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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학자 양종승의 <명인⦁명무 열전>

최승희 예술혼을 불살랐던 춤꾼

한순옥(韓順玉, 1932-2022)의 춤과 삶 (Ⅱ)
민속학자 양종승의 <명인⦁명무 열전> 2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민속학자]  한순옥은 부산의 춤 생활을 접고 상경한 뒤 서울 성북구 삼선교에 70여 평의 큰 공간을 마련하여 다시 한순옥무용연구소 문을 열었다. 이화여대 등 여러 대학 무용과 진학을 꿈꾸는 입시생들을 대상으로 각 분야 전담 지도자를 초빙하여 한국무용을 비롯한 현대무용, 창작무용 그리고 발레까지 가르쳤다. 이 무렵, 한순옥은 국립무용단 창립 단원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실력을 인정받아 지도위원으로도 활약하였다.

 

그러면서 한순옥은 전국 어느 곳에서나 스승 최승희 춤에 대한 행사가 있게 되면 서슴지 않고 달려갔다. 1990년대 후반에는 부산지역에서 세기의 무용가 최승희 춤 예술의 부활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산 무용가 양학련 등이 주축이 된 추진위원회에서는 최승희 춤 계보를 잇고 있는 김백봉과 한순옥 두 명무를 앞세워 최승희 춤 조명에 나선 것이다. 최승희 춤의 재조명 프로젝트는 20세기를 갈무리하고 새로운 천년의 시대를 맞이하는 한국무용계에 잠재적 포부의 폭발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무용학자 정병호(1927-2011)는 이 사업을 의미 있다고 강조하면서 “예술적 정신을 되살려 세계인의 공감을 끌어냈던 최승희 춤은 1990년대를 마감하는 한국 창작춤의 시대적 대안”이라고 역설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최승희 춤 예술을 조명하는 추진위원회 요구로 한순옥은 최승희 춤에 대한 특강을 열고, 연수회 개최를 통해 검무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부산창작무용연구회가 주최하는 최승희–한순옥의 보살춤, 초립동, 장고춤 등의 공연도 열었다. 이처럼 한순옥은 스승 최승희 예술을 펼쳐 보이는 행사라면 적극 참여하였다.

 

 

한편, 최승희 제자로 남한에서 활동하거나 소개된 사람으로는 김민자, 이석예, 김미화, 장추화, 김백봉, 한순옥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참조 《인물로 본 한국용사》 1992년 124쪽). 그러나 한순옥이 기억한 남한의 최승희 제자로는 자신을 비롯한 김백봉(1927-2023), 전황(1927-2015), 임종옥(김백봉보다 1살 위, 무용 활동 안 함), 최경애(일찍 죽음) 등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순옥은 자신이 스승의 춤을 널리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최승희 예술을 어루만질 기회가 있으면 어디든지 서슴지 않고 달려가곤 하였다.

 

무용가 한순옥은 검무의 대명사다. 한순옥은 자신의 춤 세계에서 가장 우선시되는 것이 검무고 또한 자신이 가장 아꼈던 춤이기도 하였다. 예술적 법도를 기반 삼아 섬세한 칼사위로 풀어내는 한순옥의 검무는 해로운 액을 물리치는 종교신앙의 의례춤이었다. 19세기 말, 전문예인의 사당춤으로 그리고 교방 기녀의 법무로 거듭났으며,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무대 미학의 예술춤으로 부활한 것이다.

 

이 무렵, 평양의 최승희무용연구소가 한순옥의 예술 세계를 조성해 주면서 그에게 검무의 독창성을 안겨준 것이다. 그때부터 한순옥의 검무는 그가 가는 곳이면 어김없이 공연되고 또한 학습되어 졌다. 그러면서 검무는 최승희-한순옥의 예술적 정서와 의미를 각인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게 된 것이다.

 

삼회장 노랑 저고리와 홍치마에 남색 쾌자를 입고 허리에는 제비 홍띠를 두른 뒤 머리에 전립을 쓰고 펼쳐내는 검무 춤사위를 통해 한순옥의 예술을 가늠하기도 하였다. 양손에 쥔 칼로 쌍칼 춤새를 펼쳐 극도의 예술적 기량을 펼치곤 하였다. 좋지 못한 해로운 악을 물리려는 것이나 쇳소리로 영의 세계와 소통을 도모하려는 신앙적 믿음을 갈구하려는 것이나 한순옥은 검무 춤사위를 통해 자신의 예술세계를 느높이곤 하였다.

 

 

 

그러면서 예술과 의례, 흥과 멋을 넘나들며 우리의 심금을 울려 온 것이다. 그러므로 검무가 예술적 정서를 다스리며 전통춤의 백미라고 일컫는 승무와 함께 법무(法舞)로 명명된 것은 곧 한순옥의 검무를 보고 생겨난 말이 아닌가 싶을 정도가 된 것이다. 한순옥 검무의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다수가 줄을 맞추어 상대를 이루며 추는 무리춤의 검무가 아니라 홀 춤의 검무로 미의 값어치를 돋군다는 것이다.

 

한순옥은 검무에서만 능한 것이 아니다. 무당춤에서도 춤 재능을 극대화하였다. 1995년 12월 9일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회장 신영균)가 한순옥에게 수여한 예술문화대상에서는 그녀를 무당춤의 일인자라고 이름하였다. 보살춤 또한 한순옥의 춤 예술이 농염함으로 무르익었음을 알리게 한 작품으로 기사화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한순옥의 유작은 검무를 비롯한 무당춤, 보살춤(관세음보살춤), 즉흥무, 부채춤, 여심, 장고춤, 초립동, 등(燈)춤 등이 있다.

 

그리고 한순옥이 국립무용단 공연에서 출연한 작품으로는 심청전, 춘향전, 원효대사, 논개, 시집가는 날, 야월삼경, 황진이, 요신, 왕자호동, 원효대사, 매향, 일심, 여자의 일생 등이다. 이것들은 오롯이 평양의 최승희무용연구소에서 배웠던 조선무용(한국무용)를 비롯한 발레, 모던발레, 인도무용, 현대무용, 소셜댄싱(사회적으로 함께 즐기는 춤), 리듬 등을 근간으로 일구어진것이다. 이것이 한순옥 시대에 이르러 그의 춤 예술로 귀결되었다. 한순옥 예술적 업적은 1973년 정부가 그에게 국민훈장 목련장을 서훈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한순옥의 춤과 삶의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연인 문제를 비롯한 돈, 외모, 배역 등에서 늘 질투의 대상이 되곤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저런 일들로 구설에 오르기도 하였다. 훗날 그 모든 구설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한순옥의 정결함 밑바탕에는 평생 간직하였던 최승희 춤에 대한 자긍심 그 자체였다. 2007년 12월 한순옥을 대담하여 경향신문 <춤과 그들–한순옥>에 대한 글을 쓴 유인화 기자는 한순옥을 만나기 위해 한 달을 기다렸다고 한다. 

 

당시 75살의 한순옥은 옛 모습 그대로 날씬했고, 손톱에는 연한 은색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었다. 기자가 그를 만나는 순간 그가 국립무용단의 ‘효리’였다는 것이다. 기자가 ‘올드 효리’를 만나기 위해 한 달을 기다린 것이다. 그리고 기자는 한순옥을 최승희의 수제자로 소개한 뒤, 최승희 제자라는 이유로 견디기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지만, 스승의 예술 세계를 동경하며 또한 그것을 짊어지고 가고자 했던 주어진 사명을 갖고 억제와 절제로 예술의 삶을 살아왔음을 얘기하였다.

 

이렇듯, 남한에서의 한순옥 춤 인생은 스승으로 인해 웃고 울었던 한 많은 삶으로 일관되었다. 2018년 필자와의 대화에서도 스승 최승희를 상기할 때면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을 보이곤 하였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삶의 여정이 무형적 서사로 엮여 나갔다.

 

한순옥은 큰 무대가 아니면 나서질 않았다. 외국 사절단이 내한하면 문화공보부에서  유명 무용가를 섭외하여 공연을 펼쳤는데 그때마다 한순옥은 국위선양을 표방하는 예술행사의 여부를 따졌고, 파격적인 대우를 받아야만 참여하였다. 한순옥은 예술가로서 자존심을 대단히 중시하였기에 큰 무대가 아니면 나서질 않았고 그에 상응하는 예우가 아니면 반응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자존심에 죽고 살았던 무용가 한순옥이었다.

 

최승희에게 배운 대로 그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최승희 춤을 계승하며 버티고 살았다. 그래서 한순옥은 늘 최승희 춤 정신을 이어가겠노라고 혼자 다짐하곤 하였다. 일본을 드나들며 돈벌이 춤도 추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한순옥은 후학 지도에서도 대단한 열정을 가졌다. 선화예술학교에서 13 동안이나 검무를 가르쳤던 것도 그의 예술적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20세기 중반 이후, 세계의 눈길은 무형유산에 집중하여 새로운 문화적 패러다임을 세우고 있다. 삶의 지혜, 예술적 사상과 철학이 담긴 각 민족의 예술이 인류 문화의 핵심이며 정수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춤은 긴 시간의 역사 속에서 민족 고귀의 행위예술로 삶을 윤택하게 부추겨 왔다. 그리고 춤은 민족예술의 결정체고 국가문화브랜드로써 주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기나긴 흐름 속에서 일생의 여정을 장식한 한순옥의 춤 유산과 그 속에 담긴 삶에 대한 담론은 한국 무용사 기록에서 당연히 반겨야 할 것이고 또한 의미 있게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손만 들어도 춤이요 몸만 굴려도 예술이라는 말이 어색함이 없는 최승희 제자 한순옥, 그는 자신이 평생 가졌던 스승 최승희의 춤 정신으로 우리의 심금을 울렸던 무용가다. 그래서 한순옥은 삶의 윤택함을 앞당기기 위한 예술적 창조 정신을 바탕삼아 자유와 번영을 부르짖었고, 울분과 비운을 노래하는 춤새를 펼쳤다. 춤으로 회한을 풀고 시대적 아픔을 어루만지려는 험난한 예술 생애의 고뇌를 미적 값어치에 얹기도 하였다. 갇히고 묻혔던 한순옥의 춤새를 내적 기운으로부터 끌어 올려 오늘을 사는 우리 앞에서 열린 춤으로 다듬어 낼 필요가 있다. 이것이 한순옥 춤 세계를 만날 수 있는 자세이다.

 

민족상잔의 아픔 속에서도 평양의 최승희 춤을 안고 남하하여 남북의 이념적 대립과 갈등속에서 한 없이 걸어야만 했던 한순옥 춤 길은 평탄치 않았다 최승희 춤을 지켜내야 한다는 강박감 속에서의 사명감으로 평생토록 숨을 죽이며 자신의 위치를 조심스레 지켰던 무용가 한순옥, 그러면서 비중 있는 무용교육자로서 그리고 무대예술가로서 주어진 소임을 해냈다. 이제 숭고한 무용가 한순옥 춤 유산은 그가 아끼고 신망했던 제자 양승미가 주도하는 한순옥류검무보존회를 통해 이어간다. 글을 마감하며, 한순옥 선생이 필자에게 남겨준 춤 자료 일체는 <아르코예술기록원>에 기증하였다.

 

《한순옥 韓順玉, 여, 1932-2022》

◇ 주요 약력

1932년 평양 출생

1944년 평양 경림초등학교 졸업

1947년 평양 제일여자중학교 졸업

1947년 최승희무용연구소 입소

1948년 평양 정희여자고등학교 입학

1949년 최승희무용연구소 지방 공연 <해방의 노래> 출연

1950년 한국동란으로 최승희무용연구소 퇴소1951년 마산 김해랑무용연구소 강사1952년 제1회 한순옥무용발표회1955년 부산 한순옥무용연구소 개설

1955년 제1회 하기 무용강습회(부산)1956년 부산 화교중학교 및 혜화여중 강사1959년 프랑스 국제민속예술제 참가

1960년 프랑스 파리 국제민속예술제 참석

1962년 국제민속예술제 52개국 순회공연1962년 서울 한순옥무용연구소 개설1962년 한국무용협회 이사1966년 예그린악단 한국무용 주임교수1970년 국립무용단 단원 및 지도위원1976년 선화예술학교 무용강사 (13년간)1988년 한국무용협회 부이사장

2006년 한국무용협회 고문

2020년 한국전통춤협회 고문

 

◇ 상벌

1973년 국민훈장 목련장

1992년 춤의해 감사패

1993년 예총 예술문화공로상

1993년 한국무용협회 무용대상

1995년 예총 예술문화대상

2020년 한국전통춤협회 대한민국전통춤대상

 

◇ 유작

검무, 무당춤, 즉흥무, 부채춤, 여심, 보살춤(관세음보살), 장고춤, 초립동, 등춤

 

◇ 한순옥류검무보존회

대표 : 양승미

주소 : 서울시 중구 다산로 32 남산타운스포츠상가 2층 전통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