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양승국 변호사] 전에 제주 재판 갔을 때 가보았던 4.3 평화공원을 둘러보았습니다. 그 때 평화공원 사무실에서 4.3과 평화라는 잡지를 받았었는데 글 중에 저승사자 탁성록이란 글이 눈길을 끄는군요. 탁성록은 당시 제9연대 정보참모로 중위였는데, 여러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악명이 높았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증언은 비위에 거슬리면 빨갱이라고 몰아 죽였다거나 여러 여성을 겁탈했다는 내용입니다. 특히 탁성록은 아편중독자였군요. 아편에 취하니 눈에 뵈는 게 없었나봅니다. 탁성록은 제주에서만 만행을 저지른 것이 아닙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해 고향 진주로 돌아가 특무대장을 지내며 고향 인근의 주민들을 보도연맹원으로 몰아 집단학살을 자행하기도 했다는군요. ▲ 제주의 저승사자 탁성록 같이 근무했던 김정무 대위도 훗날 이렇게 증언합니다. 탁성록은 마흔이 다 된 사람인데 정보참모의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군사영어학교 출신도 아니고 군악대에서 나팔 불던 놈인데 어떻게 특채됐는지 나보다도 먼저 대위를 달았어요. 이런 저런 구실을 달아 여자들 성폭행을 많이 했어요. 이 정도 인간이라면 우리가 많이 볼 수 있는 비열한 인간상이니까 제가 이 정도만
[한국문화신문 = 양승국 변호사] 전에 책을 읽다가 1887년 조선 주재 프랑스 초대 공사로 부임한 빅토르 꼴랭 드 플랑시와 결혼하였던 궁중무희 '리심'에 대해 알게되었습니다. 아리따운 리심을 알게된 플랑시는 고종에게 리심을 요구하여 리심을 선물 받은거죠. 당시 궁중무희는 노비 신분이고, 더구나 왕의 명령이니 플랑시는 어렵지않게 리심을 손에 넣은 것입니다. ▲ 1887년 조선 주재 프랑스 초대 공사로 부임한 빅토르 꼴랭 드 플랑시 그런데, 날이 갈수록 리심의 아름다움과 지적인 총명함에 빠져든 플랑시는 3년의 임기를 마치고 귀국할 무렵 리심과 결혼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래서 리심을 데리고 프랑스로 귀국하여 결혼을 하지요. 아마 리심이 최초로 프랑스 땅을 밟은 조선여인이 아니었을까요? 그 후 리심은 플랑시가 모로코 공사로 부임하자 남편을 따라 아프리카 땅도 밟습니다. 이 역시 아프리카에 상륙한 최초의 조선여인? 조선여인 리심에 비친 서양세계는 어떠했을까요? 또 낯선 백인들 땅에 유일한 조선여인 리심의 외로움은 어떠했을까요? 리심의 행복은 1896년 플랑시가 다시 조선 공사로 부임하면서 막을 내립니다. 고종이 리심을 미끼로 프랑스의 힘을 빌리고자 플랑시를 회유
[한국문화신문 = 양승국 변호사] 요즈음 독립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지요? 12. 11.부터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더니 지금까지 그 기세를 몰아오며 100만 관객을 돌파하였습니다. 이 기세대로라면 독립영화로 최고 흥행기록을 세운 워낭소리의 기록을 깨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 같습니다. 15일(월) 저도 이 영화를 보았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았다고 하니까, 흐~음~~ 영화가 뜬다고 하니까, 평소 영화 잘 안 보는 양변까지 영화를 보는구먼.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겠지요? 물론 그런 점도 있겠지만, 사실은 이 영화를 감독한 진모영 감독과의 개인적 인연이 저를 더 영화관으로 끌어들인 것입니다. 제가 오래 전부터 나눔문화라는 시민단체 회원으로 있는데, 나눔문화 회원들 중 같이 중동이나 아프리카 등 여행를 같이 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여행을 통해서 친해진 사람들끼리 오랫동안 친교를 나누며 지내오고 있지요. 그렇기에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극장에 걸리면서, 당연히 같이 모여 영화를 보았는데, 저는 그때 다른 일정이 있어서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5일 송년모임에서 진감독을 만날 텐데, 아직까지 영화를 보지 않
[한국문화신문 = 양승국 변호사] 지난 토요일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초동 캠퍼스 크누아홀에서 카포크누아(CAPOKnua) 제2회 정기 연주회가 있었습니다. 카포크누아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최고경영자 문화예술과정을 마친 동창들 중 합창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모여 만든 합창단입니다. 저도 테너로 합창단에 참가하고 있지요. 사실 연주회 얼마 전까지도 제대로 음악적 수준에 안 올라왔다고 백경화 지휘자 - 국립합창단 부지휘자 - 로부터 질책을 많이 받았는데, 그래도 대부분 관객들은 작년보다 좋았다고 하더군요. 하긴 그런 것은 질책하면서 우리를 이끌어준 지휘자 선생님의 덕분이지만요. 유경미 에스비에스 아나운서의 사회로 막을 올린 연주회에서 우리는 비발디의 글로리아로부터 시작하여 총 16곡을 1, 2부 순서로 나누어 불렀습니다. 앵콜로 2곡을 더 노래했으니 총 18곡을 이 날 부른 것이네요. 18곡이나 되는 악보 파일을 다 들고 노래하려니 팔이 아파서, 2부 순서 들어갈 때는 1부에 부른 노래 악보는 다 빼고 들어갔지요. 노래는 종교합창곡, 한국 가곡, 민요, 외국 애창곡, 춤곡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었습니다. 아마추어들이 모여 이 많은 다양한 곡을 무대에 올려야 했으니, 연
▲ 《다니니까 길이더라》,박희채, 책과나무,2014 [한국문화신문 = 양승국 변호사] 박희채 전 영사의 책 《다니니까 길이더라》를 읽었습니다. 책은 저자가 오랜 직업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겪은 일화나 삶에서의 느낌을 장자(莊子)적 관점에서 풀어본 수필집입니다. 저자는 2001. 12. 캐나다 밴쿠버에 근무할 때에 《장자》에서 종교를 초월한 인간 삶의 가치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후 아예 성균관 대학교 대학원 종교철학과까지 들어가 장자를 집중적으로 공부하더니, 장자의 생명적 사유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까지 받았지요. 잠시 저자의 말을 들어보지요. 책을 통해 장자의 사상을 알아 가면서, 더 큰 세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정된 나의 세계에 빠져 살던 나에게 타자(他者), 그리고 우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나는 내 생각은 옳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모든 대상을 판단하며 살아왔었다. 우물 안 개구리로 살면서도 나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인 줄을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가여운 한 마리 우물 안 개구리에게 우물 바깥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책은 내가 그동안 기록한 내용을 장자적 사유를 바탕으로 반추해본 것이다. (중략) 내 우물만이
[한국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이 몸을 받기 전에 무엇이 내 몸이며 세상에 태어난 뒤 내가 과연 누구이던가. 자라서 사람 노릇 잠깐 동안 나라고 하더니 눈 한번 감은 뒤에 내가 또한 누구이런가 천등산 봉정사 고금당 기둥에 있는 주련(柱聯)으로, 청나라 순치제가 읊은 게송 중 일부랍니다. 이 또한 산사의 주련에 나오는 주련입니다. 그런데 저는 주련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청나라 순치제가 읊은 게송 중 일부라는 글귀에 눈이 갔습니다. 아니? 청나라 황제가 이런 게송을 읊었단 말인가? 순치제라면 청나라 제3대 황제(1643~1661)인데, 어떻게 청나라 황제가 이런 게송을 읊는단 말인가? 이런 의문은 저로 하여금 순치제에 대해 찾아보게 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순치제는 6세 때 황위에 올라, 처음에는 숙부 도르곤과 누르하치의 동생 슈르하치의 6남 지르하랑이 좌우 섭정왕으로서 정무를 대리하였답니다. 그러다가 1650년 도르곤이 죽자 직접 통치를 하게 되었는데, 그것도 10년만인 1660년 총애하는 후궁 동악비가 죽자 정치에 뜻을 잃고 1661년 황위를 황태자 애신각라 현엽에게 물려주고 출가를 하였다는군요. 이 현엽이 바로 그 유명한 강희제입니다. ▲ 청나라 순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산사의 주련을 보면 만공의 스승 경허 스님의 일화에 대해서도 소개합니다. 책에 나오는 내용을 아래와 같이 인용해봅니다. 천장암에 모시고 있던 늙은 어머님이 생신을 맞은 날, 스님은 어머니를 위해 특별 법회를 열었다. 많은 불자들이 법문을 듣기 위해 모여든 가운데, 법상에 앉아 있던 스님이 벌떡 일어나 주장자를 한 번 힘껏 내리쳤다. 그리고 스님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 지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는 불자들 앞에서 옷고름을 풀고 알몸을 드러냈다. 여기저기서 놀란 소리가 들렸고, 아낙들이 자리를 박차 밖으로 나갔을 것임은 자명한 이치. 놀란 것은 경허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경허가 실성을 했구나! 세상에 이런 망측한 짓을 내 앞에서 하다니! 스님은 벗었던 옷을 다시 주어 입은 뒤, 주장자를 세 번 내리치고는 이렇게 말했다. ... 나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어머니의 젖을 손으로 만지고 입으로 빨면서 자랐고, 어머니는 나를 벌거벗겨 씻기며 귀엽다고 만지고 예쁘다고 주무르셨소. 이제 세월이 흘러 어머니는 늙고 나는 장성했으되 어머니와 자식 사이는 변함이 없음에도 어머니는 오늘 벌거벗은 내 몸을 보시고 망측하다 해괴하다 질겁하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저 산의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잘 뚫는데 우리 집 멍텅구리는 뚫린 구멍도 못 뚫는구나. 남자들이라면 많이 들어본 노래이지요? 저도 젊었을 때 술 한 잔 걸치면 젓가락 두드리며 이 노래 부르던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이런 노래를 1930년대 말 만공스님이 상궁나인에게 법문을 행할 때 어린 행자에게 부르게 하였답니다. 절 근처 나무꾼들이 어린 행자 스님을 놀리느라 가르친 노래라고 하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노래임이 맞을 것 같습니다. ▲ 만공스님 초상화(수덕사 금선대) 실제로 상궁나인들은 이 노래를 들으며 얼굴을 붉히거나 혹은 키득거리며 쑥덕거렸다고 하니까, 그들도 같은 뜻으로 들었겠지요. 그런데, 어떻게 만공스님이 법문을 행하면서, 그것도 상궁나인들에게 법문을 행하면서 행자 스님에게 이런 노래를 하게 했을까요? 한민이란 분이 쓴 산사의 주련이란 책을 보면 만공스님은 행자에게 이 노래를 부르게 한 후 다음과 같이 법문을 했다고 합니다. 바로 이 노래 속에 만고불역의 핵심 법문이 있소. 세상의 모든 것이 법문 아닌 게 없지만 이 노래에 담긴 깊은 뜻을 헤아리게 되어야 내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이오. 마음이 깨끗하고 밝은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당고개역에서 수락산 유원지를 가다보면 덕능고개를 넘고 다시 순화궁 넘습니다. 전에 순화궁 고개를 넘으면서 왜 고개 이름이 순화궁 고개일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순화궁은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의 궁호로, 인사동 태화빌딩 앞에 가면 순화궁 터라는 표석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순화궁은 매국노 이완용의 손에 넘어갔다가 명월관 주인 안순환이 인수하여 태화관으로 고쳤었죠. 이 태화관에서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구요. 그런데 그 순화궁과 이 순화궁 고개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집에 돌아와 아무리 찾아보아도 연관성을 찾아볼 수 없더군요. 그런데 지도를 보다보니 순화궁 고개 옆에 순화군 묘가 있었습니다. 순화군이라면 선조의 6째 아들 아닙니까? 임진왜란 때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러 함경도로 갔다가 왜군의 포로가 되었던 순화군말입니다. 아무래도 제 생각에는 순화군 묘가 있어 순화군 고개라고 부르던 것이 와전되어 순화궁 고개가 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애 있는 조선 선조 6번째 왕자 순화군(順和君,?~1607) 무덤 순화군은 완전 개망나니입니다. 아니 연쇄살인범입니다. 무슨 말인고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딜쿠샤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딜쿠샤는 힌두어로 ‘이상향, 행복한 마음, 기쁨’ 등을 뜻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갑자기 딜쿠샤 얘기를 하니, 좀 의아해 하실지 모르겠는데, 저번에 서울 종로구 행촌동 1-88, 89 언덕 위에 있는 딜쿠샤라는 집을 찾아보고 왔습니다. 하하! 이렇게 말씀드리면, 행촌동에 그런 집이 있냐고 더 의아해 하실 것 같네요. 딜쿠샤는 미국인 알버트 테일러(Albert Taylor, 1875~1948)가 1923년에 지은 집으로, 화강석 기저부 위에 붉은 벽돌을 세워 쌓은 2층 주택입니다. 안내문에는 이런 건축기법을 프랑스식 쌓기라고 적어놓았는데, 하여튼 당시로서는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희귀한 벽돌 양식의 집이었다 할 것입니다. 1923년에 미국인이 조선 땅에 이런 희귀한 집을 지었다는 것, 게다가 집 이름이 ‘딜쿠샤’라는 힌두어 이름이라는 것이 저를 딜쿠샤로 끌어당겼습니다. 알버트는 왜 조선에 집을 지으면서 ‘딜쿠샤’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딜쿠샤는 알버트의 부인 메리 테일러가 결혼 전 인도 러크나우 지역에서 본 고성의 이름이랍니다. 메리는 ‘딜쿠샤’라는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어, 결혼하면 자기가 살 집의 이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