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예전 어린아이들이 평상시 입던 한복 가운데 “사규삼(四규衫)”이 있습니다. 사규삼이란 옷자락이 네폭으로 갈라져 있는 데서 나온 이름이라 생각됩니다. 또 사규삼을 “결과복(缺骻服)”이라고도 하는데, 결과복이란 원래 중국에서는 싸움터에서 입는 옷으로 일종의 융복이라 할 수 있지요. 이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남자아이의 예복 비슷한 구실을 하게 된 것입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재(李縡)가 펴낸 관혼상제의 사례(四禮)에 관한 책 《사례편람 四禮便覽》 관례조(冠禮條)에서는 “남색의 명주 옷감으로 빚는다. 옷깃은 여미게 되어 있고, 소매는 둥글며, 갓을 트고 뒤를 쪼개었다. 비단으로 깃과 소매끝 그리고 옷자락 양 갓과 밑 가장자리를 둘렀다. 선비들이 입는 중치막과 비슷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규삼은 원래 왕세자의 예복이었지만, 남자아이가 어른이 되는 이 예식인 관례 때도 입었는데 관례 때 이 사규삼을 입고, 행전을 치고, 태극(彩屐, 색칠한 나막신)을 신고 임하였습니다. 또한, 이 사규삼을 남자아이가 돌 때에도 입었으며, 평상복으로 입을 때에는 머리에 복건이나 갓을 썼습니다. 귀여운 우리 아이의 돌 때 사규삼을 입히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909년 12월 22일 서울 명동성당 앞, 이재명 열사는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추도식에 참석하고 나와 인력거를 타고 가는 매국노 이완용의 어깨를 칼로 찔렀습니다. 그 뒤 도망가는 이완용의 허리 등을 다시 찌릅니다. 그리고 이완용을 완전히 처단하려는 순간 이재명의 호위순사에 의해 넓적다리를 찔려 중상을 입고 현장에서 체포됩니다. 재판정에서 이재명 열사는 일본의 핍박에도 자신은 나라에 바친 몸이므로 변론할 것이 없으나, 연루된 동지들은 죄가 없다는 주장을 의연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경성재판소는 김정익 등 동지들에게 15년에서 5년형을 선고하고, 이재명 열사에게는 사형을 선고했지요. 그러나 열사는 “너희 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은 빼앗지만, 나의 충혼(忠魂)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를 교수형에 처한다면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너희 일본을 망하게 할 것이다”라고 일본인 재판장에게 경고하였습니다. 이재명 열사는 9월 15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으며, 1910년 9월 30일 사형 집행으로 24살 나이로에 순국하였습니다. 이재명 열사는 원래 미국에서 안창호 선생이 창립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의 스물두째이며 명절로 지내기도 했던 ‘동지(冬至)’입니다. 민간에서는 동지를 흔히 ‘아세(亞歲)’ 곧 ‘작은설’이라 하였는데 ‘해’의 부활이라는 큰 뜻을 지니고 있어서 설 다음가는 작은설로 대접하는 것이지요. 이런 생각은 오늘날에도 여전해서 ‘동지첨치(冬至添齒)’ 곧 “동지를 지나야 한 살 더 먹는다.” 또는 “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살 더 먹는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동지는 날씨가 춥고 밤이 길어 호랑이가 교미한다고 하여 ‘호랑이 장가가는 날’이라고도 부릅니다. 동지의 특별한 풍속을 보면 다가오는 새해를 잘 계획하라는 뜻으로 달력을 선물하는데 더위를 잘 견디라는 뜻으로 부채를 선물하는 단오 풍속과 함께 “하선동력(夏扇冬曆)”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동지의 또 다른 풍속에는 며느리들이 시어머니나 시할머니에게 버선을 지어 선물하는 “동지헌말(冬至獻襪)”이란 아름다운 풍속도 있었습니다. 이날 새 버선을 신고 길어지는 해그림자를 밟으면 수명이 길어진다고도 믿었지요. 그런데 이날 가장 보편적으로 지내는 풍속은 팥죽을 쑤어 먹는 일일 것입니다. 특히 지방에 따라서는 동지에 팥죽을 쑤어 솔가지에 적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노 년 - 허홍구 친구가 있으세요? 그럼 됐습니다. “백아(伯牙)는 거문고의 명인이었고 종자기(鍾子期)는 그 백아의 연주를 참으로 좋아했다. 백아가 거문고를 탈 때 높은 산에 있는 듯하면 종자기는 “훌륭하다. 우뚝 솟은 태산 같구나.”라고 했고, 연주가 흐르는 물을 표현하면 종자기는 “멋있다. 마치 넘칠 듯이 흘러가는 강과 같군.”이라고 했다. 그렇게 백아와 종자기는 마음으로 통하는 사이였다. 그런데 종자기가 죽자 백아가 더는 세상에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 곧 지음(知音)이 없다고 말하며 거문고 줄을 끊고 죽을 때까지 연주하지 않았다.“ 이는 중국 도가 경전의 하나인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종자기가 죽은 뒤 백아가 거문고를 부수고 줄을 끊은 데서 ‘백아절현(伯牙絶絃)’이라 하여 ‘진정한 우정’을 말하는 고사성어가 됐다. 그리고 여기에서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막역한 벗’을 뜻하는 ‘지음(知音)’이란 말도 생겼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19라는 돌림병으로 참으로 어려운 지경을 맞이하고 있다. 질병관리청이 “거리는 멀어져도 마음은 가까이”라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로 사람 만나는 것을 삼가라고 한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예로부터 우리나라 참된 문장은 오직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이 세 편뿐” 이는 서포 김만중이 자신의 책 《서포만필》에서 송강 정철을 평한 이야기입니다. 484년 전인 1536년 오늘(12월 18일)은 송강 정철(鄭澈, 1536~1594)이 태어난 날이지요. 정철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많은 한글 가사 작품을 남겼는데 이 작품들을 모아 엮은 책이 《송강가사》입니다. 임금(선조)에 대한 충정을 여인의 심경으로 표현한 <사미인곡>, <속미인곡>, 백성들을 계몽하고 교화하기 위해 지은 <훈민가> 등이 《송강가사》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정철은 그 마음이 정직하고 그 행동은 올바르며 그의 혀는 곧 직언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미움을 줄 뿐이며, 직에 임하여서는 몸이 쇠척하도록 온 힘을 다했고, 충성과 절의는 초목이라 할지라도 그의 이름을 다 아는 바이니 참으로 이른바 군계일학이며 전상의 맹호라, 만약 그를 벌한다면 이는 마치 주운을 베는 것이나 같다.” 이는 선조 임금이 정철을 평가한 말입니다. 이렇게 침이 마르게 극찬했던 선조는 파직하라는 명을 내리고, 끝내는 귀양까지 보냅니다. 그 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강원도 원주에 가면 사적 제466호 법천사(法泉寺)터가 있습니다. 법천사는 통일신라 성덕왕 24년(725)에 창건된 절로 고려 중기에는 대표적인 법상종 절이었으며, 고려 문종 때 국사(國師)였던 지광국사(984~1070)가 열반에 든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원래 지광국사탑이 있었습니다. 현재 국보 제101호로 지정된 높이 6.1m의 이 탑은 독특한 구조와 화려한 조각, 뛰어난 장엄장식으로 역대 가장 개성적이고 화려한 승탑으로 꼽힙니다.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코끼리의 눈을 형상화한 안상, 불경에 나오는 상상의 새인 가릉빈가, 연꽃, 봉황 무늬 등이지요. 지광국사탑은 일제강점기인 1911년 일본인에 의해 원주에서 서울로 왔다가 1912년 일본 오사카로 반출되었는데 문화재의 불법 약탈과 나라 밖으로의 반출에 대한 나라 안팎의 비난이 거세지자 조선총독부가 압력을 넣어 서울로 되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탑은 6.25 한국전쟁 때 폭탄 피해로 옥개석을 비롯한 상부 부재가 여러 조각으로 파손되는 큰 손상을 입었고, 1957년 시멘트 등 다양한 재료로 덕지덕지 복원했었습니다. 이에 4차례의 정밀안전진단 등을 받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오른 조선왕릉에 가보면 석호ㆍ석양 등 석수(石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석수(石獸)란 좁게는 궁전이나 무덤 앞에 세워두거나 무덤 안에 놓아두는 돌로 된 동물상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 국립공주박물관에 가면 이상한 동물 모양의 국보 제162호 ‘무령왕릉 석수(石獸)’가 있습니다. 이 석수는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것으로 백제 때 만들어졌지요. 이 석수는 높이 30.8㎝, 길이 49㎝, 너비 22㎝로 무령왕릉 통로 가운데에서 밖을 향하여 놓여 있었습니다. 입은 뭉뚝하며 입술에 붉게 칠한 흔적이 있고, 콧구멍 없는 큰 코에 눈과 귀가 있으며, 머리 위에는 나뭇가지 형태의 철제 뿔이 붙어있지요. 몸통 좌우, 앞ㆍ뒤 다리에는 불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날개를 나타낸 것으로 보입니다. 또 꼬리가 조각되어 있으며 배설 구멍이 달려 있을 정도로 사실적인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삼국의 고분 가운데 무령왕릉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 석수는 기존의 백제에서 유례가 없었던 것으로 본래는 중국의 부장풍습에서 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무령왕릉의 석수가 본래 중국에서 부장풍습에서 들어온 것이라고 해도 그 생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발해사에 따르면 서쪽으로 거란에게 책망하여 돌려받고 북쪽으로 여진에게 책망하여 돌려받아 우리 강토를 잃지 않고 동양 세계에 일대 강국의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거늘, 바로 고려의 문인 학자들이 이를 타인의 강토로 등한시하여 5경 15부의 빛나는 판도를 이역에 빠지게 하고 동남쪽 한 모퉁이로 축소되어 약소한 나라를 스스로 만들었으니, 이것이 그 죄의 하나이다." 이 글은 〈제국신문〉과 함께 한말의 대표적인 민족지였던 <황성신문>의 1910년 4월 28자 논설 '발해고를 읽다' 일부입니다. 발해(渤海)는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군으로 공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고구려의 유민들과 그 지역의 또 다른 한민족 계열의 사람들이 고구려의 영토 위에 다시 세웠던 왕조로 698년부터 926년까지 고조선과 고구려의 고토인 남만주 일대와 한반도 북부지방에서 광대한 영토와 한민족의 문화를 계승하면서 존재했던 나라입니다. 또 발해는 고구려의 후신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독자적인 연호를 쓰는 등 천자의 제국으로 우뚝 서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발해왕은 일본에 보내는 국서에서 자신을 '고(구)려국왕'이라 했고, 일본에 왔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요즘은 우리는 코로나19의 대유행으로 큰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처럼 돌림병이 돌면 속수무책이었는데 영조 때만 해도 지금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홍역으로 50~60만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영조 임금 때인 1775년(영조 51) 이헌길은 한양에 갔다가 삼태기에 싣고 나가는 홍역으로 죽은 주검이 잠깐에 수백 명이나 되는 것을 보고, 상주의 신분임에도 백성을 구해야 한다며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이헌길은 홍역에 관한 한 최고의 의술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그의 비방을 얻은 사람은 죽을 지경이다가도 살아나고, 열이 오르다가도 내렸기에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그가 홍역 환자를 치료하는 집 앞에는 사람들이 골목까지 줄을 설 정도였고,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병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특히 다산 정약용은 그의 책 마과회통 서문에서 이헌길 덕분에 홍역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는 얘기를 썼습니다. 그런데 그가 명의로 추앙을 받게 된 것은 정조의 15대손인 왕가의 자손이면서도 가난한 사람이나 권력자이거나 구분하지 않고 똑같이 치료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이헌길은 치료만 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연구하고 체득한 비방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나도 춤추며 살았어요 - 허 홍 구 스텝이 꼬이고 풀리는 게 춤이라면서요 꼬였다가 풀리고, 꼬였다가 풀리고 어렵게 꼬였다가도 부드럽게 풀리면 더 멋진 춤이 된다는구먼요! 마치 절망 속에서 일어서는 사람처럼요 남들이 다 하는 사교춤은 맛도 못 봤으나 꼬였다 풀렸다, 넘어졌다 일어섰다 했으니 나도 한평생을 춤추면서 살아왔더라고요 이제는 발이 꼬이지 않게 가벼운 마음으로 나비처럼 춤추며 하늘 오르는 꿈을 꿉니다. 우리 겨레는 예부터 악가무와 함께 살았다. 음악과 노래와 춤을 아우르는 삶이었다. 그 가운데 춤, 우리의 춤은 정중동이 살아있는 것이었다. 멈춘 듯하지만 움직이고, 움직이는 듯하지만 멈추는 동작이 살아있는 것이 우리의 전통춤이다. 그 춤은 예인들만의 몫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추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허홍구 시인은 “스텝이 꼬이고 풀리는 게 춤이라면서요 / 꼬였다가 풀리고, 꼬였다가 풀리고 / 어렵게 꼬였다가도 부드럽게 풀리면 / 더 멋진 춤이 된다는구먼요! / 마치 절망 속에서 일어서는 사람처럼요”라고 노래한다. 누구나 삶을 살면서 스텝이 꼬였다 풀리기를 반복하는 게 사실이다. 늘 밝은 세상만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