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일취스님(철학박사)] 죽음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누구나 맞이하게 되는 보편적 경험이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는 말처럼, 태어난 모든 존재는 언젠가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은 오래전부터 인류에게 두려움과 의문의 대상이었지만, 동시에 삶의 의미를 성찰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느 사회이든 장례 방식과 죽음에 대한 인식, 곧 생사관에는 고유한 역사와 종교, 철학, 그리고 생활 문화가 스며 있다.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문제는 곧 삶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와 직결되어 있다. 동양권에서는 죽음을 또 다른 여정으로 받아들이는 시각이 강하다. 한국, 중국, 일본 등지에서는 조상을 모시는 제사와 장례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죽음은 단절이 아닌 조상 세계로 편입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는 제의(祭儀)와 의식을 통해 이어지고, 죽음은 곧 가족과 공동체의 기억 속에 살아남는 또 하나의 삶이다. 인도나 부탄과 같이 불교나 힌두교가 뿌리 깊은 사회에서는 윤회와 해탈 사상이 생사관의 중심을 이룬다. 장례는 단순히 육신과의 이별이 아니라 다음 생으로의 이행을 돕는 종교적 의식으로 자리한다. 불전 독송, 탑
[우리문화신문=일취스님(철학박사)] 평화(平和)란 무엇일까?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극히 어려운 단어는 아니다. 사전에는 평화를 일러 “평온하고 화목함.”, “전쟁, 분쟁 또는 일체의 갈등이 없이 평온한 상태”라고 정의하고 있다. 한편, 평화란, 어떤 존재든 마땅히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극히 신성하고 인류사회에 필요불가결(必要不可缺)한 지향점이며, 목적이라고 말들을 한다. 그렇지만 평화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평화는 진정 누가 만드는가?’라는 물음에는 모두 얼버무리고 만다. 그러면서도 인간들은 평화란 의미를 맑은 생수와 같고, 청정한 공기와 같은 것이며 푸른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새들의 모습에서, 넓은 들판에서 자유롭게 풀을 뜯는 동물들을 비추어 보면서 마냥 평화를 동경하고 있다. 이렇게 인간들은 평화를 끊임없이 갈망(渴望)하고 살고는 있지만 사실 진정 평화롭다고 확신하지 못하고 불안한 평화 속에 살고들 있다. “평화”를 다시 한번 정리해 보면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 국가와 국가,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상태를 뜻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두 가지 축인 「평화의 근본이념(철학적ㆍ윤리적 기반)」과 「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60여 년 전 보릿고개 때 이야기다. 덜 영근 보리를 베어 밥 지어 먹는 것만이라도 행복이었고, 좁은 방 한 칸 이불 하나에 온 가족이 함께 발 뻗고 자면서도 누워 잘 집이라도 있다는데 행복해했다. 그러나 지금은 50평이 넘는 호화 저택에 살면서도 행복 타령을 하고 있다.” 이는 일취스님이 학자원을 통해 펴낸 책 《연꽃 속에 진주를 줍다》 가운데 <동화 속에 잠든 행복>이란 소제목에 나오는 눈에 띄는 구절이다. 그런데 이 구절이 나오기에 앞서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뜻을 따라간다. 사람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뜻은 오직 한 가지다. 오늘보다 더욱 나은 내일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참는 것이 제일이고, 뜻을 이루고자 할 때는 먼저 욕심을 절제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라는 《법구경》 구절을 보여준다. 스님은 180일 이렇게 하루하루를 살며 법구경 한 대목을 읊은 뒤 인간사를 더듬으며, 담담하게 속삭인다. 스님은 그동안 <우리문화신문>에 ‘산사에서 띄우는 편지’를 연재했었고, 최근엔 ‘청정하고 행복한 나라 부탄을 가다’라는 제목의
[우리문화신문=일취스님(철학박사)] 새벽 세 시, 부탄에 도착한 다음 날이었다. 피곤에 지쳐 단잠에 빠져 있어야 할 몸은 오히려 이른 시간에 눈을 떴다. 창문을 여니, 싸늘하면서도 맑은 공기가 온몸을 감싸왔다. 순간, 몇 시간 전까지 쌓였던 피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몸은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이 낯선 나라가 지닌 청정한 공기의 힘을 그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부탄에는 굴뚝이 없다. 공장을 세워 산업을 키우는 대신, 오염원을 아예 차단해 버렸다. 담배마저도 공기를 더럽힐 수 있다는 까닭으로 금지해 버린 나라. 청정 자연은 이 나라가 지켜온 ‘삶의 조건’이자 ‘국가의 철학’이다. 그러나 부탄에서 느낀 신선한 숨결을 떠올릴수록, 역설적으로 병들어가는 지구의 현실이 더 뚜렷하게 다가온다. 북극의 빙하는 녹고, 바다 수위는 높아지고 있다. 기온은 산업화 이후 1.2도나 올랐고, 2도 선을 넘는 순간 식량 위기와 생태계 붕괴가 된다고 환경학자들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폭염ㆍ산불ㆍ홍수ㆍ가뭄이 전 세계를 덮치고, 해마다 수많은 목숨이 자연재해라는 이름 아래 스러져 간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천재지변’이 아니다. 결국 인간이 스스로 불러온 ‘자업자득’의 결과다. 세
[우리문화신문=일취스님(철학박사)] 3월 21일 아침 9시, 랑중 수도원 게스트하우스 문을 나서자 차가운 고산의 공기가 뺨을 스쳤다. 오늘의 여정은 동부 부탄 트라시강(Tashigang)주, 해발 약 3,500m의 매락(Meak) 마을로 트라시강 중심 도시에서 산길로만 7~8시간을 달려야 닿을 수 있는 두메다. 인근의 사크텡(Sakteng)과 함께 브록파(Brokpa) 문화권을 형성한 곳으로, 고지대 사람들의 숨결이 여전히 살아 있는 마을이다. 사방은 히말라야의 탁 트인 초원과 침엽수림, 그리고 설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매락으로 향하는 길은 한마디로 ‘험난’했다. 안개가 시야를 가리고, 구불구불한 산길은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폭이었다. 원래 이 길은 마을을 잇는 좁은 오솔길에 불과했지만, 2012년이 되어서야 차량 통행이 가능하도록 넓혀졌다. 그전까지 매락은 ‘특별 허가’를 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는 제한 구역이었다. 전기와 휴대전화 신호가 닿기 시작한 지도 불과 몇 해 전이고, 초등교육 시설 역시 이제 막 뿌리를 내리는 중이다. 그럼에도 부탄은 전통과 생태를 해치지 않으려 ‘필요 이상의 개발’을 하지 않는다. 덕분에 매락은 천 년 넘게 이어온 자연과 생
[우리문화신문=일취스님(철학박사)] 구속이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어떤 생명이든 억압당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깊은 불행이다. 누구나 자유롭고 걸림 없이 자기 뜻을 펼치며 살기를 바란다. 이는 단지 ‘로망(romance)’을 넘어, 숭고한 생명의 본성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인간에게 자유는 그 무엇보다 절실한 욕망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오히려 같은 인간을 억압하고 핍박하며, 나아가 다른 생명들조차 가볍게 여기고 관리한다는 명목 아래 학대와 살상을 자행하고 있다. 나는 부탄 북부의 붐탕을 향해 험한 산중턱의 좁은 길을 따라 4시간 넘게 차량으로 이동했다. 어느 순간, 시야가 탁 트인 능선에 이르러 잠시 차를 멈추고 풍경을 감상하며 숨을 돌리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덩치 큰 누렁개 한 마리가 다가왔다. 인가 하나 보이지 않는 높은 산악지대, 외진 길에서 마주친 개였다. 처음엔 들개가 아닐까 싶어 움찔했지만, 그 눈빛은 사납기보다 오히려 순하고 애처로웠다. 부탄을 여행하면서 거리 곳곳에서 개들을 자주 보았기에 그리 놀랍진 않았지만, 깊은 산속에서 마주한 이 개에게는 왠지 모를 연민이 들었다. "배가 고파서 그러는구나..."나는 여행 중 준비해 온 말린 바나나 과자 봉지
[우리문화신문=일취스님(철학박사)] 아침 창문을 여니 청량한 아침 공기가 호텔 방안으로 가득 밀려 들어왔다. 잠이 덜 깨 몽롱한 정신이 번쩍 들고 가슴이 확 트이는 기분이었다. 필자는 올 3월 한 달가량 부탄 문화를 취재하면서 팀부에 있는 다니사 호텔이 머물렀다. 말로만 듣던 부탄은 말 그대로 행복한 나라, 조용한 나라, 청정한 나라라는 것을 체감케 했다. 3월 4일 8시에 파로 공항에 내려 대합실로 들어서는 순간,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부탄왕국 국왕 가족 대형 사진이었다. 국왕 부부와 아이들 세 명을 가운데 나란히 앉히고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너무도 정겹게 다가왔다. 처음 설명을 듣기 전에는 누구인지를 몰랐다. 우리나라도 보통 가족끼리 다정하게 찍은 사진을 한 장씩은 벽에 걸어 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라 대통령 가족사진을 걸어 둔 집은 보기 힘들다. 그런데 부탄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공항에서부터 시작하여 팀푸 수도까지 차를 타고 가자니 주요 지역마다 국왕의 사진이 큰 틀에 끼워 정갈하게 걸려 있었다. 그뿐인가, 필자가 투숙한 호텔 로비에도 관공서, 학교, 사원, 할 것 없이 다양한 모습과 크기로 액자 틀에 끼워져 눈길이 잘 가는 곳에 걸려
[우리문화신문=일취스님(철학박사)] 새벽 서쪽 하늘에 유난히도 밝은 별이 있다. 샛별이라고 했다. 고도 3,600m 산 능선에 자리 잡은 사원에 발을 들어 놓자 붉은 가사를 입고 내게로 다가와 생글생글 맞이하는 어린 동자승의 반짝이는 눈빛이 그러했다. 샛별 같았다. 천진무구한 얼굴, 반짝이는 눈 속에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가 버릴 듯한 유혹을 느끼며 나를 반기는 고사리 같은 어린 동자승의 손을 잡았다.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였다. 아직은 엄마 품에서 응석을 부릴 나이인데 어찌하여 이렇게도 깊은 산골에 들어와 불상 앞에 앉아 염불한다는 것인가? 가슴이 아리고 두 눈이 뜨거워졌다. 필자는 올 3월, 한 달가량 단독으로 히말라야 중턱에 있는 부탄에 가서 문화 취재를 하고 돌아왔다. 그 기간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어린 동자승들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부탄 취재차 돌아본 사원마다 많은 아이들이 붉은 가사를 입고 수행하는 모습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하늘을 찌를듯한 거목들이 울창한 숲속, 그리고 보기에도 아슬아슬한 해발 3,600고지 기암절벽에 있는 ‘추푸네 도지파모’ 사원에서 어른 스님들과 함께 수행하고 있는 어린이들의 모습들이 한국에 돌아온
[우리문화신문=일취스님(철학박사)] 사람은 태어남과 동시에 이별은 약속되고, 덧없는 시간 속에 만남과 헤어짐이 무량억겁(無量億劫, 헤아릴 수 없이 긴 시간) 윤회를 반복한다. 만난 자 기필코 떠나보내야 하고, 어느 것 하나 그대로 붙잡아 둘 수 없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혹의 세계에서는 영원한 내 것처럼 한순간도 놓지 않으려고, 떠나보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래 언제까지나 그대로 가지고 갈 것처럼 두 손 불끈 쥐고 있다. 이미 가버린 사람도 그리워한다.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오라고 손짓한다. 그러나 아무리 달래도 갈 사람은 기어코 가고 만다. 가수 이범학은 <이별 아닌 이별>이란 시 속에서 재회를 절절히 그려내고 있다. “…어디서나 행복을 바라는 내 맘은 무너진 내 안의 사랑이 번지면 다시 찾을 꺼야 내사랑 굿바이 굿바이 어디서나 행복을 바라는 내 맘은 사랑한다는 그런 말보다 더 진실함을 이해해 이젠 떠나가는 그대 모습 뒤로 아직도 못다 한 나 만에 얘긴 하지마 다시 언제까지 나만의 미련으로…“ 맹자의 《진심장구(盡心章句)》에는 “往者不追 來者不拒(완자불추 내자줄거)” 곧 가는 사람 붙들지 않고 오는 사람 거절하지 않는다."라는 구절이
[우리문화신문=일취스님(철학박사)]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와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기쁘고 반가우며,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만남 뒤에는 항상 따라다니는 이별을 어쩌란 말인가. 만남은 무엇이고 이별이란 무엇인가.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영원히 내 곁에 있게 할 수는 없다는 말인가. ‘회자정리거자필반(會者定離去者必返)‘란 고사성어가 있다. ‘회자정리’란, 만난 자는 분명코 헤어진다는 말이 되겠다. 그렇지만 만남 뒤에 이별이 올지라도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속담에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보다, 너무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야 하는 절박한 심정에서 그 아픔을 달래기 위해 ‘거자필반’이라 했다. “헤어진 사람은 언제가 반드시 돌아오게 된다.”라는 사자성어가 마음에 간다. 만난 자는 반드시 떠나고, 떠난 자는 반드시 돌아온다고 하였으니, 만남과 헤어짐에 너무 집착하거나 매달리지 말라는 뜻일 게다. 이러한 언어의 중심에는 누구나 태어나면 불가항력적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사후세계에 대한 불안에서 오는 위안과 대책이라 보인다. 여기에 대한 역사적 근거가 있다. 이집트 고대 무덤 곧 4,300년 간 굳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