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시인 도종환은 자신의 시 ‘세한도’에서 “견디며 깨어 있는 것만으로도 눈물겹게 아름답다.”라고 노래한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국보 제180호 세한도(歲寒圖)는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특별 전시되고 있습니다. 추사가 그림에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 곧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송백이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라고 썼기에 우리에게 <세한도(歲寒圖)>라고 알려졌습니다. 외부와 단절된 채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던 추사는 58살이 되던 해(1844년), 초라한 집 한 채와 소나무 한 그루, 측백나무 두 그루를 그린 세한도(歲寒圖)입니다. 고립무원의 유배지에 남겨져 있는 자신을 잊지 않고 유배 중인 중죄인을 도우면 중벌을 받을 수 있음에도 청나라 연경(베이징)을 드나들며 귀한 책들을 구해다 준 제자 이상적의 인품에 감동하여 답례로 그린 그림이지요. 이에 이상적은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그다지도 제 분수에 넘치는 칭찬을 하셨으며, 그 감개 또한, 그토록 절실하고 절실하셨습니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79년 전인 1941년 오늘(12월 10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무부장의 이름으로 대일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선전포고하기 직전인 12월 초, 일본은 하와이에 있는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지요. 하와이는 미국 태평양 함대의 전진 기지가 있는 곳으로, 미국이 중심인 연합국을 향해 총구를 들이댄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죠. 그러자 미국과 중국은 대일 선전포고를 했고, 대한민국임시정부 또한 이에 성명서를 낸 것입니다. 일제의 침략 전쟁이 동남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치닫던 이때, 임시정부는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적극적인 독립 활동을 모색하고 있었던 이때,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며 국권을 우리 힘으로 되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에 선전포고를 한 것입니다. 이때의 선전포고 내용을 보면 “왜구(倭寇)를 한국⋅중국 및 서태평양에서 완전히 축출하기 위하여 혈전으로 최후의 승리를 이룩한다.”라고 다짐합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하자마자 임정 요인들은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를 제정하여 육군을 편성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지난 7일 2014년부터 추진한 경주 쪽샘지구 신라고분 44호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에 대한 정밀발굴조사를 통해 바둑돌 200여 점이 출토되었다고 밝혔습니다. 바둑돌은 피장자 발치 아래에 함께 묻힌 토기군(土器群) 사이에 모여진 상태로 확인되었는데 크기는 지름 1~2㎝, 두께 0.5㎝ 안팎이고 평균 1.5㎝ 정도의 것이 가장 많다고 합니다. 색깔은 크게 흑색, 백색, 회색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인공적으로 가공한 흔적이 없어 자연석을 그대로 채취해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지요. 과거에도 신라시대 바둑돌은 황남대총 남분(243점), 천마총(350점), 금관총(200여 점), 서봉총(2점) 등 최상위 등급의 돌무지덧널무덤에서만 출토된 바 있습니다. 이후 시기로 넘어가면 7세기대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인 용강동 6호분(170점)에서도 확인되었고, 분황사터에서는 가로ㆍ세로 15줄이 그어진 바둑판 모양의 벽돌이 출토되기도 했습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효성왕(재위 737∼742) 때 기록에 효성왕이 바둑을 뒀다는 내용과 신라 사람들이 바둑을 잘 둔다는 내용 등이 확인됩니다. 그런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는 조선시대 으뜸 화원으로 단원 김홍도(金弘道)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단원은 풍속화를 독창적으로 담아낸 천재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요. 그런데 그가 그렇게 뛰어난 화원이 된 데에는 표암 강세황(姜世晃)의 공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단원이 7~8살 되던 무렵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표암은 그를 아끼며 글과 그림을 가르친 뒤 도화서에 천거하여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합니다. 심지어 표암은 호랑이 그림의 표준작이라 평가를 받는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등의 그림을 함께 그렸지요. 표암은 <송하맹호도> 오른쪽 위에 ‘표암화송(豹菴畵松)’이라 적었고, 단원은 왼쪽 아래에 그가 40대 이전에 주로 사용하던 호 ‘사능(士能)’을 적어 놓았으며, 소나무는 표암이, 호랑이는 단원이 그렸지요. 그런데 이 작품은 윗부분에 소나무 둥치만 그려 넣고 가지 한 줄기만 밑으로 뻗게 하여 공간감과 구성미를 동시에 그려낸 표암의 노련미, 수만 개의 호랑이 털을 정밀하게 그려 넣어 호랑이의 위용을 뽐낸 이 그림이야말로 불멸의 ‘송하맹호도’임이 분명합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은 대체로 천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스물한째인 대설(大雪)입니다. 소설(小雪)에 이어 오는 대설(大雪)은 눈이 가장 많이 내린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원래 절기가 역법(曆法)의 기준 지점인 중국 화북지방(華北地方)의 계절적 특징과 맞춘 것이기에 우리나라는 반드시 이때 눈이 많이 내리지는 않습니다. 時維仲冬爲暢月 때는 바야흐로 한겨울 동짓달이라 大雪冬至是二節 대설과 동지 두 절기 함께 있네 六候虎交麋角解 이달에는 호랑이 교미하고 사슴뿔 빠지며 鶡鴠不鳴蚯蚓結 갈단새(산새의 하나) 울지 않고 지렁이는 칩거하며 荔乃挺出水泉動 염교(옛날 부추)는 싹이 나고 마른 샘이 움직이니 身是雖閒口是累 몸은 비록 한가하나 입은 궁금하네 ... (아래 줄임) 위 시는 열두 달에 대한 절기와 농사일 그리고 풍속을 각각 7언 고시의 형식으로 기록한 19세기 중엽 김형수(金逈洙)의 <농가십이월속시(農家十二月俗詩)>입니다. 이때는 한겨울로 농한기이고 가을에 거둔 풍성한 곡식들이 곳간에 가득 쌓여 있어서 당분간은 끼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풍족한 때입니다. 한편 이날 눈이 많이 오면 이듬해 풍년이 들고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다는 믿음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동 면 - 조성례 아주 작은 나무 한 그루가 겨울을 감지한다 나무는 제 몸의 이파리들을 떨궈 발등을 덮는다 비로소, 침묵에 드는 겨울의 뿌리들이여! 발등을 덮은 작은 나무는 물관을 통해 수분을 간직하고 겨울은 기린의 목을 닮아 휘청휘청 내게로 온다 점점 두꺼워지는 껍질처럼 나이테들이 한 겹씩 남루를 껴안는다 남루 속에서 반짝이는 섬광들이 당신의 창문 밖을 기웃거리고 겨울을 이겨내지 못한 어린줄기가 추운 공중을 향해 여린 팔을 휘두를 때 줄기마다 내년을 약속하는 꽃눈, 꽃눈, 꽃눈, 그리고 온기를 보내는 당신의 작은 나무 시린 발을 땅속 깊이 묻고 나는 긴 잠을 자기로 한다 캄캄해서 환한 눈을 감고 당신을 기다린다 우리는 학생시절 교과서에서 0.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를 읽었다. '마지막 잎새'는 무명의 여류화가 존시가 폐렴에 걸려 희망도 없이 창문 너머에 있는 나뭇잎이 떨어지면 자기도 죽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같은 집에 사는 노화가가 섬세하게 나뭇잎을 벽에 그려서 비바람에도 견뎌내는 진짜 나뭇잎처럼 보이게 한다. 이에 존시는 삶에 희망을 품는다. 그 단편을 읽으며 삶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도록 나뭇잎을 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이종훈)는 국립경주박물관과 함께 12월 8일부터 ‘포항 중성리 신라비(국보 제318호)’ 실물을 국립경주박물관 신라역사관 3실에서 상설 전시합니다. 이번에 전시되는 ‘포항 중성리 신라비’는 발견 직후 8일 동안의 특별공개와 단기간의 특별전시를 통해 대중에게 잠시 선보인 적 있었지만, 이후에는 복제품으로만 공개하였습니다. 실물이 상설전시를 통해 전시되는 것은 2018년 이후 처음입니다. ‘포항 중성리 신라비’는 2009년 5월 포항시 흥해읍 중성리의 도로공사 현장에서 한 시민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습니다. 이 비는 모양이 일정치 않으며, 12행 20자로 모두 203자의 비문이 오목새김(음각)되어 있는데 위쪽 일부와 오른쪽 일부가 떨어져 나갔을 뿐 비문 대부분은 판독할 수 있을 정도로 양호한 상태입니다. 이 비의 글씨체는 예서로 분류되는데,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비와 통하는 고예서(古隸書)로서 신라 특유의 진솔미를 보여줍니다. 비에 새겨진 203개의 문자를 판독ㆍ해석한 결과, 신라 관등제의 성립, 6부의 내부 구조, 신라 중앙 정부와 지방과의 관계 등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임이 밝혀졌지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시대에 관원에게 품계와 관직을 내릴 때 주는 임명장을 교지(敎旨)라고 합니다. 교지는 관원을 임명할 때뿐만 아니라 임금이 시호(諡號), 토지, 노비 등을 하사할 때도 발급되었는데, 대한제국 때에는 황제가 내려주는 칙명(勅命)이라는 문서가 이를 대신하게 되지요. 그런데 여기 국립고궁박물관에 교지도, 칙명도 아닌 교명(敎命)이란 이상한 문서도 있습니다. 더구나 임명되는 사람 이름이 쓰여 있어야 할 부분은 공란으로 비워두고, 누군지도 모를 사람에게 경기전(慶基殿)의 행(行) 수원참봉(水原參奉)인 관직을 임명하는 문서입니다. 문서를 발급한 때는 대한제국 때인 광무 6년 3월 아무개 날로 날짜는 기록하지 않았으며, 황제의 옥새인 ‘칙명지보(勅命之寶)’가 날인되어 있지요. 문서의 마지막에는 문서 발급자의 직함과 이름인 ‘궁내부 대신 육군부장 심상훈’이 적혀 있고, ‘궁내부대신인(宮內府大臣印)’이라는 인장이 날인되어 있습니다.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이 문서는 가짜 임명장입니다. 조선후기부터 빈곤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하여 나라에서는 관직을 주고 돈을 받았습니다. 이때 발급한 임명장은 이름을 비우고 발급한 문서라는 뜻으로 ‘공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57년 전인 1863년 오늘(12월 2일)은 “대종교(大倧敎)는 삼신일체(三神一體) ‘한얼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단군 한배검을 교조(敎祖)로 받드는 한국 고유의 종교다.”라는 대종교를 창시한 나철 선생이 태어난 날입니다. 나철(羅喆, 1863 ∼1916) 선생은 관직에서 물러나 구국운동에 뛰어들었고, 을사늑약 매국노들을 살해하려다 실패하고 유배까지 된 분입니다. 유배에서 풀려난 선생은 1909년 1월 15일 구국 운동의 하나로 단군 신위를 모시고 제천 의식을 올린 뒤 민족종교 단군교를 선포했고 1910년에는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었지요. 대종교는 상해 임시정부의 총령 일곱 가운데 이동녕ㆍ이시영ㆍ신규식 등 3명과 임시정부 29명의 의정원 의원 가운데 21명이 대종교인이었음을 물론 한글학자 주시경ㆍ이극로ㆍ김두봉도 대종교인이었을 정도로 구국운동과 대종교는 떼어놓고 말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어떤 이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은 대종교에 큰 빚을 지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죽음과 대종교 본부의 이전은 독립운동에 새로운 전기가 되었습니다. 대종교 회원을 중심으로 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만들었으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종묘제례악을 연주할 때 보면 ㄱ자 모양으로 깎은 16개의 경돌을 두 단으로 된 나무 틀에 위아래 여덟개씩 매달아 소뿔로 만든 각퇴로 때려서 연주하는 유율 타악기 ‘편종(編鐘)’이란 악기가 있습니다. 편경은 습도나 온도의 변화에도 음색과 음정이 변하지 않아 모든 국악기 조율의 표준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 ‘편종’처럼 생긴 종 하나를 나무틀에 매단 국악기 ‘특종(特鍾)’도 있습니다. 이 특종 관련 기록은 맨처음 《세종실록》 12년(1430) 3월 5일에 나오는데 당시는 특종이 아니고 가종(歌鍾)이라고 했지요. 그러다 성종(1469~1494) 때 이 타악기는 비로소 특종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길이가 62cm, 밑 부분의 긴 지름이 29.3cm인 종 한 개를 틀에 매달아 놓은 이 특종은 편종의 종보다 두 배나 큽니다. 특종은 동철(銅鐵)과 납철(鐵)을 화합하여 주조하지요. 특종의 음은 12율(律)의 기본음인 황종(黃鍾)입니다. 특종은 종묘제향(宗廟祭享) 때 제례악이 시작할 때만 연주됩니다. 곧 특종은 박(拍)의 지휘에 따라서 한 번 연주되는데. 특종의 연주에 이어서 축을 세 번, 북을 한 번 치지요. 이 동작이 세 번 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