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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민족

<백년편지 167> 1일송(一松) 김동삼 선생님 !

대한독립운동총사편찬위원회 김병기 위원장 편지

[그린경제 = 이나미 기자]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일송(一松) 김동삼 선생님 !

  작년 약전 집필을 위해 선생님의 일생 행적을 더듬으며 다시 선생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우리 민족운동사, 특히 만주지역 무장투쟁사를 빛낸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 분이십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듣고 자랐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만주 3부(참의부·정의부·신민부) 통합운동에서 뜻을 함께 했던 희산 김승학이 바로 저의 증조부가 되시는 때문이지요.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턱을 괴고 골똘히 들었던 기억이 새삼스럽습니다. 할아버지는 선생님을 ‘남만(南滿)의 맹호(猛虎)’라고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마음속에 품었던 것은 그 때부터였습니다.

  선생님의 민족운동 족적은 1907년 협동학교 설립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신민회를 비롯하여 대한협회 안동지회, 대동청년단 등의 구국활동은 구국교육운동을 거쳐 무장투쟁론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일송 감동삼 선생

                                                               
  일송 선생님 ! 1910년 망국에 이르자 선생님께서는 젊은 제자 20여 명을 이끌고 앞장서서 만주로 망명하셨습니다. 선생님이 꿈꾸었던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실현하기 위한 독립군 양성을 위한 첫걸음이었지요.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후에는 졸업생을 이끌고 백두산 깊은 골짜기에 독립군 비밀군영인 ‘백서농장’도 손수 마련하셨습니다. 장주(庄主)라는 직책은 농장주가 아니라, 곧 독립군 군영의 최고 지휘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일제에 대항하여 무장 항쟁을 추구하려는 선생님의 의지가 여기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습니다.

  일송 선생님 ! 선생님은 항상 통합운동의 어려운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념을 달리하고, 방략을 달리하는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그들을 하나로 묶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셨습니다. 1919년「대한독립선언서」대표자의 한 분으로,1922년 남만지역 통합운동의 결실인 대한통의부 총장으로,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의장으로 추대되면서 선생님께서는 한국 독립운동계 최고지도자로서 열과 성을 다하셨습니다. 우리 독립운동계에는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념·방략이나 지방색을 넘어 어느 쪽으로부터도 비난받지 않았던 분이 바로 일송 선생님이셨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일송 선생님 ! 선생님은 이처럼 독립운동 이외에는 한눈도 팔지 않는 비범한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정의 가장이나 부모로서, 아내와 가족을 위해 한 일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30여 년의 기나 긴 만주생활 가운데 집을 찾은 것은 단지 세 번 뿐이라 합니다. 그마저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이른 새벽에 바람같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독립운동자 가족에게 흔히 치러지는 체념적 운명이라고는 하지만, 선생님의 가족들은 모든 것을 숙명으로 알고 그저 어른의 길을 따랐을 뿐입니다.   

   김동삼 선생의 생가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279)

  일송 선생님 ! 독립운동자들에게 가족은 무엇인가요? 독립운동가의 아내로서 그들이 꿈꾸는 것은 여느 사람들처럼 편안히는 살지 못하더라도 잠시나마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나 단란한 가정생활은 고사하고 항상 위험과 가난이 그림자처럼 따랐습니다. 독립운동의 뒷바라지와 집안일을 해 가며 아이들을 키우고, 가장 없는 집안의 농사일까지 해야 했습니다. 체포되어 감옥에 가면 옥바라지도 해야 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고향에서는 큰 기와집에서 하인을 부리며 잘 살았지만, 만주 땅에 망명해 와서는 산비탈에 지은 토굴같은 집에 살았습니다. 농사를 망치는 해는 망명할 때 가지고 온 옷감을 팔아 좁쌀을 사다 죽을 쑤어 먹었다고 합니다.

  일송 선생님 ! 선생님의 가족사는 곧 여느 독립운동가 집안의 가족사와 다르지 않습니다. 선생님의 가족들도 뿔뿔이 흩어졌다가 나라를 떠난지 77년 만의 조국으로 귀환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처지의 이상룡 선생의 손부 허은 여사의 회고록에 공감합니다.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은 ‘남의 종가 자손들이 좋은 집 두고 뭣 때문에 타국에 가 고생하며 그 좋은 재산 다 털어 먹었는가’라고 눈에 보이게 힐책했다 … 그때 친일한 사람들의 후손들은 호의호식하며 좋은 학교에서 최신식 공부도 많이 했더라. 그들은 일본·미국 등에서 외국유학도 하는 특권을 많이 누리고, 그러니 그들은 훌륭하게 성공할 수밖에. 그러나 우리같이 쫓겨 다니며 입에 풀칠이나 하고 위기를 넘긴 사람들은 자손들의 교육 같은 것 생각지도 못했다. 오로지 어른들의 독립투쟁, 그것만이 직접 보고 배운 산교육이었다. 목숨을 내놓고 다녔으니 살아있는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깝다. 애 어른 없이 그 허허벌판 황야에 묻힌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데 … 그저 불모지에 잡초처럼 살았지.”

   일송 선생님 ! 살아남은 자들이 선생님께서 남기고, 부탁하고 가신 가족들을 잘 보살피지 못한 것이 한없이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형형하고 당당한 그 모습이 그립습니다.

 


                   김병기

 

  대한독립운동총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사)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