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개인이 관리하는 송산(松山, 소나무가 많은 산)에서 소나무를 몰래 벌목하는 것은 비록 나라의 봉산(封山)과 다르기는 하지만, 이 뒤로는 각 감영과 각 관아에서 공적으로 쓰는 목재를 비변사(備邊司, 조선 시대의 최고 의결 기구)에 보고하면, 벌목을 허락하는 공문서를 일절 막아서 금지하고, 만일 공적으로 쓸 데가 있으면, 초기(草記, 《승정원일기》 기초자료)를 올리든지 혹은 경연(經筵)의 자리에서 아뢰어 임금이 결재한 다음에 공문서를 발송하게 하라는 뜻으로써 법식을 정하여 시행하도록 하소서.“ 위는 《정조실록》 19권, 정조 9년(1785년) 2월 1일 치 기록으로서 개인이 관리하는 산이라도 소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게 했다는 내용입니다. 경복궁 등 조선시대 궁궐은 모두 소나무로만 지었는데 이는 소나무가 나무결이 곱고 나이테 사이의 폭이 좁으며 강도가 높고, 게다가 잘 뒤틀리지 않는 까닭입니다. 또 벌레가 먹지 않으며, 송진이 있어 습기에도 잘 견뎠기 때문이었다고 하지요. 그뿐만이 아니라 나무의 속 부분이 누런빛을 띠는 소나무는 그때 가장 중요한 수송 수단이던 배를 만드는 조선재와 죽은 사람의 관을 짜는 데 썼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장제급은 금표가 있는 땅에 장사를 지낸 죄가 있고, 백윤진은 점지(點指)해 준 죄가 있다. 범하지 못할 곳인 줄을 알고도 그 땅에 장사 지낸 것은 죽을죄고, 범하지 못할 곳인 줄을 알면서도 장사를 지내라 한 것도 죽을죄다. 똑같은 죽을죄로 이미 결정을 내렸으니, 나라에 법이 있는 바에 어찌 죽음을 면하겠는가? 다만 (가운데 줄임) 그 할아비의 공은 나라에서 잊지 못할 바가 있으니, 특별히 대대로 용서해 준다는 뜻으로 한 가닥 목숨만은 붙여주어 사형에서 감하고 원악도(遠惡島,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살기가 어려운 섬)에 유배토록 하라.” 위는 《순조실록》 32권, 순조 32년(1832년) 11월 24일 기록으로 나라가 소나무를 기르기에 금표를 세운 산에 몰래 장사를 지낸 사람을 멀리 떨어진 섬에 유배토록 한다는 기록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경복궁 등 궁궐을 모두 소나무로만 지었음은 물론 소나무는 임금의 관을 짜는 데도 쓰고, 당시에 가장 중요한 수송수단인 배 만들 때도 쓴 귀한 나무였습니다. 특히 나무의 속 부분이 누런빛을 띠는 소나무를 '황장목(黃腸木)'이라 부르고 으뜸으로 쳤습니다. 또 나라에서는 '황장금표(黃腸禁標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황장목이 얼마나 중요한 물건인데 전 목사 김경항은 목재상과 결탁, 제멋대로 나무를 베도록 허락하면서 전혀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 죄를 논하자면 실로 극히 놀라운데 어찌 도배(徒配, 감옥에서 강제 노동을 하게 한 다음 유배를 보내는 형벌)에 그치겠습니까." 이는 《현종실록》 3권, 현종 1년(1660년) 11월 1일 기록으로 전 목사 김경항이 목재상과 결탁하여 황장목을 베도록 한 것에 대해 사헌부가 아뢴 내용입니다. 또 《세종실록》 3년(1421) 8월 24일 기록에 보면 왜구들이 배를 만들기 위한 소나무를 구하려고 조선 바닷가를 자주 침범한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조선시대에는 경복궁 등 궁궐을 모두 소나무로만 지었음은 물론 소나무는 임금의 관을 짜는 데도 쓰고, 당시에 가장 중요한 수송수단인 배 만들 때도 쓴 귀한 나무였습니다. 특히 나무의 속 부분이 누런빛을 띠는 소나무를 '황장목(黃腸木)'이라 부르고 으뜸으로 쳤습니다. 또 나라에서는 '황장금표(黃腸禁標)' 등의 표식을 세워 보호하고 길렀으며, 이를 어긴 사람들에게는 엄한 벌을 내리곤 했습니다. 그렇게 소나무를 귀하게 여긴 까닭은 나무결이 곱고 나이테 사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