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이시구로 가즈오(石黒 一雄, 64살)씨는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인이다. 아니 이시구로 씨는 일본인이지만 1983년 영국에 귀화했으니까 국적은 영국인이라고 하는 게 맞다. 하지만 노벨문학상 수상이 확정 된 뒤 그는 “내 마음속에는 항상 일본이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나 사물을 보는 방법의 대부분에서 내 자신이 일본인이라고 생각한다.”는 소감에서 밝혔듯이 자신을 영국인으로 여기기보다는 일본인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28살 되던 해인 1982년, 영국에 주재하는 나가사키가 고향인 여성의 회상을 그린 처녀작 <여자들의 먼 여름(A Pale View of Hills)>을 발표하여 왕립문학협회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의 소설에 나가사키가 무대로 등장하는 것은 그가 5살 때 해양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영국에 건너간 것과 무관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 처녀작의 무대가 나가사키인 것과 작가의 고향이 나가사키라는 일치감은 어쩌면 어린 시절 떠나온 고향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 보이지 않게 내재해 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동양인의 모습으로 낯선 환경에서 성장한 이시구로에게 있어 의사소통의 어려움과 기억의 불확실성은 이후 그의 소설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창극에 대한 이론과 비평이 당세의 독보적인 존재였다는 김세종 명창의 이야기를 하였다. <김세종제 춘향가의 미적(美的)접근>이라는 학술모임에서도 김세종제 춘향가의 전승과정이나 동편소리의 특징으로 통성이나 대마디 대장단, 기교보다는 통목을 쓰는 점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전의 춘향가와는 달리, 양반적 취향이 상당부분 가미되어 사설 내용이 우아해 졌고 섬세해 졌다는 이야기나 시창(詩唱)의 삽입이나 우조(羽調)가 강하게 포함되며 감정의 표출을 자제하는 미의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김세종은 동편에 속한 대명창으로 신재효 문하에서 지침을 받아 문견이 고상하고, 문식(文識)이 넉넉하며 창극에 대한 이론과 비평이 당세 독보적인 존재였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특히 김세종은 사설의 이면(裏面)과 형용동작이 사설에 맞도록 적절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이러한 김세종의 춘향가 소리를 보존해 나가고 있는 모임을 현재 김수연이 이끌고 있는 것이다. 김세종제의 춘향가를 김수연에게 전수해 준 스승이 얼마 전 작고한 성우향 명창이다. 성우향은 국가지정 문화재 5호 판소리(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활동하면서 많은 제자들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현재 국악속풀이는 김수연이 이끄는 <김세종제 춘향가보존회> 발표회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보존회원들의 순서가 진행 중에 찬조 출연한 신영희 명창의 춘향가 중 박석치 대목이 이어졌다. 이 대목은 이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서 남원에 내려오던 중, 입구의 박석고개에 올라 좌우를 내려다보며 지난날 춘향과의 만남을 회상하는 대목으로 사설이 시(詩)적이다. “박석치 올라서서 좌우 산천을 둘러보니 산도 옛 보든 산이요, 물도 옛 보든 녹수로구나. <중략> 광한루야 잘 있으며 오작교도 무사트냐?” 신영희 명창은 근세 한국을 대표하던 김소희 명창의 수제자로 국가문화재 예능보유자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 그는 판소리 북을 들고 대중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판소리를 널리 알리고 대중화 하는데, 일조를 한 명창으로 유명하다는 점, 그는 극장 무대가 크든, 작든 간에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고 통성으로 부르는 명창으로 또한 유명하다는 점을 얘기했다. 또 김수연의 강습생들이 부른 옥중(獄中)가, 쑥대머리 대목은 임방울(1905~1961)에 의해 유명해졌다는 점, 김수연의 큰 제자들이 남도민요로 끝을 맺었으나, 객석의 요구로 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경남 산청 출신의 홍호연(洪浩然)은 임진왜란 때 12살의 나이로 왜군에 납치되어 나고야 일대에 살면서 명필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 진주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군, 관, 민 7만 명을 학살한 뒤 경남 내륙지역까지 진출했다. 그때 경남 산청에 살던 호연의 가족인 남양 홍 씨 일가는 마을 뒷산 동굴로 피신했다. 그러는 와중에 어린 소년은 가족들과 헤어져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의 부대에 붙잡혀 일본 규수(九州) 사가(佐賀)에 포로로 끌려가게 된다. 그 뒤 12살의 어린 소년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홍호연은 나카노진우에몬(中野左衛門)에게 맡겨져 사무라이 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하지만 조선에서부터 글공부를 하면서 익힌 붓글씨 솜씨는 사무라이들의 눈을 휘둥그레 만들었다. 어린 호연은 워낙 천재적인 소질도 있었던 데다가 목숨을 지켜내기 위한 피나는 노력으로 서예에 몰두한 끝에 ‘혹부리 체’라는 독자적인 서체를 이루면서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 찬사를 받는다. 교토시의 초호지(頂法寺) 현판은 물론 사가시(佐賀市)의 신사(神社)등에 작품이 남아 있을 정도로 유명한 서예가로 활약한 홍호연은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서울 삼성동 소재 한국문화의 집(Kous)에서 열렸던 <김세종제 판소리보존회> 정례 발표회 이야기를 하였다. 김수연 명창을 비롯하여 제자들의 열연과 특별 출연자, 그리고 관객의 호응이 만들어낸 성공적인 발표회였다는 점, 판소리나 경기지방의 긴소리, 가곡이나 가사, 시조와 같은 장르의 노래들은 노랫말이나 사설의 이해가 감상의 성공요인이라는 점, 판소리를 부르기 전에 부르는 단가(短歌)라는 노래는 짧고 간단한 노래로 긴 노래를 부르기 전, 목 상태를 점검하는 과정이라는 점를 얘기했다. 초앞 대목의 ‘기산영수 별건곤 소부 허유 놀고’에서, 기산(箕山)은 중국 하남성에 있는 높고 깊은 산 이름이고, 영수(潁水)는 그 근처에 있는 맑은 강, 이곳에 소부나 허유와 같은 선비들이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고 해서 별천지, 곧 별건곤(別乾坤)이라고 한다는 점, ‘허유’ 선비는 요임금으로부터 임금자리를 맡아 달라는 청탁을 받자,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며 영수강에 가서 귀를 씻었다고 하고, ‘소부’는 허유가 귀를 씻은 물이라고 소에게 먹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김수연의 수제자인 강경아의 ‘이별가’가 또한 청중들로부터 갈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비탈진 돌길로 높은 한산 나 홀로 올라가니(獨上寒山石逕斜) 흰 구름 피어나는 곳에 외딴 집 하나 있네(白雲生處有人家) 가던 길 멈추고 잠시 늦가을 단풍을 감상하니(定車坐愛楓林晩) 서릿발 단풍잎이 매화보다 붉구나(霜葉紅於二月花) 13살짜리 어린 소년은 당나라 두목(杜牧, 830~852)의 시를 줄줄 읊었다. 죽음에 앞서 이 시 한수로 목숨을 건진 소년의 이름은 여대남(余大男, 1580년~1659)이다. 여대남은 경상남도 하동 출신으로 보현암(普賢菴)에서 글공부를 하던 중 1592년 임진왜란 때 일본의 장수 가토 기요마사의 부하에게 잡혀 죽을 뻔 하였으나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당시 여대남은 죽기 직전, 붓을 달라고 해서 당나라 시인 두목의 시를 달필로 써내려갔다. 이를 본 가토 기요마사는 이 소년의 비범함에 죽이려던 것을 중지하고 일본으로 데려가 자신의 스승인 일진(日眞) 스님에게 출가 시켜 승려의 길을 걷게 한다. 소년시절부터 영특했던 여대남은 일본 최고의 불교학당인 교토의 육조강원(六條講院)에서 공부 한 뒤 규엔지(久遠寺), 호린지(法輪寺) 등을 거쳐 1609년에 29살의 나이로 구마모토의 고찰인 혼묘지(本妙寺)의 3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2017년 9월 13(수요일) 저녁 7시 30분, 서울 삼성동 소재 한국문화의 집(Kous)에서 열렸던 <김세종제 판소리보존회> 정례 발표회 관련 이야기를 하였다. 이 보존회는 성우향의 뒤를 이어 김수연이 이끌고 있으며 문화재 종목의 전승과 보급 활동의 성과를 가늠할 수 있는 무대라는 점, 각 단체에서도 객관적인 평가를 받아야 성장할 수 있다는 점을 얘기했다. 또 이 날의 발표회는 김수연 명창과 소속 회원들이 중심이지만, 서영호의 아쟁산조, 판소리 예능보유자 신영희 명창의 <김소희제 춘향가>, 왕기석 일행의 <흥보가 중 화초장>대목의 창극도 곁들여진 발표회였다는 점도 아울렀다. 그뿐만이 아니라 판소리 제곡(諸曲)들은 여러 명창들에게 전해지면서 각각의 특징이 실리고 첨삭되어 더 세련된 모습으로 후대에 이어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김세종제 춘향가>는 이전의 송흥록으로부터 비롯된 동편제 소리를 더욱 가다듬었다는 점, 김세종제의 춘향가는 김세종, 김찬업, 정응민과 같은 뛰어난 명창들이 짠 것인 만큼, 옛날 명창들의 더늠이 고루 담겨 있고, 조(調)의 성음이 분명하며 부침새,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막부시대(여기서는 에도시대‘1603~1868’를 말함)에는 막부의 엄격한 규제로 아무나 목화솜으로 옷을 해 입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겨울이 길고 추운 지방인 아오모리 사람들은 마를 심어 그것으로 옷을 해 입어야 했지요. 얼마나 추웠겠습니까? 겨울에 숭숭 바람이 들어오는 마옷을 입을 수 없게 되자 어머니들은 마옷감 위에 코긴사시(자수의 일종으로 보온을 위한 덧누비)를 해서 보온성을 유지하려고 애썼습니다. 막부에서 목화솜은 사용못하게 했지만 목화실은 허용하여 집집마다 코긴사시 붐이 일었지요. 그렇게 가족 사랑의 마음이 듬뿍 담긴 코긴사시는 쓰가루지방의 독특한 무늬로 남아 오늘날 ‘쓰가루코긴사시’의 전통이 지켜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일본 아오모리현 히로사키시(青森県 弘前市)에 사는 코긴사시의 명인 사토요우코 (佐藤陽子) 씨가 그의 자수전시관을 찾았을 때 들려준 이야기다. 전시관의 정식 이름은 <사토요우코코긴전시관(佐藤陽子こぎん展示館)>으로 이곳을 찾아간 날은 지난 8월 8일 오후 4시 무렵이었다. 히로사키시의 조용한 마을에 자리한 자수전시관은 2층짜리로 된 아담한 가정집 같은 곳이었는데 1층에는 견학자들을 위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연변대학 무대에서 인기를 모았던 김병혜 교수, 송효진, 김보배양과 이들이 부른 남도민요 중 <육자배기>와 <뱃노래>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육자배기는 남도의 대표적인 노래로 듣기도 어렵지만, 부르기는 더더욱 어려운 노래라는 이야기, 김병혜는 대학원까지 판소리를 전공한 정통파 소리꾼으로 현재, 순천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판소리 적벽가의 예능보유자였던 정미옥이나 심청가의 성창순으로부터 소리와 인생을 배웠다는 이야기를 했다. 효진과 보배 역시 완창 발표회를 가질 정도로 실력을 갖춘 차세대 명창들로 이들은 지방에서 활동하며 이익 창출의 목표가 아닌, 지역의 문화 발전과 저변 확대를 위해 공연물을 기획, 제작, 출연에 앞장서고 있다는 이야기, 그 대표적인 작품들이 <갈대향과 미르지무>, 순천 정원 박람회기간에 셋트장 상설 공연을 기획한 바 있는 <드라마틱> 등 등이라는 이야기도 함께 했다. 또 미국이나 중국교류 공연에 이들 트리오가 참여함으로써 교류회가 탄력을 받게 되었는데, 그들은 전통문화의 해외 교류가 얼마나 중요한 사업이며 여기에 참여하는 자신들의 역할이나 존재의 의미를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에 전기가 들어가지 않는 곳, 그런 곳이 있을까? 그런 곳이 있다. 아니 전기는 들어가는 데 전깃불을 거부하고 호롱불을 켜고 영업하는 곳이 있다. 호롱불이라고 한 것은 그런 분위기를 말하고자 함일 뿐 실은 램프불이다. 하지만 침침하기는 호롱불이나 램프불이나 매한가지다. 관서지방은 기온이 39도나 올라간다는 일기예보에도 아오니온천은 숙박 방에 솜이불이 놓여있다. 아오모리현(青森県) 아오니온천(青荷温泉)에 도착한 것은 지난 8월 11일 금요일 저녁 6시 무렵이었다. 구불구불 4킬로 이상의 편도 산길을 승용차로 달려 온천에 도착하니 슬슬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아오니온천은 전기로 대변되는 모든 문명의 이기가 작동되지 않는 곳이다. 텔레비전도 없고 물론 슬기전화(스마트폰)도 터지지 않는 곳이다. 대신 침침한 램프불이 방마다 걸려있고 현관이나 복도 역시 마찬가지다. 전날 크고 드넓은 아름다운 도와다호수(十和田湖)를 둘러보고 이 깊숙한 두메산골 온천에 도착했다. 산속이라 해가 매우 짧다. 6시부터 저녁 식사가 시작되는 대형 식당은 다다미방으로 되어 있고 유카타(浴衣, 목욕한 뒤에 입는 일본옷)를 갈아입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식탁에 앉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