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가람 기자] 남원문화대학에서는 답사활동을 통하여 호남3대석물로 알려진 윤효손선생, 최상중선생, 최시옹 선생의 묘동을 답사하였다. ○문효공 윤효손(文孝公尹孝孫) 묘동 신도비 규모도 웅장하고 화려하다. -윤효손 신도비(국가보물 584호) 전남구례군 산동면 이평리 신도비는 조선시대의 신도비는 정2품 이상의 관직에 있는 사람 중 위업을 세웠거나, 학문이 뛰어나 후세에 모범이 될 때에 신도비를 세워 기리도록 하였다. 윤효손(1431~1503)은 단종 원년(1453)에 과거에 급제하여, 황해도 관찰사. 형조판서. 우참찬 등을 거쳐 좌참찬에 이르렀다. 성종때에는 경국대전 오례의주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연산군 9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는 '문효(文孝)' 이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거북받침돌은 앞발의 형태가 특이한데 보통 머리쪽을 향하고 있는 것에 비해, 이 앞발을 뒤로 구부려 발톱을 아래의 연꽃받침에 붙이고 있다. 머릿돌이 새겨진 용의 조각은 사실성이 뛰어나며, 꼭대기에는 둥근 돌을 얹어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비문에는 윤효손의 평생업적과 자손들의 계보 및 그의 충효와 인품을 기리는 글들이 적혀 있다. 조선 중종 1
이순신은 직설적인 대답을 회피하였다. 너무 늦은 것이냐? 그럴 리가 있습니까? 장군의 신념으로 시작되는 그 순간이 적기이옵니다. 이순신은 폐부 깊숙이 새벽 공기를 들이마셨다. 좋구나! 상쾌하다. 김충선은 이제 자신이 꿈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조선의 왕 선조를 상대로 이순신의 거사를 염원했던 그가 아니었던가. 막상 그것이 현실로 다가오자 정신이 몽롱한 기분이었다. 가슴이 벅차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했다. 두 개의 하늘에는 분명 두 개의 태양이 존재할 것이고 그것들은 버거울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또 이순신은 말하였다. 어쩌면 하나의 하늘이 더 개벽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김충선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바로 그 세 번째 하늘이었다. 대명제국(大明帝國)! 바로 조선의 주권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거대한 대륙. 그리되면 사대사상에 물들어 있는 조선은 혼돈의 역사로 함몰될 것이 틀림이 없었다. 삼국대전(三國大戰)인가? 조선과 일본의 임진년 전쟁은 이후 명나라의 참전으로 인하여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세력이 일본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치열한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위태로운 평화 협상이 진행되다가 기어코 근래 정유년에 일본으로부터 다
서애 대감입니까? 이순신은 웃지 않았다. 재미없구나. 잘 못 짚은 것입니까? 소인이? 너무 잘 맞춰서 즐겁지 않다는 뜻이었다. 김충선은 머리를 조아렸다. 조선의 왕 선조의 모함으로 34일 간을 체포 투옥 되었던 이순신은 방면된 첫 날 새벽 화두와도 같은 두 개의 하늘로 말문을 열었다. 두 개의 하늘을 새롭게 열어야 한다는 것은 젊은 김충선의 피를 끓게 만들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회(感懷)가 뜨겁게 피어올랐다. 두 개의 하늘은 조선과 일본이었다. 김충선이 그토록 소망하던 대업(大業)을 이순신은 자유의 몸이 되어 풀려난 이 새벽에 비로소 응답한 셈이었다. 그러나 또 하나의 하늘은? 세 개의 하늘이라? 김충선은 조선과 일본 외의 또 다른 나라를 지칭하는 이순신에 대하여 경이로움과 동시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면 백의종군 신분이 된 이순신은 어제의 이순신이 분명 아니었다. 나는 이제 결정하였다. 이순신은 홀가분한 모습이었다. 나머지 하나의 하늘까지 도모하고자 하신다면 그것은 너무 무모한 개벽이 아닐 런지요? 김충선은 조심스럽게 물었고 이순신은 빙그레 웃었다. 새 하늘을 열고자 하는 개벽은 본래 무모한 법이다. 하나의 하늘을 열기
충선아! 이순신의 부름에 젊은 조일인(朝日人) 김충선이 한 걸음에 달려와 엎드렸다. 하명하소서. 그러나 이순신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어떤 말들을 쏟아내야 하는 것일까. 이순신의 그런 신중함에 김충선 역시 결코 서둘지 않았다. 그는 추호의 흐트러짐 없이 이순신이 발아래 조용히 머물며 기다렸다. 내 꿈을 포기하고 싶지 않구나. 한 동안 침음하던 이순신이 내 뱉은 말이었다. 김충선은 그 순간 마치 흔적도 없는 사람처럼 호흡도, 움직임도 일체 멈춰져 버렸다. 이순신의 꿈이 어떤 것이었던가? 김충선이 도모하고자 했던 바로 그것이 아니었던가. 새로운 하늘을 열고자 하시옵니까? 김충선은 확인하듯 조용히 되물었다. 그래. 그러나 두 개의 하늘을 개벽해야만 새로운 하늘이 열려지게 되었으니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니겠느냐. 두 개의 하늘. 두 개의 나라. 세 개의 하늘이 아닌 것이 다행스럽지 않습니까? 김충선은 진지하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이순신이 무섭도록 진지하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세 개의 하늘일 수도. 그때서야 김충선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그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토해냈다. 일본과 조선 외에 하나가 더 추가 되었다. 등골에 소름이 식은땀과 함께
[그린경제=노정용 기자] 어떤 시골에서의 일이다. 삼대가 한집안에 사는데, 자작도 좀 있고 남의 논도 좀 부치고 지내건만 언제나 살림이 옹색하여 어른들 이마에 내천(川)자가 가실 날이 없다. 노상 찡그리고 있다는 얘기다. 어느 날 밤 역시 살림 어려운 걱정들을 하고 있으려니까, 열 살 남짓한 손자 놈이 엉뚱한 소리를 한다. 『우리 집엔 어른이 없어서 이 모양이여!』 듣다 못해 아비가 나무란다. 『이놈아! 할아버지가 계신데 그따위 소리를 해?』 『할아버진 어른자격 없어!』 『임마, 아비가 있는데 그러냐?』 이번엔 할아버지가 탓한다. 『아버지도 어른 자격 없어유』 『그럼 누가 어른 자격이 있니?』 『나나 할만 할까요. 다른 사람은 못할 거예요』 『그럼 네가 어른노릇 하렴』 『흥, 그렇게 밥알을 물고 새 새끼 부르듯 해서 어른 노릇이 되나요? 제대로 시켜야지』 『어떻게 하는 게 제대로 시키는 거냐?』 『도대체 어른이라는 것은 말발이 서야 하는 건데, 온 집안의 식구며 동네가 다 그렇게 알아야 할 거니까, 사당고유(가정이나 나라에서 큰일이 생겼을 때 사당이나 신명에게 고하는 것)를 하고 제대로 절차를 밟으세유』 그리하여 할아버지가 책력을 펴고 길일을 가리어 사당을
1권서 귀화 장수 김충선 앞세워 日진격 일왕 사로잡아 이순신, 임금이 아닌 백성들 위해 혁명 후 왕에 올랐어야 [그림경제=김영조 문화전문기자] 역사는 때론 수정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을 바꿔라! 조선을 바꿔라! 때를 놓치면 나라를 망칠 수도 있다! 작가는 이렇게 강조한다. 지난 2011년 ≪이순신의 반역≫ 1권을 내고 지난해 ≪사야가 김충선≫을 써서 세간의 관심을 모았던 유명작가 유광남과 만났다. - ≪이순신의 반역≫ 1권에서는 이순신이 사야가김충선을 앞세워 교토로 진격하여 천황을 사로잡는 것이 중요한 결말이다. 그런 극적 결말 뒤에도 독자들의 흥미를 끌만한 팩션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살짝 귀띔해줄 수 있을까? 1부를 읽은 독자들 가운데 꿈으로 끝나서 허망했다는 말을 하는 이도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2권에서는 꿈이 아닌, 이순신을 통해 역사를 바꾸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여기까지만 말 할 수 있음을 용서해 달라. ▲ 작가 유광남 - 실제 이순신이 반역과 혁명을 하지 못했다면 그건 이순신도 역시 성리학을 신봉하는 그래서 임금을 내칠 수 없는 그런 사람일 뿐이었기에 그런 것 아닐까? 이순신도 신분상으로는 그
하나...개벽(開闢)의 아침 새벽이었다. 그러나 그 날의 새벽은 여느 새벽과는 달랐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되지 않는 아득함이 존재했다. 이순신은 고단한 몸을 뒤척이지 않았다. 단지 그는 몸을 잔뜩 움츠리고 나직이 전방을 노려보았다. 이 새벽은 개벽(開闢)이로다. 꿈을 꾸었다. 아주 혹독한 한차례 폭풍과도 같은 꿈을 꾸었다. 조선에 참담함을 안겨 주었던 일본을 기습하고 천황을 사로잡았다. 자신을 모함하여 죽이려던 선조가 폐위되고 일본이 항복하였다. 조선의 왕조를 바꾸는 이순신의 반역이 모의 되었다. 그것은 모두 죄인의 신분으로 의금부 수옥(囚獄)에 감금되어 있을 때의 꿈이었다. 포기하고 싶지 않은 꿈이다! 이순신은 울컥 치솟아 오르는 노기를 삭혀야만 했다. 조선 천지가 일본의 야욕에 유린되어 셀 수 없는 사상자를 만들어 냈다. 그 뿐이랴. 조선으로 일본군을 따라 들어 온 노예상인들에 의해서 끌려간 남녀의 숫자는 확인이 불가능했다. 혹자는 오 만 명이라 했고 혹자는 이 십 만 명에 달한다고 했다. 그들 중에는 도예 기술로 이름 난 도공들이 있었고 철부지 어린 아이도 있었다. 부녀자들 또한 적지 않게 개처럼 끌려갔다. 그들은 일본상인들에 의해서 물건처럼 일본 전
[그린경제=강종성 이야기꾼]나는 어려서 과히 똘똘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잠이 많아, 저녁만 먹으면 세상 모르고 곯아 떨어져 자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다만 한 가지 옛날이야기를 좋아하여 얘기판 만 벌어지면 밤을 홀딱 밝히어도 졸릴 줄을 몰랐다. 그래 하도 얘기를 즐기니까, 우리 어머니께서 이런 얘기를 들려주셨다. 옛날에 한 소년이 있었는데, 어찌나 얘기를 즐기는지, 누가 옛날얘기만 하면 들어앉아서 극성맞게 베끼는 것이었다. 그래 이렇게 해서 베끼면, 안방 뒷문 밖에다 뒤웅박을 달아두고 차곡차곡 모으는 것인데, 그렇게 모은 것이 세 뒤웅박이나 되었다. 그런데 이 소년이 자라서 이제는 장가를 들게 되었다. 산 넘고 산 넘어 마을의 이쁜 색시에게 혼인을 정해 놓고 날짜까지 받아 그 날이 오기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는 들일이 바빠 아버지 어머니도 들판에 나가시고, 신랑은 글방에 가고, 하인들도 모두 논밭에 나가 집안엔 사람 그림자도 없었다. 그런데 마침 이 집 머슴하나가 연장을 가지러 집에 들어왔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안은 대낮이건만 밤중같이 고요하였다. 그런데 어디선가 도란도란 얘기소리가 들린다. (이상도 하다. 번연히 아무도 없을 텐데.) 머슴은 살금
우리나라 불교는 통일신라의 귀족중심의 교종불교에서 통일신라말 중국달마대사의 학풍을 이어받은 새로운 선종 9산선문이 도래하면서 남원실상산파의 실상사에서 처음으로 시도되었다. 이후 남원불교는 전국적으로 유명승려와 불자 일천여명이 몰려들면서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우게 되고 실상사를 중심으로 한 사찰들이 추가로 건립되면서 각종 석조문화재가 불사되는 등 새로운 불교문화를 주도하게 되면서 전국적인 불교성지화가 진행된다. 이렇게 남원지역은 그 과정 속에서 남원에 많이 분포되어있는 화강석에 불상부조화 작업의 결과물인 바위부처님 즉 마애불이 많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남원시대산면 신계리 마애여래좌상 우리지역의 마애불은 대부분 통일신라말기와 고려초기의 사회혼란시기에 조성되었다. 이는 마애불의 특성상 통일신라말과 후삼국 그리고 고려로의 재통합과정에서 어떤 형태로든 그 의미가 부여 되어있다는 것과도 상통한다. 또 부처님이 최초로 설법하실 때에 하신 손 모양으로 양손을 가슴까지 올려 엄지와 장지끝을 서로 맞댄 후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하여 펴진 마지막 두 손가락 끝을 오른쪽 손목에 대고,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향한 형태로 남원지역 마애불의 대부분이 수인형태에서 설법인(전법
[그린경제=김기섭 기자] 국내에는 수많은 외국의 리더십 이론들이 범람합니다만, 한결같이 우리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외국의 리더십이론이 이성과 논리를 강조한다면 우리는 감성과 직관을 더 소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외국의 리더십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녹아있는 한국형 리더십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게 중론입니다. 순천향대 관광경영학과 이영관 교수가 지은 조선의 리더십을 탐하라은 이 같은 현실비판과 대안을 제시한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저자는 역사적으로 가장 가깝고 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는 조선의 리더들을 한국형 리더십 차원에서 살펴보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조선을 만든 20여명의 리더십 조명 ▲ ≪조선의 리더십을 탐하라≫, 이영관, 이콘 출판 저자는 20여명의 조선시대 인물들을 '위기관리' '혁신', '심학(心學)', '여가생활' 등 네 개의 키워드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위기관리 편에서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18년 유배생활 속에서도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 제주도 유배라는 최악의 환경에서 추사체를 완성한 김정희의 리더십을 살핍니다.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 가서도 자신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