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이성호 기자] 축하드림니다. 깊은 산곡의 옹달샘 이미지가 떠오름니다. 많은 사람들이 변화가 지나쳐 모든 근본마저 없어질까 염려를 하고 있는 시기에 우리 민족의 긍지와 문화 전통을 위한 힘겨운 일을 시작하는 분들께 축하하며 아울러 고마운 인사드림니다. 그리움에 갈증 난 사람들에게 표주박으로 목 추기는 샘물이되기를 기원드림니다. 미국 LA 민족시인선양회 회장 이성호.
[그린경제=황명하 기자] 한국문화신문 얼레빗 창간을 축하드립니다. 우리민족의 얼과 바른역사, 언어,문화가 잘 반영되어 만인의 지침서 역할을 하는 유익한 신문이 되길 기대합니다. 호주 동포사회에도 귀 신문을 많이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재호주 광복회장 황명하 배상
[그린경제=유창 기자] 세상의 모든 아침에 얼레빗을 제일 먼저 찾게 되는 날이 왔습니다. 그동안 이메일을 통해 우리 문화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어, 주변 지인들에게도 아름다운 것을 많이 전달하곤 했었는데 이렇게 창간하게 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얼레빗으로 하루를 빗는 나날이 찾아왔습니다. 언제나 항상 하루를 열고 우리나라 국민이 즐겨 찾는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신문이 되기를 고대하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41호 예능보유자 유창
[그린경제=기외호 기자] 먹고 살기 숨가쁘고 청년실업ㆍ노후빈곤 자살 등등 문제투성이인 이 때에 웬 `매화타령`이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경제, 건설, 개발에 바빠 구석으로 밀어 둔 우리 것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찾아야 하고, 서구화라는 가치에 묻히고 도외시되었던 아름다운 우리네 전통과 문화를 찾아야 할 때다. '내 곁에서 사라진 것들'을 떠올려 본다. 저마다 곁에서 사라져 아련해진 추억이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산업화근대화도시화로 우리 대부분은 뿌리 잘린 나무처럼 살고 있다. 지니고 있던 물건을 잃어버리는 것도 아쉬운 일이지만 어머니의 품처럼 오랫동안 우리를 따뜻하게 했던 전통문화와 기억의 현장을 잃어버리는 것은 더 안타까운 일이다. '빨리빨리'와 '할 수 있다'의 신화에 사로잡혀 우리는 너무 많은 소중한 것을 너무 쉽게 우리 곁에서 떠나 보냈다. 한 나라의 국격은 경제력이나 국방력 등으로만 결정되지 않으며, 반드시 문화라는 부분을 주목하고 있다. 그리스가 유럽 공동체의 경제적 말썽꾸러기로 낙인 찍혔으나 결코 무시하지 않는 것은 찬란한 문화와 전통을 지니고, 그 문화의 혜택을 함께 공유한다고 느끼기 때문이요 프랑스, 영국, 독일이 존경 받는
[그린경제=유창 기자] 세상의 모든 아침에 얼레빗을 제일 먼저 찾게 되는 날이 왔습니다. 그동안 이메일을 통해 우리 문화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어, 주변 지인들에게도 아름다운 것을 많이 전달하곤 했었는데 이렇게 창간하게 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얼레빗으로 하루를 빗는 나날이 찾아왔습니다. 언제나 항상 하루를 열고 우리 나라 국민이 즐겨 찾는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신문이 되기를 고대하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서울시무형문화재 제41호(송서 ㆍ율창) 유창
'한국문화신문 얼레빗'의 창간을축하드립니다. 한국문화신문 얼레빗이 한국문화의 재발견과 성장의 밑거름이 되는 신문으로 성장하길 기원드립니다. 문화없는, 문화 아닌 것이 너무 판치는 세상에서 얼레빗이 올바른 한국문화의 원형과 전형을 제시해 주시고 바른 길잡이가 될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신문 발행과 함께 김영조 선생님 이윤옥 교수님 건강도 잘 챙기시고요.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대자보 편집국장 이창은 드림
[그린경제=김수업 기자] 21세기는 생태ㆍ평화ㆍ문화의 세기다. 사람이 욕심의 고삐를 놓쳐서 저질은 온갖 잘못을 뉘우치며 자연과 더불어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깨달음에 이르러 21세기를 맞았다. 우리에게도 이런 흐름에 발맞추는 여러 움직임이 일어난 가운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도 얼레빗으로 여는 하루로 새날을 알리더니 이제 또 세종대왕 오신 616돌에 맞추어 한국문화신문 얼레빗을 열었다. 이 땅에 생명의 문화를 일깨우는 큰 촛불이 되리라 믿는다. 진주문화연구소 이사장 김수업 (전 대구카톨릭대학교 총장)
[그린경제=가람 기자] 아막산성은 백제와 신라의 옛 성으로 상호 중요한 요새인데 수도 없는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백제에서는 아막성, 신라에서는 모산성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아막성은 1,500여년전의 산성으로서 성벽을 이루었던 석재들이 무너져 수북이 쌓여 있으며, 산 중턱에는 4~5m 높이의 돌기둥처럼 생긴 돌탑이 서있다. 금방 바람만 불어도 넘어갈 것처럼 보이지만 상당한 세월 넘어가지 않고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돌탑은 성 돌로 쌓은 데다 덩굴들이 탑을 감고 있어오랜 세월 버텨낸 것이다. 이 돌탑을 쌓은 것은아영이 고향인 박철수씨가 1967년 스무 살 새내기 때 아래 문성암에서 여름 한철을 보내면서 쌓은 것으로아침이면 일어나 새로운 대학생활과 삶의 꿈을 하나씩 돌덩이 싣고 쌓고 또 쌓았다고하니 더욱 놀라운일이다. 얼마전 TV 사극에서 삼국의 영토분쟁사를본 뒤 백제와 신라의 모산성(아막성)에 대한 얘기에 눈길이 갔다. 백제 무왕은 4만 병력으로 아막산성을 포위하니 신라왕 진평은 정예 기병을 보내 막아 싸웠다는 대목이다. 백제군은 신라군을 평지로 끌어내기 위해 패한 척 도주하여 매복했는데, 신라 장수 무은이 적의 도주를 쫒아 군사 1천
[그린경제=하늘땅사람 기자] 역사는 때론 수정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을 바꿔라! 조선을 바꿔라! 때를 놓치면 나라를 망칠 수도 있다! ▲ 소설 이순신의 반역 1부 이순신은 조선 역사에 가장 화려한 무훈을 빛낸 장군이다. 그의 난중일기는 인간으로서, 장수로서 모범 답안이다.그러나 이순신은 훌륭한 무장으로의 충성심은 높이 살 만하지만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는 불행한 선택을 하였다. 개인적으로 영웅이 되었을지 몰라도 이 나라와 백성에게는 직무유기를 한 셈이다. 이순신은 군사혁명을 단행했어야 했다. 그는 조선을 접수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일본으로 끌려간 수많은 포로들(5만~20만 추정)의 비참한 삶과 죽음을 위로할 수 있었으며, 이후 조선 왕이 청나라에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항복하는 꼴도 없었을 것이고, 수만 명의 조선 여인들이 중국으로 끌려가 성적 학대와 노리개로 전락하는 비극도 없었을 것이다. 이순신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조선의 충신으로, 전쟁의 영웅으로만 남아 있다. 과연 그는 단 한 번도 역성혁명의 꿈을 꾸어 본 적이 없는가? 이순신이 꿈꾸는 나라가 있었다. 백성이 편안하고 군대가 강한 나라! 요즘으로
[그린경제=가람기자] 변강쇠전 이야기는 이렇게 이루어 진다. 평안도 월경촌에 옹녀라는 여자가 있었다. 열 다섯에 시집가서 남편이 죽는데, 매년 계속 개가하나 매번 죽는다. 스무 살에도 남편이 죽자, 동네 남자들이 이 여자를 자꾸 범하는 일이 벌어져, 동네의 풍기가 문란해지자 결국 동네에서 쫒겨나고, 이어 청석골에서 변강쇠를 만나 궁합을 본 뒤 혼례를 치르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둘다 궁합이 잘 맞아 삼남지방을 유람하면서 변강쇠가 일은 아니하고 온갖 못된 짓을 일삼다 죽을병이 들게 된다. 이들은 어느 날 한 주막에서 지리산 뱀사골의 고로쇠물에 대한 소문을 듣고 뱀사골에 병을 치료하기 위해 들어와 고로쇠물을 마시며. 병을 치료하며 살았던 곳이 들독골이라고 전한다. 이후 병이 완쾌되자 거대한 바위를 들어 올리며. 힘자랑을 했다고 하며, 그 들독이 있다 해서 들독 골이라 한다. 병이 낳은 후 백장계곡에서 살게 된다. 게으름을 타고난 강쇠, 산속에 들어와서도 피둥피둥 놀기만 하여 땔꺼리 조차 없어, 하루는 옹녀가 나무를 해 오라 했다. 낮잠만 퍼잔 강쇠는 해질녘 길가의 장승을 뽑아 와서 땐다. 이 일로 전국의 장승들이 모여 회의를 한뒤, 변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