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
1920년 10월12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숨을 거두신지 보름만에야 처참한 시신으로 돌아오셨던 이화학당. 94년이 지난 오늘 이곳에 동상으로 서 계시는 당신을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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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고 유관순기념관 앞에 세워진 유관순동상 |
얼마 전 고등학교 한국사교과서에서 당신이 사라졌다고 시끌벅적했습니다. 항상 그랬듯이 이는 좌파들의 소행이라는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이를 기화로 역사교과서를 빨리 국정교과서로 만들어야한다는 주장이 날개를 달았지요. 한편 유관순열사는 해방 후 발행된 고교국정교과서 1차(1956년) 2차(1966년) 또 1979년 유신정권때도 전혀 서술이 없었고, 1982년-1996년 발행된 4-6차 교과서에는 각주에 간단히 등장했으며 2002년 7차에서 다시 빠졌는데 웬 좌파매도냐는 반박이 있었습니다. 최근에 학교에서 애국가를 편하게 부르라고 음을 낮췄다가 교육감이 좌파 매국노로 몰렸으나 보수교육감 때 결정했다는 한마디에 잠잠해졌습니다. 보수를 자처하며 애국은 자신들만의 것인 양 조금만 의견이 달라도 앞뒤 안가리고 좌파와 매국노로 모는 세태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당신을 친일파가 발굴하고 영웅화시켰기 때문에 교과서에서 빠졌다는 참으로 황당한 주장까지 있었습니다.
당신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47년 3.1절을 앞두고 당시 경향신문 2월28일자에 ‘순애보’의 작가 박계주 씨가 쓴 ‘순국의 처녀’라는 기사였습니다. 박계주씨는 일제의 대륙침략전쟁에서 무훈을 세운 김석원 부대장을 앞세운 단편소설 ‘유방’등으로 친일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물론 그는 친일 인명사전에 오를 정도의 인물은 아닙니다. 또 맞은편 감방에서 당신의 옥중투쟁을 지켜봤던 이화학당교사 박인덕이 그해 9월1일 유관순열사 기념사업회를 결성합니다. 일제 말 친일을 한 박인덕, 이 또한 화근이 되고 기독교가 선교에 당신을 활용하면서 불필요한 과장도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근거 없이 조작된 영웅이 아닙니다. 너무 어린나이의 활동이었기에 알려진 것은 해방 후이지만 아직 당신의 행적을 증언할 사람도 많았습니다.
3.1만세시위와 5일 학생시위에 참여하다 경무총감부 까지 끌려간 열혈소녀 당신은 휴교령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마을 어른들과 음력3월1일 아우내장터 시위를 계획하고 병천 뿐 아니라 청원 진천 연기 등 수십개 마을의 연락책을 맡아 거사를 성사시켰습니다. 마침내 거사 날 시위 현장에서 19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벌어지고 당신의 부모가 모두 살해당하는 참상을 목격해야 했습니다. 당신은 손병희선생(3년 형)보다 더한 5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자 틈만 나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옥중투쟁을 계속했습니다. 고문과 폭행도 계속되었지만 3.1만세시위 1주년에는 3천 재소자가 함께한 만세시위를 주도하여 결국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보복 폭행을 당합니다. 방광까지 터질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 당신에게 치료도 거부했던 일제, 마지막 면회를 갔던 이화학당교사들은 당신의 살이 썩어가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9월28일, 이 푸르른 가을하늘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으셨습니다. 이틀이나 지나 사망소식을 들은 이화학당 프라이스 교장과 월터 선생이 여러 차례 시신을 내줄 것을 항의했으나 소용이 없자 국제사회에 만행을 알리겠다고 최후통첩 했습니다. 결국 시신상태를 세상에 알리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써준 후 어느 한군데 성한 곳이 없는 당신의 시신은 10월12일에야 학교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간략한 장례와 수레에 실려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히는 순간까지 당신은 일제의 감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태원 공동묘지마저 일제가 군용기지로 쓰면서 시신도 사라져 지금 고향의 매봉산 중턱엔 초혼묘만 있는 것입니다.
영웅이 아닌데 영웅으로 만들었다니! 이 염치없는 후손들은 18세 소녀인 당신이 어떤 투쟁을 더했길 원하는 걸까요? 그래서 이 나라가 영웅대접을 하긴 했나요? 1967년, 고등학생 때였습니다. 학교신문 기자였던 저는 당신의 고향 지령리에 취재를 간적이 있습니다. 허름한 농가에서 당신의 동생 관복할아버지가 마루에 걸터앉아 계시다가 우리를 맞아주셨습니다. 만세시위 현장에서 부모 모두를 잃고 일제관헌이 집조차 불태워버려 재만 남았다는데 어린 두 동생들 걱정에 감옥에서 그리 슬퍼했다던 바로 그 동생이 환갑이 넘은 이 가난한 할아버지시라니...... 울컥 목이 메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생가터와 교회터 등 몇 곳을 묶어 1972년에 사적지로 정하고 이를 관리하며 살라고 뒤늦게 한옥을 지어준 것은 1977년이었습니다. 관복할아버지는 안타깝게도 그해에 돌아가셨으니 그 집에 한번 누워보시지도 못한 것 같습니다.
3.1운동당시에 당신은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이름 없이 민족의 제단에 몸 바친 수많은 넋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며 친일파 발굴 운운하는 사람들은 당시에 그리도 잘 알려진 명망가들의 친일 행위에 뭐라 답하려는지요?‘ 그리고 그 이름 없는 넋들을 아직도 이름 없이 방치하는 우리사회를 부끄러워해야지 오히려 발굴된 민초들을 폄하하는 이 풍조는 또 무엇인가요?
2007년 5월 한국은행에서 고액권발행을 결정하고 화폐인물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당시 국가청소년위원장을 맡고 있던 저는 10만원권과 5만원권 인물 중 한분은 여성이어야 하며, 자라나는 세대에게 애국심이나 공동체 의식이 없다고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귀감이 되게 유관순열사를 채택해주시라고 건의했지만 김구선생과 신사임당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자 우익단체들이 이승만과 박정희로 바꾸라고 한국은행 앞에서 시위를 하더군요. 물론 여러 가지 사정을 내세운 정부요청으로 한국은행은 10만원권 발행을 중지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뉴라이트 역사가들은 점점 보수우파 김구까지 좌파로 밀어내고 있습니다. 통일정부를 주장하며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한 김구는 대한민국 체제에 반대한 사람이라 대한민국 건국공로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빠진 교과서를 보고 좌파 척결하라고 펄펄 뛰던 사람들은 김구를 폄훼하니 박수를 치고 있습니다. 이들이 쓴 교과서는 김구의 항일독립운동을 일본 극우정권 발언처럼 ‘테러 활동’이라 서술했습니다. 친일파 청산은 소련의 지령이고 국사편찬위원장은 교과서집필 지침에 이승만 독재, 5.16쿠데타, 5.18민주화운동, 친일파청산노력 등을 사용 못하게 권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왕을 천황으로 바꾸게 하고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성노예자로 언급한 부분은 삭제, 임시정부요인 사진설명에서 김구 대신 이승만으로 교체하라고 권고합니다.
푸른 하늘과 소나무를 뒤로하고 양손을 벌린 채 성큼성큼 맨발로 걸어 나오시는 당신께 ‘지금 어디로 그리 급히 가시는 건가요?’ 눈으로 물었습니다. 당신을 핑계로 국정교과서로 회귀하자고 주장하고, 한심한 진영논리에 갇혀 눈에 거슬리면 서로 단칼로 베어버리며, 정신대는 일제가 강제동원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참여한 상업적 매춘이고 공창제이며, 일제 강점기는 근대 국민국가를 세울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이 두텁게 축적되는 시기였다고 미화하는데 목숨 바쳐 투쟁하신 당신보기 민망합니다.
해방 후 분단에 의해 남북 모두 권력과 체제유지, 기득권유지만을 위한 잣대로 항일 독립투쟁을 평가하고 왜곡해온 역사는 바로 잡아야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때문에 청산하지 못한 친일의 역사도 바로 잡아야합니다. 멀고 길어도 가야할 길입니다. 이 과정에서 지금처럼 반발하고 궤변이 판을 쳐도 언젠가는 이들 또한 부끄러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당사자로 평가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 국민들 마음속으로 걸어가시는 당신을 저는 지금 보고 있습니다. 유관순 열사여!
최영희 청소년과 함께 꿈꾸는 사)탁틴내일 이사장 前 내일신문 대표이사 前 국가청소년위원장 前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