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白日靑天霹靂聲 푸른하늘 대낮에 벽력소리 진동하니
大州諸子魂膽驚 6대주(大州)의 많은 사람들 가슴이 뛰놀았다
英雄一怒奸雄斃 영웅 한번 성내니 간웅(奸雄)이 거꾸러졌네
獨立三呼祖國生 독립만세 세 번 부르니 우리조국 살았다.
위는 신규식 선생이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보고 지은 시다. 오늘은 105년전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를 깬 일본제국주의의 원흉 이등박문을 처단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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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의사 기념관 안쪽 유리창에서 바라다 보이는 이토히로부미 처단 현장, 열차 앞 부분 바닥에 표시가 되어 있다.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역 구내 |
▲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역에 있는 안중근의사 기념관 전시실 1
▲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역에 있는 안중근의사 기념관 전시실 2
1909년 10월 26일(음력 9월 13일) 9시 이등박문이 탄 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잠시 뒤 그가 열차에서 내려 러시아의 재정대신 꼬꼬흐체프와 함께 러시아 군인들의 경례를 받으며 각국 영사들이 있는 곳을 향하여 천천히 걸어가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안 의사는 권총을 빼들고 이등박문을 향하여 총을 쏘았다. 탕탕탕탕, 모두 4발을 쏘았는데 4발 모두 명중했다.
이어 안 의사는 다시 이등박문의 뒤를 따르는 일본인들을 향하여 총을 쏘아 일본 총영사 천상준언(川上俊彦), 비서관 삼태이랑(森泰二郞), 만주철도 이사 전중청태랑(田中淸太郞) 등을 차례로 거꾸러뜨렸다. 일헌병이 그를 체포하려고 대들자 하늘을 향하여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세 번 외쳤다. 거사 직후 안 의사는 하얼빈 내 일본영사관으로 잡혀갔다가 11월 러시아 헌병대에서 여순(旅順)에 있는 일본 감옥으로 이송되어 심문과 재판을 받게되었다.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의 공판을 받았던 안 의사는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고 3월 26일 순국하였는데 순국 직전에 아우 정근(定根)·공근(恭根)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하였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國權)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을 세우고 업(業)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 내 죽으면 이곳에 뼈를 묻어달라던 하얼빈공원(현 조린공원)에 세워진 안중근의사 글씨의 "청초당" 돌비석
2014년 1월 안 의사를 추모하기 위해 중국정부는 흑룡강성 하얼빈역 구내에 안중근의사기념관을 마련했다. 기념관은 미니 이층으로 되어 있으며 안 의사의 출생부터 성장 그리고 하얼빈에서의 활동 등이 소상하게 전시 되어있다. 전시물은 한국어와 중국어로 적혀 있다.
▲ 거사 직후 일본영사관으로 옮겨져 영사관 건물 앞에서 손발이 묶인채 찍힌 안중근 의사 모습. 오른쪽은 당시 일본영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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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 의사가 잡혀 있던 구일본영사관 자리에는 현재 화원소학교가 들어서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