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언젠가 어느 교수가 내 연구실로 들어서며, “재수 없는 놈은 엎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했다.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으며 받은 아픔을 털어놓겠다는 신호다. 혼자 속으로 ‘엎어지면 제아무리 재수 있는 놈이라도 코가 깨지기 십상이지.’ 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이야기를 들어 주느라 애를 먹었다. 이분은 “재수 없는 놈은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 하는 속담에서 ‘자빠져도’를 ‘엎어져도’로 잘못 알고 쓴 것이다. 어찌 이분뿐이겠는가! 살펴 헤아리지는 않았지만, 요즘 젊은 사람의 열에 예닐곱은 ‘엎어지다’와 ‘자빠지다’를 제대로 가려 쓰지 못하는 듯하다. 제대로 가려 쓰자고 국어사전을 뒤져 보아도 뜻 가림을 올바로 해 놓은 사전이 없다. 우리말을 이처럼 돌보지도 가꾸지도 않은 채로 뒤죽박죽 쓰면서 살아가니까 세끼 밥을 배불리 먹어도 세상은 갈수록 어수선하기만 한 것이 아닐까? ‘엎어지다’는 서 있다가 앞으로 넘어지는 것이고, ‘자빠지다’는 서 있다가 뒤로 넘어지는 것이다. 코가 얼굴 가운데 튀어나와 있으므로 엎어지면 자칫 땅에 부딪혀서 깨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자빠지면 뒤통수가 땅에 부딪혀 깨질지언정 얼굴은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우리 토박이말에는 이치를 밝히고 올바름을 가리는 일에 쓸 낱말이 모자라 그 자리를 거의 한자말로 메워 쓴다. 이런 형편은 우리말이 본디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머리를 써서 이치를 밝히고 올바름을 가리는 일을 맡았던 사람들이 우리말을 팽개치고 한문으로만 그런 일을 했기 때문이다. 마음이 있으면 말은 거기 맞추어 생겨나는 법인데, 그들은 우리말에 도무지 마음을 주지 않았다. 조선 왕조가 무너질 때까지 이천 년 동안 그런 분들은 줄곧 한문으로만 이치를 밝히고 올바름을 가리려 했기에 우리말은 그런 쪽에 움도 틔울 수가 없었다. 안타까운 노릇은 이처럼 애달픈 일을 아직도 우리가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치를 밝히고 올바름을 가리려는 학자들이 여전히 우리말로 그런 일을 하려 들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말이라야 우리 삶의 이치를 밝히고 우리 삶의 올바름을 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다. ‘슬기’와 ‘설미’는 그런 역사의 가시밭을 뚫고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이치를 밝히며 올바름을 가리는 몫을 해 주는 우리 토박이말이다. ‘슬기’는 임진왜란 뒤로 가끔 글말에 적힌 덕분에 무서운 한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쉬다’와 ‘놀다’는 싹터 자라 온 세월이 아득하여 뿌리를 깊이 내렸을 뿐만 아니라 핏줄이 본디 값진 낱말이다. 핏줄이 값지다는 말은 사람과 삶의 깊은 바탕에서 태어났다는 뜻이고, 사람이 목숨을 누리는 뿌리에 ‘놀다’와 ‘쉬다’가 자리 잡고 있다는 뜻이다. 사람의 삶에서 그처럼 깊고 그윽한 자리를 차지한 터라 여간 짓밟히고 버림받아도 뿌리까지 죽어 사라질 수가 없는 낱말인 것이다. ‘쉬다’는 ‘움직이다’와 짝이 되어 되풀이하며 사람의 목숨을 채운다. 엄마 배 안에 있을 때는 ‘쉬다’와 ‘움직이다’를 아주 잦게 되풀이하다가 태어나면 갑자기 되풀이가 늘어진다. 늘어진다 해도 갓난아기는 하루에 여러 차례 되풀이를 거듭한다. 배고프면 깨어나 울면서 움직이다가 젖을 먹이면 자면서 쉬는 되풀이를 하루에도 여러 차례 거듭하다가, 예닐곱 살을 넘어서면 드디어 하루에 한 차례 ‘쉬다’와 ‘움직이다’를 되풀이한다. 되풀이는 해가 뜨고 지는 것에 맞추어 밤이면 쉬다가 낮이면 움직인다. 이처럼 몸 붙여 사는 환경에 맞추어 되풀이하던 ‘쉬다’와 ‘움직이다’가 멈추면 사람의 목숨도 끝난다. ‘쉬다’와 ‘움직이다’는 삶에서 맡은 몫도 서로 짝을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박두진의 이름 높은 노래인 <해>는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이렇게 시작한다. 이 노래가 쓰인 1946년은 빼앗겼던 나라를 되찾은 때인데도,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는 아직 솟지 않았다고 느꼈던가 보다. 그러고 보면 반세기를 훌쩍 넘긴 지금도 남과 북은 갈라져 원수처럼 지내자는 사람들이 많고, 정권에만 눈이 어두운 정치인들은 힘센 미국만 쳐다보며 셈판을 굴리는 판국이니, 우리 겨레에게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는 여전히 솟지 않았다고 해야 옳겠다는 생각이 든다. 해는 솟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온통 ‘해가 뜬다’라고만 한다. 그렇다면 ‘솟다’는 무엇이며, ‘뜨다’는 무엇인가? ‘솟다’는 제힘으로 밑에서 위로 거침없이 밀고 올라오는 것이고, ‘뜨다’는 남의 힘에 얹혀서 아래에서 위로 밀려 올라오고 또 그 힘에 얹혀 높은 곳에 머무는 것이다. 그래서 ‘샘물’도 솟고 ‘불길’도 솟고 ‘해’도 솟는 것이지만, ‘배’는 뜨고 ‘연’은 뜨고 ‘달’은 뜨는 것이다. 샘물이 제힘으로 밀고 올라오고 불길도 제힘으로 밀고 올라오는 것은 알겠고, 배는 물의 힘에 얹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속’과 ‘안’은 본디 아주 다른 낱말이지만, 요즘은 모두가 헷갈려 뒤죽박죽 쓴다. · 속 : ① 거죽이나 껍질로 싸인 물체의 안쪽 부분. ② 일정하게 둘러싸인 것의 안쪽으로 들어간 부분. · 안 : 어떤 물체나 공간의 둘러싸인 가에서 가운데로 향한 쪽, 또는 그런 곳이나 부분. 《표준국어대사전》 국어사전의 풀이만으로는 누가 보아도 무엇이 다른지 가늠하기 어렵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이 밖에도 여러 풀이를 덧붙여 달아 놓았으나, 그것은 모두 위에서 풀이한 본디 뜻에서 번져 나간 것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다. 본디 뜻을 또렷하게 밝혀 놓으면 번지고 퍼져 나간 뜻은 절로 졸가리가 서서 쉽게 알아들을 수가 있다. 그러나 본디 뜻을 흐릿하게 해 놓으니까 그런 여러 풀이가 사람을 더욱 헷갈리게 만드는 것이다. 우선 ‘속’은 ‘겉’과 짝을 이루어 쓰이는 낱말이고, ‘안’은 ‘밖’과 짝을 이루어 쓰이는 낱말이다. “저 사람 겉 다르고 속 다른 데가 있으니 너무 깊이 사귀지 말게.” 하는 말은 ‘겉’과 ‘속’을 아주 잘 짝지어 쓴 보기다. 여기서 ‘겉’은 바깥으로 드러나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행동과 말 따위를 뜻하고, ‘속’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소리’와 ‘이야기’는 본디 서로 얽히지 않고 저마다 또렷한 뜻을 지닌 낱말들이다. “번개 치면 우렛소리 들리게 마련 아닌가?” “밤도 길고 심심한데 옛이야기나 한 자리씩 하면 어때?” 이렇게 쓸 때는 ‘소리’와 ‘이야기’가 서로 얽히거나 헷갈리지 않는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데서는 ‘소리’나 ‘이야기’가 모두 ‘말’과 비슷한 뜻으로 쓰이면서 서로 넘나든다. “누가 그런 소리를 합디까?”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합디까?” 그러나 서로 넘나드는 것이 바르고 마땅할까? ‘소리’와 ‘이야기’는 본디 뜻이 서로 다른 만큼, 넘나들 적에도 뜻의 속살은 서로 다르다. 그 다름이 뚜렷하지 않고 아슬아슬하지만, 아슬아슬한 얽힘을 제대로 가려서 쓸 수 있어야 참으로 우리말을 아는 것이다. 국어사전들은 ‘말’과 비슷한 뜻의 ‘소리’와 ‘이야기’를 어떻게 뜻 가린 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1) · 소리 : 말.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 · 이야기 : ① 지난 일이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남에게 일러 주는 말. ¶내 이야기 들어 보소. ② 어떤 제목을 중심으로 한 이런 말 저런 말. ¶이야기가 오고 가다. 2) · 소리 : 말이나 이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우리나라는 지구라는 이 땅덩이 위에서 물이 가장 좋은 곳이다. 물을 받아 담아 두는 흙과 돌과 바위가 목숨에 좋은 갖가지 원소를 품고서 물을 맑고 깨끗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겨레는 물을 먹고 쓰려고 마련한 자연의 그릇도 여러 가지를 썼다. 그런 그릇 가운데 가장 많이 쓴 것이 ‘샘’과 ‘우물’이다. 그러나 요즘은 샘과 우물이 삶에서 밀려나 자취를 감추려 한다. 삶의 전통을 지키려면 말의 박물관이라도 서둘러 만들어야 할 판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샘’을 “물이 땅에서 솟아 나오는 곳”이라 풀이하고, ‘우물’을 “물을 긷기 위하여 땅을 파서 지하수를 괴게 한 곳”이라 풀이해 놓았다. ‘우물’을 ‘물을 긷기 위하여 괴게 한 것’이라 하면, 먹으려고 긷는지 쓰려고 긷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게다가 ‘지하수’라는 낱말의 뜻을 “빗물이 땅속에 스며들어 흙과 돌과 바위 사이 빈틈을 채우고 있는 물”이라 한다면, “물을 긷기 위하여 땅을 파서 지하수를 괴게 하는 곳”은 ‘우물’이 아니라 ‘둠벙’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둠벙’을 “웅덩이의 충청도 사투리”라 했지만, 둠벙은 삼남 지역에서 입말로 두루 쓰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사람은 불을 찾고 만들어 다스리면서 삶의 길을 가장 크게 뛰어올랐다. 겨울의 추위를 물리치고 밤의 어두움을 몰아내면서 삶은 날로 새로워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날것으로 먹을 수밖에 없던 먹거리를 굽거나 삶아서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도 삶의 길을 뛰어오르는 지렛대의 하나였다. 굽는 것은 먹거리 감을 불에다 바로 익히는 노릇이고, 삶는 것은 먹거리 감을 물에 넣어서 익히는 노릇이다. ‘삶다’는 물에 먹거리 감을 넣고 푹 익히는 것이다. 감자나 고구마, 토란이나 우엉같이 단단한 뿌리 남새(채소)라면 삶아서 먹는 것이 제격이다. 그러나 단단하지 않은 것이라도 날것으로는 먹기 어려운 것들, 일테면 박이나 호박 같은 남새(채소)는 말할 나위도 없고, 무엇보다도 짐승의 고기는 삶아야 제대로 맛을 즐기며 먹을 수가 있다. 삶는 것에 아주 가까운 것으로 ‘데치다’가 있다. 데치는 것은 물에 먹거리 감을 넣고 살짝만 익히는 것이다. 삶아 버리면 너무 흐물흐물해서 먹을 수가 없을 만큼 여리고 부드러운 먹거리 감, 일테면 이른 봄에 나는 나물이나 여린 잎 남새 같은 것들은 데쳐서 먹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삶다’와 ‘데치다’는 먹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사투리’는 ‘대중말’(‘대중’은 “눈대중이 매섭다”, “대중없이 왜 이랬다저랬다 해?”에서처럼 ‘가늠’을 뜻하는 토박이말이다. ‘대중말’과 같은 뜻으로 ‘표준말’을 쓰지만, 그것은 일본에서 온 ‘들온말’이다.)에 맞선다. 대중말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온 국민이 막힘없이 주고받도록 규정에 맞추어 마련해 놓은 말이고, 그런 규정에서 밀려난 우리말은 모두 사투리다. 사투리에는 어느 고장에서만 쓰는 사투리도 있고, 어떤 사람이나 모둠에서만 쓰는 사투리도 있다. ‘토박이말’은 ‘들온말(외래어)’에 맞선다. 들온말은 가까운 중국과 일본과 몽고를 비롯하여 멀리 서양 여러 겨레(민족)에게서 들어왔다. 이렇게 남의 말에서 들어온 것을 뺀 나머지는 모두 토박이말이다. 토박이말은 우리에게서 저절로 싹트고 자라난 우리말의 알짜요 노른자위다. 토박이말에도 대중말과 사투리가 싸잡혀 있고, 사투리에도 토박이말과 들온말이 싸잡혀 있다. 그런데 ‘사투리’와 ‘토박이말’이란 낱말은 우리네 배웠다는 사람들에게서 버림받았다. 그들은 굳이 ‘사투리’를 버리고 ‘방언/지역어’라는 한자말을 쓰고, ‘토박이말’을 버리고 ‘고유어/순수국어’라는 한자말을 쓴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뽑다’는 박힌 것을 잡아당겨서 빼내는 노릇이다. ‘박힌 것’이란 온갖 풀이나 나무나 갖가지 남새(채소), 곡식의 뿌리라든지 짐승이나 사람의 이빨같이 자연히 박힌 것을 비롯해서, 못이나 말뚝같이 사람이 박은 것까지 싸잡아 뜻한다. 게다가 뜻 넓이가 더욱 번져 나가면서 몸에서 피를 뽑듯이 땅속에서 기름도 뽑고 물도 뽑는다. 게다가 거미 꽁무니에서 줄을 뽑고, 사람의 목에서 노래 한 가락을 뽑고,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버릇을 뽑듯이 속에 있는 것을 나오게 한다는 뜻으로도 쓴다. 그뿐 아니라 반장이나 대표를 뽑듯이 골라잡는다는 뜻, 장사에서 밑천을 뽑듯이 거두어들인다는 뜻으로까지 넓혀서 쓴다. ‘뽑다’를 본디 제 뜻, 곧 푸나무와 남새와 곡식같이 땅에서 싹이 나고 자라는 것을 빼낸다는 뜻으로 쓸 적에는 비슷한 낱말이 여럿 있다. ‘캐다’, ‘솎다’, ‘찌다’, ‘매다’가 그런 낱말들이다. ‘캐다’는 쓸모가 있으나 흔하게 널려 있지 않아 찾고 가려서 빼내는 것인데, 맨손이 아니라 칼이나 호미를 비롯한 갖가지 연모의 도움을 받아서 빼내는 노릇을 뜻한다. 봄철이면 뫼나 들에서 아가씨와 아낙들이 나물을 캐고, 사내들도 철 따라 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