을 다지며 부르던 노래와 동작이나 춤 등을 가리키는것이다. 이것을 보존하고 있는 박상옥 명창은 제자들과 함께 고민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바로 경복궁 지경다지기 소리나 춤, 놀이 과정 등을 재현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제강점기 친일단체 가운데 ‘조선신궁봉찬회(朝鮮神宮奉贊會)’라는 것이 있다. 이 단체는 도쿄에 메이지신궁(明治神宮) 건립계획(1915)이 확정되면서 건축비 모금을 위해서 일본에 명치신궁봉찬회가 결성되자 조선지부로 1933년에 설립되었다. 이 보다 앞서 《순종실록부록》 8권, 순종 10년 1월 10일(1917) 기록에는 “양궁(兩宮)에서 명치신궁(明治神宮)의 봉찬회(奉贊會)에 일금 1만 2,000원을 기부하였다.(창덕궁(昌德宮) 7,000원, 덕수궁(德壽宮) 3,000원, 왕세자 2,000원이다.)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메이지신궁 건립에 조선의 돈이 일찍부터 흘러들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궁봉찬(神宮奉贊)은 메이지신궁이 완성된 이래 곧 100년을 앞둔 지금도 유효하여 메이지신궁 누리집에는 “메이지신궁은 1921년 메이지왕과 부인소헌왕후를 모시는 사당으로 이제 곧 100년을 맞이합니다. 많은 봉찬(기부)을 바랍니다.”라고 써 놓았다. 기부금을 모으는 목적은 메이지신궁진좌100주년기념사업자금(明治神宮鎮座百年祭記念事業資金)이라고만 써 놓았을 뿐 구체적인 사업 내용은 밝혀 놓고 있지 않다. 금액은 불문하며 5천 엔(우리돈 5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뒷산타령과 그 뒤로 이어지는 자진산타령 이야기였는데, 앞산타령이 길게 뻗는 비교적 곧은 소리라면 뒷산타령은 다양한 시김새를 구사해서 맛깔스럽게 부르는 노래로 슬픈 느낌과 염불조의 느낌이 있다는 점, 뒷산타령의 도입부를 독창자가 낮은 음으로 내면, 제창자들은 7도 위로 받는 점이 특이하다는 점, 뒷산타령도 <메기고 받는 형식>인데, 받는 후렴구는 서로 다르다는 점을 얘기했다. 또 잦은산타령은 만(慢)-중(中)-삭(數) 중에서 삭에 해당되는 노래라는 뜻, 사설 내용도 다양한 편이어서 명산의 경개와 함께 춘향가나 심청가, 공명가나 초한가에 나오는 가사의 일부를 인용하여 쓰고 있다는 점, 산타령은 정가(正歌)나 무악(巫樂), 잡가(雜歌)나 민요가락과도 또 다른 독창적인 창법으로 대중들이 즐기는 소리란 점, 특히, 높고 시원한 목청과 다양한 발림, 그리고 장단형으로 대중을 동화(同和)시켜 온 대중의 독특한 소리란 점을 이야기 하였다. 이번 주에는 지난번에 무계원 특별 공연에 초대되어 박상옥 명창이 불러준 장기타령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간다. 그는 현재 서울시 무형문화재 휘모리잡가의 예능보유자로 동 종목의 전승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패전 뒤 일본에는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가 12만 명에 달했다고 현대비지니스 신문은 지난 8월 13일자 기사에서 밝혔다. 이 가운데 부모를 잃고 길거리에서 부랑아로 떠돈 어린이는 35,000명으로 추정된다고 《아사히연감(朝日年鑑, 1947년)》을 인용하여 보도했다. 이 신문은 한 부랑아의 말을 빌려 “일본의 종전기념일(終戦記念日)은 1945년 8월 15일이다. 하지만 부랑아들에게는 그날이 전쟁의 시작이었다. 살아남기 위한 전쟁 말이다.”고 했다. 부랑아 대부분은 전쟁이 한창이던 1945년 겨울부터 여름에 걸쳐 생겼는데 도쿄, 센다이, 오사카, 아이치, 후쿠오카 등 미군의 공습으로 부모를 잃게 되어 생겼다고 했다. 특히 1945년 3월 10일, 도쿄대공습 때 도쿄가 불바다로 변했으나 아직 날씨가 쌀쌀하여 한기를 피하고자 수많은 부랑아들이 도쿄 우에노역 지하도로 몰려들었다고 했다. 지금도 우에노역에는 노숙자들이 몰려있지만 당시에 이곳에는 7,000명 정도가 지내고 있었다고한다. 부랑아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우에노역에는 너무나 사람이 많아 눕지도 못하고 대소변도 그 비좁은 공간에서 해결해야했다고 하니 패전 후 일본 도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