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지난 주 속풀이에서 묵계월은 왜소(矮小)한 용모에 외양을 가꾸지 않아 목소리로만 만나던 사람들은 그를 잘 알아보지 못했다는 이야기, 그래서 TV가 없던 시절 방송국 직원이 그를 알아보지 못해 난감해 하였다는 이야기, 민요를 부르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보낸 지난 날들의 보상으로 세종상을 비롯하여 국내의 큰 상을 받았고, 1974년에는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그의 소리에는 강약과 명암의 대비가 분명하고, 힘을 바탕으로 하는 역동미를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는 점, 다양한 창법이나 시김새를 동반하는 선율선에서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아름다운 곡선의 흐름이 남다르다는 점, 외양(外樣)을 화려하게 꾸미거나 즉흥적인 표현을 강조하기보다는 사설의 정확한 발음이나 발성 등의 기본기를 강조하였다는 점, 이러한 음악적 태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달이 되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그리고 오뉴월 모닥불도 쬐다 물러서면 섭섭한 법인데, 평생 지켜갈 수 있는 예능보유자의 명예를 스스로 내려놓은 아름다운 선례를 남긴 이야기 등도 하였다. 그렇다. 90이 넘고 스스로 몸을 가누기 어려워도 가족을 비롯한 주위사람들의 만류로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 속풀이에서는 묵계월 선생이 대명창이면서도 항상 연습시간을 충실히 지켰고, 누구보다도 먼저 나와 목을 풀고 있어서 연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점, 자기의 주장이나 목소리를 내지 않고 남을 먼저 배려하는 넓은 마음씨나 그 겸손한 태도가 젊은이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 그는 1965년도부터 각종 기획 공연들을 통해 경서도 소리의 높은 예술성을 발휘해 왔으며 이러한 활동들이 쌓이고 쌓여 경서도 소리의 저변을 확대하는 운동으로 이어졌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민요 전공자들이 생겨나면서 학문적 연구대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며 대도시의 문화원, 또는 사회단체, 초등학교를 비롯한 중, 고등학교에 국악강사가 파견되어 일선학교에서의 국악교육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묵계월의 제자들 가운데 임정란, 최근순, 유창 등은 경서도 소리극(京西道唱劇)을 무대에 올리기 시작하여 문화계에 주목을 받기도 했다는 이야기, 그래서 묵계월이 남기고 간 업적은 소리 그 자체뿐만이 아니라 공연, 소리극, 교육, 학문 등 각 영역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자리를 잡게 되어 오늘날 한국의 대표적인 예술이요 문화로 성장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등을 하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 속풀이에서는 묵계월 명창이 목이 좋거나, 운이 좋아서, 또는 선생을 잘 만나서 명창이 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끊임없는 노력과 훈련의 결과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20세 이전에 방송을 통해서 젊은 명창 묵계월의 이름은 온 나라에 퍼져 나갔다는 이야기, 노래뿐이 아니라 송서로 유명한 이문원의 삼설기(三說記)를 착실하게 배워 오늘에 이어준 고마운 존재라는 이야기, 송서는 다른 노래를 배우지 않고는 부르기 어려운 소리라는 점도 이야기하였다. 힘차면서도 구성진 묵계월 명창의 소리는 연습을 통해서 얻은 결과라는 이야기, 무엇보다도 묵계월의 소리속을 제대로 맛보려면 성음사에서 제작한 민요삼천리라는 음반을 들어 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 음반을 추천하는 이유는 죽헌 김기수(金琪洙)선생이 민요 반주를 위해 관현악으로 편곡하였는데 묵계월의 노래와 반주음악, 합창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우리민요의 멋과 특징을 그대로 표출하고 있는 명반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경기창은 묵계월과 김옥심(金玉心)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고, 남도창은 성창순, 성우향, 한농선, 오정숙, 남해성 등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우리가 흔히 경기소리의 계보를 이야기 할 때, 추, 조, 박을 화두로 삼는다. 추는 추교신(秋敎信), 조는 조기준(曹基俊), 박은 박춘경(朴春景)이라는 명창이다. 추교신의 소리는 장계춘을 거쳐 최경식에게 전해졌고, 최경식의 소리는 최정식을 비롯하여 이창배, 유개동, 박인섭, 김태봉, 정득만, 김순태 등으로 이어졌다. 이창배의 문하에서 최창남을 비롯한 황용주, 박상옥, 백영춘, 임정란, 이춘희, 김금숙, 김혜란, 김국진, 김영임, 이호연, 최영숙 등 현존 한국의 유명 경기명창들이 대거 배출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목청이 좋고 소리 잘하는 사람이 예능보유자(세칭-인간문화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소리의 전승과정이 충실하고 원형에 얼마나 충실한가 하는 점이 관건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연주자에겐 악기가 좋아야 하듯, 특히 경서도 소리는 아름다운 목청이 기본인데, 묵계월의 목청은 시원시원하고 힘차며 맑고 아름다워 하늘이 낸 목이라 하였다. 목청뿐이 아니라 넓은 음폭(音幅)을 지니고 있으며 그 위에 끊임없는 훈련과 반복 연습의 생활화가 묵계월을 명창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 등을 했다. 주수봉 선생에게 소리를 배우고 있던 묵계월은 어린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지난 주 속풀이에서는 묵계월이 소리를 배우기 위해 주수봉(朱壽奉)에게 찾아갔고, 2년 후에, 주 명창은 남다른 소질을 보이는 그녀를 최정식(崔貞植)에게 보냈다는 이야기, 최정식은 금강산타령, 풍등가 등을 작사, 작곡한 당대 속요(俗謠)계를 주름잡던 거성이었다는 이야기, 소질이 있고 재주가 있는 제자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폐습이 잔존해 있는 것이 이 바닥의 일반적인 생리이거늘, 자기가 아끼는 제자를 큰 선생에게 보내주는 주수봉이라는 명창의 넓은 마음이나 결단도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최정식의 스승은 아호가 학강(鶴崗)인 최경식 명창이었는데 당대 대명창으로 그에게 배우지 않은 사범급 명창이 없을 정도였으며 제자들에게 결코 월사금을 받지 않은 사범으로 유명했다는 이야기, 학강의 제자로는 최정식, 유개동, 박인섭, 김태봉, 김순태, 정득만, 이창배 등이 있지만, 선생 앞에 오랫동안 소리를 배워서 선생의 뒤를 이은 명창이 바로 벽파 이창배 사범이라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그러므로 주수봉을 통해 묵계월이 만나게 된 최정식은 당대 최고의 학강 선생의 제자였고, 학강은 그 윗대의 장계춘, 그리고 그 윗대의 추교신으로 이어진 경기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지난주 속풀이에서는 1910~20년대에는 《증보신구잡가(增補新舊雜歌)》를 비롯하여 《고금잡가편(古今雜歌編)》 등 많은 종류의 노래 사설 모음집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 내용은 가곡이나 가사, 시조와 같은 노래뿐 아니라 오늘날 민속음악으로 분류되고 있는 각 지방의 소리들, 예를 들면 초한가(楚漢歌)를 비롯한 서도지방의 소리, 육자배기를 비롯한 남도의 소리, 그리고 서울이나 경기지방의 긴 좌창, 앞산타령이나 뒷산타령과 같은 선소리, 그 외의 일반 민요, 단가(短歌)나 회심곡, 병창 등 성악의 전 장르를 망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러한 노래들이 하나의 노래책 속에 들어 있기에 책 이름도여러 노래의 모음집이란 뜻의 잡가(雜歌)로 명명한 것이라는 이야기, 절대 노래 자체가 잡스럽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란 점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명칭은 경기소리꾼들이 자신들의 소리를 스스로 낮추어 부른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이창배의 《한국가창대계》에서도 12잡가, 휘몰이잡가, 입창이나 송서, 각 지방의 민요 등으로 구분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또 경기잡가뿐 아니라 기악의 산조음악도 한때는 헛튼가락,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2014년 봄, 이은관 명창에 이이 경기민요의 예능보유자 묵계월 명창도 떠났다. 그는 이 시대 가장 널리 알려진 여류 경기명창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94살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서울의 12좌창(坐唱)으로 예능보유자가 되었는데, 그가 즐겨 부른 좌창을 잡가(雜歌), 또는 긴잡가라 부르고 있으며 이러한 노래들을 좌창(坐唱)이라고 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 연창하는 형태가 단정하게 앉아 조용하게 부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점을 이야기했다. 양반들이 부르던 노래를 정가(正歌)라고 통칭하는데 반해, 일반 대중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는 민속가(民俗歌), 또는 속가(俗歌)라고 불렀고 이러한 민속가를 통칭 잡가(雜歌)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는데, 잡(雜)이란 의미는 원래 순수한 것이 아닌, 뭔가 뒤섞여 있는 것, 장황하고 번거롭다는 뜻인데 노래분위기와 맞지 않는다 점, 특히 1910년대 이후 쏟아져 나온 각종 노래 사설집의 이름을 잡가집이라 한 것은 각 지방의 민요나 특징있는 노래들을 망라해서 싣고 있다는 의미, 그래서 잡가의 잡은 여러 장르의 노래들이 섞여있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19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속풀이 165에서부터 지난주까지는 배뱅이굿의 고 이은관 명창의 이야기를 하였다. 강원도 이천에서 태어나 소리를 좋아했고, 10대 후반에 철원에서 열린 노래자랑에 참여해 대상을 받았으며 그로 인해 황해도로 본격적인 소리공부를 하러 갔다는 이야기, 이인수 선생에게 공부를 한 뒤, 젊은 나이에 장현 권번의 소리선생이 되었다는 이야기, 서울로 와서는 신불출의 일행이 되어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으며 서양악기도 배우고 영화출연도 했으며 6, 25때 서양의 5선 악보 읽는 법을 배워 그때부터 작곡이나 편곡을 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서도소리 예능 보유자가 뒤늦게 되어 후진 양성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독보 능력이 있어서 서도소리의 불규칙장단을 여러 사람이 함께 합창이 가능하도록 장단화 했다는 이야기, 그 외에 건강관리를 잘 하였으며 옳은 지적에는 겸손하게 귀를 귀울이는 명창이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창작곡 및 신민요, 서도 민요와 좌창, 서도입창, 경기민요와 좌창, 각 지방의 민요, 배뱅이굿, 배비장타령, 이춘풍전, 장한몽, 정선의 애화 등의 가사집과 창작소리를 작곡한 내용들을 묶은『가창총보』라는 악보집에 관한 이야기 등을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 속풀이에서는 이은관 선생과 생전에 나누었던 대화 중, 인상에 남는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이은관이 소리꾼으로서의 목(성대)을 타고 났기에 그토록 지존의 자리를 오랫동안 지켜 왔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그 뒤에는 누구도 따르지 못하는 후천적 노력이 있었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뿐만이 아니라 규칙적인 생활로 건강을 지켜 온 점과 상대의 조언에 경청하는 겸손한 마음가짐의 소유자라는 점도 그를 지존의 자리에 오래도록 머물게 했던 원인이라고 하였다. 그의 겸손을 알게 하는 다음과 같은 경험담 중에서 배뱅이굿 속에 3정승이 각각 한 집은 딸, 또 한 집은 계집아이, 그리고 다른 한 집은 여자아이를 낳게 된 배경을 신수가 불길하여로 부르고 있는데, 이를 신수가 대통하여로 바꾸어 부를 것과 다른 하나는 이 명창이 무대에서 장고 돌리기 쇼를 만류시킨 경험이다. 참으로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가까운 친구라도 무대 위에서 보여줄 것을 준비하고 있는 출연자에게 이래라, 저래나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천하의 이은관을 상대로 그것이 아무리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동원한다고 해도 무대 위에서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배뱅이굿이 어느 지방의 소리이고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를 확실하게 알려주고 이은관 명창은 우리곁을 떠나갔다. 그를 뛰어넘는 제자는 차치하고라도 이은관 정도의 제자라도 나와야 배뱅이굿이 앞으로도 대중의 사랑을 받을 것인데, 이점 또한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지난 주까지 무대공연을 비롯하여 음반제작, 라디오 방송이나 TV, 영화출연, 해외 공연, 전수교육, 신민요의 작사 작곡, 창작 소리극의 제작, 등 개략적이긴 하나 이은관의 활동상황을 짚어 보았다. 우리가 국악인 중에 가장 오래도록 인기를 누린 대표적인 분으로 이은관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 까닭 가운데 하나는 이은관 선생이야말로 진정 서도소리를 사랑한 명창이기 때문이다. 그의 스승 김인수도 그랬고, 많은 서도소리꾼들이 그랬던 것처럼 서도소리 속에 들어있는 남도소리를 그는 대부분 서도소리로 고쳐 불렀던 것이다. 서도소리는 서도의 창법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해 왔고, 앞으로도 서도소리제로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 왔던 것이다. 그 결과 이제 서도소리는 경기소리의 한 변방이 아니란 점도 확실하게 인식시켜 놓은 것이다. 평생을 배뱅이굿과 함께 해오면서 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