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리가 있사옵니까? 어찌 이순신을 상감마마와 비교할 수 있겠나이까. 신은 한때 발칙한 죄를 저지른 이순신을 거듭 경계해야 함을 주청 드리는 것이옵니다. 그러한 자가 다시 신분을 되찾게 된다면 지난 과오를 다시 범할 염려가 있다는 말씀이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순신은 후환이 된다는 것이구나. 바로 그러합니다. 선조의 눈빛이 변하였다. 넌 김충선을 자세히 모르지? 소문을 들어 약간 알고 있나이다. 솔직히 말하라. 강두명이 머리를 조아렸다. 모르옵니다. 짐작하기에 무서운 놈이다. 조국 일본을 배신한 독종이로다. 총기를 다루는 기술과 무장으로의 배짱도 두둑하다. 넌 그 놈이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을 찾아내라. 약점을 파고들란 이야기다. 이순신을 우선 대신해야겠다. 강두명은 잠시 혼란스러웠다. 이순신을 대신하라는 것은? 선조는 거침이 없었다. 김충선을 제거해야겠다. 강두명은 침을 꼴까닥 삼켰다. 아......전하. 선조의 야비한 시선은 혼란에 휘감긴 강두명의 전신에 머물렀다. 아주 미약한 신음처럼 선조의 음성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다시 이순신을 도모하라. 이순신에 대하여 선조는 지극히 집요하였다. 광해군을 견제하기 위해서 선조는 우선 왕세자에게 충성을 맹서했던
[그린경제=유광남 작가] 상감마마 황공하옵니다. 유성룡은 더 이상 선조와 마주 하기가 괴로웠다. 왕을 고립시켜 끝내는 파국으로 장식해야 하는 현실이 거북하기 짝이 없었다. 유성룡은 왕 선조에 대한 증오는 존재하지 않았다. 유성룡이 원하는 것은 조선다운 조선을 만드는 길이었다.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나이다. 선조가 갑자기 제지했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리오. 예...전하. 선조는 다시 몸을 굽혔다. 뭔가 중요한 용건이 있을 때의 버릇이었다. 이순신과 김충선이 왜적과 여진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는지 알고 계시오? 유성룡은 뜬금없는 선조의 질문에 잠시 주춤거렸다. 의도를 알 수없는 물음이었던 것이다. 짐작하기에 그들 여진과 왜적은 조선의 주적이 아니옵니까? 주적(主敵)이지요. 이순신과 김충선은 지난 6년 간 왜적을 상대해 왔습니다. 이순신은 훨씬 전 군관으로 변방의 여진족과 전투를 치룬 경험이 있사오나 김충선은 여진을 아직 알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유성룡의 답변을 들으며 선조는 잠시 상념에 잠겼다. 강두명의 보고에 의하면 김충선도 분명 여진이란 호칭을 땅바닥에 남긴 것이다. 그들은 과연 어떤 의미에서 조선의 주적들을 낙서하며 주고받았을까? 선조는 이순신
[그린경제=유광남 작가] 선조의 비굴함이 용서되지 않았다. 이순신의 장계를 숨기고 그 충성스러운 무장을 제거하려 했던 행위에 대하여 부끄러웠고, 어쩌면 그보다 훨씬 이전 임진년 일본의 기습 공세에 밀려서 파천(播遷)을 단행 했을 때, 조선의 땅과 백성들을 버리고 명국으로의 망명을 하고자 했던 왕에 대하여 유성룡은 그 상실감에 통곡했었다. 전하! 아니 되옵니다. 이 나라를 포기하고 어디로 가시나이까? 유성룡은 눈물로 애원하며 왕 선조를 붙들었다. 선조는 그런 유성룡에게 호통 했었다. 짐이 살아 있어야 조선을 보전 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곧 조선이 아닌가? 내가 이대로 적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면 그때는 끝이 아닌가? 짐이 저들에게 붙들려 항복하게 된다면 조선은 다시 회복할 수 없도다. 유성룡이 호소했다. 전하, 명나라로 피신하게 된다면 그것이 진정 조선을 포기하시게 됨을 모르옵니까? 조선을 선선히 일본에게 내주고자 하십니까? 만일 전쟁이 끝나고 조선이 수습되면 백성을 등진 왕을 누가 인정하며 받아 드리겠습니까? 그리고 명국 또한 조선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지니게 되겠습니까? 통촉하여 주옵소서! 선조는 귀찮았다. 왕궁을 떠나 평양으로 의주로 피난하는 생활도
[그린경제=가람 기자] 지금부터 118년 전이었던 1894년 갑오년. 척양척왜와 보국안민의 가치를 내걸고 동학도와 농민군이 봉기를 일으켰다가 왜군과 관군, 민보군의 반격으로 20~30만 명의 무참한 순절자를 뒤로 한 채 역도, 폭도, 비도가 되어 눈보라 휘몰아친 광야와 산야로 내몰리고 숨어 살아야 하게 된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되고 막을 내리던 해였다. 100년이 훨씬 넘은 세월도 세월이지만 역도로 몰린 동학도와 농민군, 그리고 그 가족들은 행여나 그 흔적이 남아서 다시 잡혀 갈까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자료들을 없애버렸다. 우리 남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당시의 자료를 거의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으나 천만다행으로 동학농민전쟁 당시 지휘부의 일원으로 직접 전투를 지휘하며 싸우다가 살아남으신 유태홍 교구장의 구술을 최병헌 후임 교구장이 기록으로 남긴 「남원군 종리원사 부 동학사」 및 순교약력이 보존되어 있어 당시 남원의 참상을 되짚어 볼 수 있게 되었고, 이후 많은 학자들에 의한 연구결과가 전라좌도 농민군의 총 지휘부였던 남원의 동학과 농민혁명 당시의 윤곽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단 1년간 시작되고 막을 내리긴 했지만 그 부침 속에
[그린경제=유광남 작가] 그러나 유성룡은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이순신을 향하던 선조의 표적이 김충선에게로 옮겨진 것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몰랐다. 하여간 이순신의 나라를 세우고자 전심전력을 다하는 김충선에게는 악재(惡材)였다. 그들이 무엄하구려. 유성룡이 선조의 노기를 가슴으로 품어 주었다. 소신이 그들에게 일러 주었습니다. 일본의 재침략을 봉쇄하는데 있어서 중요 역할을 하게 된다면 자연 이순신은 본래의 위상을 되찾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랬소? 김충선이 장담했습니다. 뭐라? 상감마마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두 장수의 머리를 베어 버리겠다고 말입니다. 선조의 용안에 호기심이 어렸다. 어떤 자들을? 서애 유성룡은 일본 장수들의 이름을 대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이옵니다! 선조는 그 순간 대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 하하핫... 유성룡도 선조의 큰 웃음에 덩달아 따라 비웃었다. 선조는 아예 어좌의 모서리를 붙잡고 숨이 끅끅 넘어갈 정도로 호들갑스럽게 웃었다. 왕의 위엄과 체면 따위는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끝내 왕의 눈에서는 눈물까지 비쳤다. 짐이 이렇게 웃어본 적이 대체 얼마 만인고?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김충선
[그린경제=유광남 작가] 선조의 탄식을 들으며 유성룡은 얼굴 색 조차 변하지 않고 말했다. 이순신은 조정의 명을 받들지 않고 감히 신하 된 도리를 다하지 않아 의금부로 압송되어 감옥살이를 하였으며, 이제 백의종군의 신분으로 간신히 출옥하지 않았습니까? 이순신은 지난 한 달간 옥중에서 많은 생각을 하였을 것이옵니다. 그러나 선조는 그와 같은 내용이 사실과 다름을 알고 있었다. 영상 역시 모르지 않을 일이었다. 이순신과 같은 장수는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소. 유성룡은 자신의 견해를 한 발자국도 물리지 않았다. 신이 살펴 보건데, 이순신은 왕명을 거역한 죄를 뉘우치고 있으며 진심으로 함대 통제사로의 복귀를 희망하고 있나이다. 그건 불가하오. 소신 역시 그러한 청탁을 들어줄 수 없음을 분명히 했사옵니다. 선조는 눈빛을 반짝였다. 그랬더니요? 이순신은 매우 실망한 기색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항왜 장수 사야가 김충선이 이순신의 삼도수군통제사 복직을 강력히 요청해 왔습니다. 선조의 눈에서 노기가 뿜어졌다. 저런, 고얀 놈을 봤나? 김충선이란 작자는 대관절 어떤 놈이요? 유성룡은 그에 관하여 비교적 소상히 설명했다. 바다에서 이순신이 활략했다면 그 김충선은 육지에서 공로
[그린경제=유광남 작가] 선조의 부친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은 조선 11대 임금이던 중종과 그 후궁 사이에서 출생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선조는 조선 최초의 서자 출신의 왕으로 기록되었다. 이런 혈통의 치명적 약점은 선조의 재위기간 내내 그를 자유롭지 못한 신분으로 피해망상 속에서 헤매도록 했다. 넌 그들의 대화를 들었어야 했다. 황공하옵니다. 당장 영상을 불러야겠어. 선조가 독백처럼 중얼거리고 있을 때 내관 고명수가 문 밖에서 아뢰고 있었다. 영상께서 납시었나이다. 선조와 사헌부 지평 강두명의 눈빛이 교차 하였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서애 유성룡이 출현 하였다. 선조는 강두명에게 손을 흔들어 조용히 몸을 숨기라는 시늉을 했다. 강두명은 눈치가 빠른 자였다. 그는 즉각 용상의 뒤편으로 물러났다. 모셔라. 선조의 명이 떨어지자 궁녀들이 좌우에서 문을 열어주었다. 서애 유성룡은 안으로 들어서는 즉시 왕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신 유성룡, 상감마마를 뵈옵니다. 어서 오시구려. 마마에게 아뢰올 것이 있사와 입궐을 서둘렀나이다. 유성룡의 시선이 용상의 선조에게 향하였다. 마침 잘 되었소. 나 역시 궁금한 점이 있어서 영상을 보고자 했습니다. 어떤 분부이시옵니까
[그린경제=유광남 작가] 33번의 파루(罷漏)가 끝나기가 무섭게 그들이 은밀히 방문한 곳은 서애대감 댁이었습니다. 사헌부 지평 강두명은 황송하다는 듯이 어전(御殿)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정녕 영상을 만났단 말이냐? 선조는 눈을 부릅떴다. 그들의 발걸음이 북촌(北村=육조거리 주변의 고관대작들 저택이 주로 밀집)으로 향할 때부터 의심스러웠습니다. 그 외에 이상한 행동은 없었느냐? 강두명이 고개를 갸우뚱 했다. 이순신과 김충선이 길을 걷다 말고 땅바닥에 했던 낙서(落書)의 의도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그래서 보고를 올리지 않을 생각 이었으나 왕이 추궁하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한 가지 이상한 행동이 있었습니다. 말하라. 강두명은 그 날 새벽에 목격했던 그들의 행위를 고스란히 보고했다. 왜적과 여진족이라고? 그러하옵니다. 땅바닥에는 분명히 그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선조는 다시 물었다. 그들이 영상을 방문하여 오고갔던 대화를 들을 수는 없었겠지? 예. 그러하옵니다. 아쉽구나. 아직도 죄인의 신분을 벗지 못한 이순신이 영상을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했을꼬? 강두명은 이리저리 눈알을 굴렸다. 백의종군의 신분을 하루라도 빨리 벗겨 달라는 탄원이 아니겠습니까?
[그린경제=가람 기자] 춘향전의 배경지로 잘 알려진 광한루원(廣寒樓苑. 명승 제33호)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정원이다. 원래 광한루(보물 제281호)는 1419년 황희 정승이 남원으로 유배되어 왔을 때 광통루라는 작은 누각을 짓고 산수를 즐기던 곳이다. 이후 세종26년 (1444)에 하동 부원군 정인지가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를 본 따 "광한루"라 바꿔 부르게 되면서부터 광한루가 되었다고 한다. 그후 송강정철에 의해서 이상향의 세계인 월궁을 상상하며, 확장 한 것이 오늘날의 광한루 형태로 규모가 커졌다고 한다. 광한루에도 걸려있는 편액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철의 전라관찰사시절을 노래한 그의 시, “청풍명월”을 소개한다. 청풍명월속에.... 恢拓銀河弄明月(회척은하농명월) 栽培塢竹挹淸風(재배오죽읍청풍) 一年南國巡宣化(일년남국순선화) 只在淸風明月中(지재청풍명월중) 은하연못 크게 넓혀 밝은 달과 노닐고 둑위에 대를 심어 맑은 바람을 들였네 한해 남녁관찰사로 일할 적에 청풍명월속에서 지냈네.. 정철은 일 년여 동안 전라도관찰사로 재직하면서 밝은 달과 맑은 바람과 더불어 지냈다고 술회한다. 이 시는 정철이 남원
[그린경제=유광남 작가] 두 분 말입니다. 우리가? 김충선의 지적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일국의 왕이 보낸 감시자가 두 분을 면밀히 관찰 중이거늘 어째서 이리 태평하실 수 있는 것입니까? 왕의 저주가 정녕 두렵지 않으신 겁니까? 유성룡이 은근히 물었다. 자네는 상감과 독대를 하지 않았던가? 김충선은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이순신의 방면(放免)을 위해서 왕이 감추었던 이순신의 장계(狀啓)를 왕세자 광해군으로부터 찾아내어 선조와 담판을 지었었다. 김충선은 침중한 자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지요. 유성룡의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왔다. 왕이 어떠하시던가? 왕이 어떠했던가? 김충선은 잠시 선조를 생각했다. 왕권에 매달려서 그는 불안했고 초조 했으며 때로는 비굴했었다. 일국의 지도자라고 하기에 왕은 위엄이 존재하지 않았다. 신하에 대한 신뢰를 잃고 있었으며 백성들 역시 왕을 왕답게 여기지 않았다. 임진년의 전쟁으로 그는 왕의 권위를 상실하였다. 전쟁을 피해 백성들을 버리고 야반도주 했으며 명나라로 망명을 하고자 했었다. 그 시간에 이순신을 비롯한 권율, 정기룡, 곽재우 등은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항전 했으며 신립, 조헌, 김시민 등의 장수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