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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민족

[백년편지] 국립중앙박물관을 찾는 이에게 -이광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저는 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자주 갑니다. 전시실 중앙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문화재가 있습니다. 긴 중앙홀 안쪽 끝에 우뚝 서 있는 국보 86호 경천사지 10층 석탑(고려 1348, 높이 13.5m). 아름답고 독특한 석탑을 볼 때마다 저는 벽안의 이방인 호머 헐버트(18631949)가 떠오릅니다. 

헐버트는 미국인입니다. 지금(2015)으로부터 약 130년 전인 1886, 23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 땅을 밟은 선교사였지요. 그런데 한국에서 그의 삶은 선교사 그 이상이었습니다. 고종 황제의 외교 고문으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분이었기 때문이지요.  

   
▲ 경천사지 10층 석탑
어느 순간 헐버트를 조금씩 조금씩 알게 되었지만, 그에게 푹 빠지게 된 것은 아마도 경천사지 10층 석탑에 얽힌 사연을 알게 되면서부터일 겁니다. 이 탑은 원래 경기도 개풍군(현재 북한 개성시) 부소산의 경천사에 있었습니다. 고려의 수도 개성을 대표하는 멋진 탑이었지요. 그 이국적인 풍모 덕분에 이 탑은 당시 개성의 명물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1907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터졌습니다. 당시 한국을 방문한 일본의 대신 다나카 미쓰야키(田中光顯)고종 황제가 경천사 탑을 하사했다는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사람들을 속인 뒤 이 탑을 일본 도쿄(東京) 자신의 집으로 밀반출했습니다. 천인공노할 만행이었지요. 천만다행으로 한국과 일본 안팎에서 비난 여론에 직면했고 결국 1918년 이 탑은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경천사지 10층 석탑이 이 땅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헐버트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이었답니다. 그는 1907년 일본의 영자신문 <Japan Mail><Japan Chronicle>에 약탈 사실을 알려 반환 여론을 이끌어 냈지요. 저는 그래서 이 탑을 볼 때마다 헐버트가 떠오릅니다.  

헐버트는 처음에 왕립 영어학교인 육영공원 교사로 일했습니다. 동시에 교육분야 총책임자 및 외교자문관으로 고종을 보좌했지요. 이 무렵 그는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士民必知)를 만들어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선비나 일반 백성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알아야할 기본 지식을 담았는데, 외국의 이야기도 담겨 있다는 점에서 당시로서는 매우 신선한 책이었답니다. 헐버트는 또 우리의 <아리랑> 노래에 최초로 서양식 음계를 붙이는 등 한국의 교육문화를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어디 이뿐인가요? 1905년 을사늑약 후, 고종의 밀서를 들고 미국으로 건너가 조선의 독립을 호소했습니다. 미국 국무장관과 대통령 면담에는 실패했지만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전 세계에 알렸던 것이지요. 1907년엔 고종에게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담 특사 파견을 건의했습니다. 그는 이준(李儁) 이상설(李相卨) 이위종(李瑋鍾)과 함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했지요.  

하지만 이 탓에 1910년 일제에 의해 미국으로 강제추방을 당했습니다. 헐버트는 또 고종이 해외 은행에 맡겼다가 일본에 빼앗긴 거액의 내탕금(內帑金, 황실 재산)을 되찾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어요. 여든이 넘은 1948년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내탕금을 찾아달라고 호소했을 정도였으니, 헐버트의 한국 사랑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 호머 헐버트(1863∼1949)

조선의 독립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이방인 헐버트.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있습니다. 그의 죽음에 관한 일입니다. 1949년 그는 대한민국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서울을 다시 찾았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좋아했던 나라, 독립을 갈망했던 조용한 아침의 나라 한국. 그 나라를 다시 찾았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당시 그에게 AP통신 기자가 감회를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헐버트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고 대답했다고 하지요.  

, 그런데 그 말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한국 땅을 밟은 지 일주일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었어요. 헐버트는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역에 묻혔습니다. 운명이란 이런 건가요. 헐버트는 끝내 한국 땅에 묻힌 겁니다. 그의 묘비엔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땅에 묻히길 원하노라.’는 그의 말과 생몰일시를 새겨 넣었습니다. 정말로 한국을 사랑했던 미국인입니다. 

헌데, 1998년까지 그의 묘비 앞면 한가운데 묘비명 자리는 비어있었습니다. 1949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묘비명 이름을 쓴다고 약속해놓고 지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그에게 우리는 묘비명 이름 하나 붙여주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죄송하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이 묘비명을 썼습니다. ‘헐버트 박사의 묘’. 이 일곱 글자를 써넣는데 50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지요. 우리의 무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되돌아보게 합니다. 헐버트에게 참으로 죄송합니다. 

우리는 헐버트에게 여러모로 빚을 졌습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이따금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갑니다. 비어있던 묘비명 자리에 글씨가 꽉 차고 나니 빚진 마음을 조금은 덜어낸 것 같아 참 다행입니다.  

다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멋진 탑, 경천사지 10층 석탑을 만납니다. 탑을 올려다보고 있노라면 헐버트의 인자한 얼굴이 떠오릅니다. 한국을 사랑했던 헐버트의 마음이 탑의 한 층 한 층에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분, 헐버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광 표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과정,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과 박사과정 졸업

동아일보 문화재 기자를 거쳐 현재 정책사회부장

저서 <한국의 국보> <한국미를 만나는 법>

      <명품의 탄생-한국의 컬렉션 한국의 컬렉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