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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소에는 고려정(高麗町)이란 글자가 넘쳐났다

고려산 아래 다카쿠신사 (高來神社) 2-2

[그린경제=이윤옥 기자] 다카쿠신사가 들어선 뒷산 이름은 고려산(高麗山)이다. 명치 정부가 아무리 신사이름을 바꾸어도 산 이름은 바꾸지 못했나보다. 이 고려산은 현재 고려산 현민의 숲(高麗山県民)”으로 지정되어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산이며 그 역사는 깊다 

   
▲ 고려산에서만 자란다는 꽃들, 아마도 한반도에서 건너온 한국 토종꽃이 아닐는지.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가시꽈리, 산골무꽃, 큰 갈고리풀, 엉겅퀴모양의 다무라꽃

이 산은 가나가와현에서 관리하며 천연기념물 등 많은 자생식물이 자라고 있다. 고려산의 역사에 대해서는 나카지마(中島浩)46쪽에 달하는 고려산 생태보고서에 보고서 자세히 나와 있다. 나카지마 같은 사람이 이럴 때는 한 없이 고맙다. 우리보다도 더 자세한 수많은 문헌을 뒤적여 고려산과 고려신사의 유래와 생태학적인 연구까지 해놓았으니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오이소쵸(大磯町) 동사무소는 누리집에 한글판을 따로 둘 정도로 고려산의 생태환경에 대해 관심이 많다. 여기에는 고려산에서 밖에 볼 수 없다는 진귀한 꽃을 많이 소개하고 있다. 이곳에는 다무라꽃이라고 부르는 엉겅퀴모양의 꽃이 있는데 이에 대한 설명이 눈길을 끈다.  

쇼난평야(다카쿠신사가 들어 서 있는 평야)의 고려산을 향한 산길에서 발견된다(湘南平から高麗山かう山道沿いでつかる)”라든가 가시꽈리의 경우 오이소에서는 고려산에서 밖에 발견되지 않는다.(大磯町では高麗山でしかつかっていない)”는 식의 설명이 붙어 있는데다가 피는 꽃들이 고려산을 향해 있다는 표현이 재미나다. 이웃 나라 땅에 뿌리내리면서 얼마나 그리웠으면 초목조차 고국의 산을 향해 피어날까?” 

   
▲ 동해도 53 명소 중 고려산 그림(왼쪽), 이 그림을 그린 화가 안도 씨를 기념하는 우표

고려산은 가나가와 경승(景勝) 50곳에 속할 만큼 산을 둘러싼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하루 일을 마치고 고려산 너머로 저녁해가 뉘엿뉘엿 질 때면 사당에 모셔진 신들도 모두 잠들고 고려산 위로 보름달이 덩그마니 떠오른다. 이때 어디선가 아름다운 선율의 고구려 악기 호로생 소리가 은은히 들려온다. ! 달빛에 젖은 아름다운 고국 고구려여! 어머니여


오이소 땅의 수호신이 되어 자손을 번성시키겠다
 

다카쿠신사 주변에는 고려라는 문패가 많이 눈에 띈다. 사이타마현에도 가나가와현에도 고구려의 흔적이 지천이다. 그렇다면 고구려 후예들은 언제 가나가와현 오이소에 정착한 것일까?  

무사시국(武蔵国)은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치면 고마신사(高麗神社)가 있는 사이타마현(埼玉県)과 도쿄도(東京都), 다카쿠신사(高來神社, 명치 이전에는 高麗神社)가 있는 가나가와현(神奈川県) 일대를 아우르는 곳으로 일본의 수도 도쿄를 중심으로 한 중심지역이다. 이러한 관동일대를 아우르는 무사시국에 한반도계 도래인은 얼마나 모여 살았던 것일까? 

속일본기에는 716 스루가노쿠니(현 시즈오카), 가이노쿠니(현 야마나시), 사가미노쿠니(현 가나가와), 가즈사노쿠니, 시모우사노쿠니(현 지바) 히타치노쿠니(현 이바라키), 시모쓰케노쿠니(현 도치기)에 흩어져 있던 고구려민 1,799명을 무사시국에 이주시켜 개척하게 하였으며 고마군을 설치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속일본기는 계속해서 너희는 나의 말을 잘 들어라. 나는 일본 사람이 아니니라, 위험한 나라를 피해 건너와 일본 땅에 정착한 자이다. 이러한 나에게 귀의하는 자는 오이소(大磯) 땅의 수호신이 되어 자손을 번성시키겠다.”라는 노래 가사가 전해진다. 

아무리 자신이 잘난 사람이라도 객지에 나와서 나를 따르라.”라고 할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따를 사람 또한 없다. 그런데도 고구려 왕 약광은 자신이 일본인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자신을 믿고 따르면 자손만대를 번영케 한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것이 구전으로 구전으로 노래가 되어 관동 일대를 풍미했다고 속일본기는 가사까지 적어서 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 하나가 있는데 속일본기위험한 나라를 피해 와서 일본에 마음을 두고(邪険れて大日本心掛)”라는 구절이다. 보통 상식으로는 위험한 나라 곧 바람 앞에 선 위태한 모국을 버리고 피해왔다는 자체가 비난을 받을 일이다. 죽어도 함께 살고 살아도 함께 사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온 사람들의 정서에 위반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을 뒤집으면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 이미 기울어져서 어찌해볼 수 없는 나라의 운명 앞에서 나오는 마지막 대책은 왕자의 피신인 것이다. 사극 같은 데서 종종 왕실이 위태롭거나 황태자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을 때 즉각 피신시키듯이 말이다. 이는 종묘사직을 다른 곳에서라도 가서 지키게 하기 위한 종족보존의 수단으로 선택의 여부가 없는 방법이다. 기울어가는 조국 고구려 왕실에서는 젊은 왕자 약광을 일본으로 보내면서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 무사시국은 관동 지방을 아우르는 드넓은 평야로 사진은 도코로자와 평야이다.

다행히 일본은 나라의 운명을 쥐고 건너온 약광 일행을 위해 새로운 건설의 땅을 내주었다. 비록 개간하고 개척해야 할 황무지였지만 황족들을 딸려 보내 함께 개간을 도왔고 이주민들을 위한 행정적인 지원도 마다치 않았다. 이는 예를 볼 수 없는 파격적인 대우로 21세기에도 숱한 망명자들이 나오고 있지만 이들을 위해 천막은 쳐 줄지언정 하나의 도시를 만들어 주거나 망명자 집단의 수장을 시장으로 세우는 일이 없음을 볼 때 당시 일본 조정의 환대는 지극한 것이었다. 

약광 왕 일족은 일본 땅에 와서 이미 기반을 잡고 있던 사람들과 거대한 토호세력이 되어간다. 서기 716년이면 아직 헤이안 천도 이전으로 이때 왕권을 잡고 있던 왕은 독신녀 원정왕(재위 715~724)이다. 일본의 5번째 여왕인 원정왕은 모녀가 나란히 왕권을 잡은 주인공으로도 유명한데 마음씨도 착했던지 관동지방 무사시노에 고려군을 설치하고 고구려인 1,799명을 옮겨 살게 하는데 적극성을 띤다  
 

50대 간무왕, 아들을 관동지방으로 파견 

이후 간무천황기에 이르면 친왕임국(親王任国)이라하여 친왕 곧 황족을 국사(国司)로 파견하게 되며 이들이 태수(太守)자리를 지켰다. 특히 처음으로 발령한 3명의 태수는 간무천황의 열 번째 아들 가야신노우(賀陽親王, 常陸太守)를 비롯하여 나카노신노우(仲野親王. 上総太守), 가도이신노우(葛井親王, 上野太守)로 자신의 아들을 과감히 관동지방으로 파견하기에 이른다.  

간무천황은 일본의 50대 천황으로 교토시대를 활짝 연 교토의 신으로 받들어지는 왕인데 어머니가 백제여인 고야신립(高野新笠)으로 우리에게는 잘 알려진 인물이다. 왜 간무천황은 자신의 아들을 직접 관동지방 개척에 투입시킨 것일까? 고구려와의 인연은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무사시국은 예전부터 준마의 산지였다. 무사시국의 너른 평야는 대규모 준마 목장이 있었으며 이들 말은 군사용으로 쓰였다. 이러한 말을 관리하는 사람 중에서 크고 작은 무사단(武士団)이 생겨났다고 일본 사서들은 전한다.  

고구려도 말을 부리는 민족이었다. 특히 고구려의 철갑기마부대는 그 규모가 몇 만에 달할 정도의 큰 부대였으며 드넓은 만주 벌판을 휘어잡았을 정도다. 고구려가 얼마나 말과 친한 민족이었는지는 고분 벽화에도 잘 남아 있다.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현(集安縣)에 전하는 5~6세기의 고구려 고분에는 말을 타고 사냥하는 수렵도(狩獵圖)가 그려져 있다. 특히 무용총(舞踊塚)에 있는 고분벽화에서는 수풀이 우거진 곳에서 4명의 말을 탄 무인이 활을 쏘며 사냥을 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을 만큼 말에 대해서라면 고구려인을 따라 잡을 자가 없다. 

서기 716년 무사시국 벌판에 고구려인의 집단 이주가 있었고 이후 간무천황이 아들을 직접 태수로 파견한 것이 826년의 일이므로 100여 년간의 시차가 있다. 이 기간에 고구려왕 약광 일족은 무사시노를 개척하고 싸움용 준마를 길러 후에 간무 천황의 아들들이 태수로 부임 할 무렵에는 훌륭한 준마들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이 일대는 신흥 무사그룹이 생겨나는데 작가 이와이(岩井國臣)씨는 그의 누리집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오이소(大磯)는 조선반도로부터 온 도래인들이 상륙한 지점으로 그들의 활동 무대는 다마천의 고마에지역(多摩川狛江)과 이리마의 고려향(入間川高麗郡)까지 뻗쳐있다. 도래인들은 관동평야 개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야마토조정(大和朝廷)은 황족 일족을 파견하여 적극적으로 이들을 도왔으며 그것은 무사의 발생과 깊은 관련이 있다. 도래인의 활약을 언급지 않고 관동의 역사는 기술할 수 없다. 오이소(大磯)의 다카쿠신사와 사이타마의 고마신사 그리고 하코네의 하코네신사는 모두 연관이 있으며 이는 다시 이즈신사와 연결되고 더 나아가서는 가마쿠라막부 성립과도 연결고리를 갖는다. 오이소를 빼고 관동무사(板東武士)를 논할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오이소는 일본 무가사회의 원류이다.”  

관동에 터를 잡은 고구려인들이 사무라이 정권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했다니 가슴이 뿌듯했다. 이 글을 읽고 우리는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떠한 역사학자의 글보다 오이소(大磯)의 역사를 정확히 짚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와이씨의 글이 역사서에 바탕을 둔 정확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오이소에 대해 이렇게 솔직한 역사를 밝혀주는 일본인이 있는가 하면 하코네의 신관같이 극구 숨기는 일본인도 있다. 이와이씨 지적처럼 오이소 지방의 고구려인 활약상을 빼고는 관동을 말하지 말라는 말은 우리가 오이소의 다카쿠신사를 찾을 때까지 귓전을 맴돌았다.  

신주쿠에서 무려 2시간 걸려 찾아간 오이소에서 우리는 고려정(高麗町)”이라는 단어와 마주쳤다. 주택가 문패에도 마을 입구에도 안내판에도 길거리 전신주에도 온통 高麗町이란 글씨에 마치 고구려 마을에 온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지금은 땅이름도 조차도 고려사촌(高麗寺村)에서 오이소(大磯)로 바뀌었을 뿐 아니라 신사이름도 고려신사(高麗神社)에서 다카쿠신사(高來神社)로 바뀌어 버렸지만 역사의 큰 물줄기는 바꿀 수 없는 듯 다카쿠신사 주변에는 여전히 高麗라는 선명한 글자가 우리 일행을 반가이 맞아주었다.

   
▲ 다카쿠신사 근처에는 곳곳에 “고려(高麗)”라는 글씨가 눈에 띈다. 문패와 나란히 붙여진 주소(위), 고려자치회의 안내문(가운데), 토지 분양 안내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