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 이윤옥 기자] 오늘은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에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날이다. 리히터 지진계로 7.9도를 기록한 이날의 대지진을 일본에서는 관동대진재(関東大震災)라 부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 날을 조선인 관동대학살의 날로 기억한다. ▲ 조선인이 방화를 일삼고 폭동을 일으킨다는 오사카신문 호외.1923.9.3 90년이 지난 지금 왜 우리는 이 날을 기억해야 하는가? 아니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그간 관동대지진 때 희생된 조선인 사망자 수는 6천여명으로추정된다. 하지만문헌에 따라 1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등 정확한 숫자 파악이 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강효숙 원광대 사학과 교수는 지난23일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열린 관동대지진 90년을 맞아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사건에서 당시 학살된 조선인 수는 공식 기록보다 3.4배나 많은 2만 3,058명에 이른다는 독일 외무성의 사료를 들어 밝혔다. 뿐만 아니라 도쿄대공습 때 희생된 조선인 수도 41,000여 명에 이르는 등 관동대지진과 도쿄대공습으로 희생당한 조선인 수는 상상을 초월하는 숫자다. 이들 희생자들 중 일부는 여름철 불꽃놀이로 유명한 스미다가와구 요코즈나
[그린경제 = 이한꽃 기자] 인천신사(仁川神社) 가 있던 곳을 찾아 가던 날은 8월 더위가 막바지에 달하던 때라 몹시 더웠다. 일본인 작가 도다이쿠코(도서출판 토향 대표)씨는 무더운 더위임에도 인천신사가 있던 곳을 안내해주었다. 신사가 위치한 자리는 지금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가 들어서 있는 자리였다.(인천광역시 중구 인중로 146번지) 먼저 학교 정문 입구 언저리에 차를 세우자마자 담장 쪽으로 걸어가던 도다이쿠코 씨는 한 오십 보 정도 걸어간 곳쯤에서 멈추어 서서 학교 담장을 가리켰다. 올려다보니 그곳에는 신사 앞에 놓였던 돌이 담장 마감 재료로 쓰고 있는 현장이었다. 일부 시멘트 부분 끝자락에 잇대어 있어 확연히 알 수 있지만 무심코 지나가면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담장을 둘러 본 뒤 우리는 교문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을 다 오르니 인천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일 만큼 전망이 좋았다. ▲ 인천신사 모습 ▲ 신사 입구를 알리는 도리이 일제는 조선에 신사를 세울 때 남산신궁처럼 그 지역에서 전망이 가장 좋고 신성하다고 여기는 곳에 신사 터를 잡았다. 인천신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본관 앞에 나란히 서 있는 1개의 석등과 2개의 도리이
[그린경제=이규봉 교수]7월 1일이다. 갈 길이 멀어 일찍 호텔을 나섰다. 앞을 바라보니 굉장히 높은 산이 앞을 가린다.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이다. 저걸 어떻게 넘어? 걱정도 잠시, 길가에 식당이 보이기에 아침을 길에서 먹었다. 쌀국수도 있고 밀가루 덩어리인 꽃빵에 역시 밀가루로 만든 전(일명 부치기)도 있었다. 전은 꼭 우리의 그것과 같았다. 그러나 그 흔한 밥이나 장준하 일행이 그렇게 좋아했던 두부탕은 없었다. 뜨거운 물이 있기에 중국에서는 찾기 힘든 인스턴트커피를 우리는 타 마실 수 있었다. ▲ 우리가 오늘 넘어야 할 산이다. ▲ 쌀국수, 꽃빵, 전으로 아침을 먹다. 그 흔한 밥은 없다.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라오허커우를 떠난 장준하 일행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 계곡을 지나고 절벽을 오르면서 파촉령을 올랐다. 엿새째 고원지대를 향해 오르고 있을 때 호랑이가 바로 앞에 나타났다가 가버렸다고 한다. 파촉령은 고원지대라 그곳에도 사람들이 살아 일정 거리마다 주막이 있어 배고픔을 달래 수 있었다. 겨울이라 고원에는 온통 눈으로 쌓여 있었다. 한파 속에 눈 위를 걷다 그 날 묵을 예정이었던 주막이 나오기도 전에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그린경제 = 이나미 기자]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백범 김구 선생님! 얼마 전 [백범일지]를 읽고, 세상 사람들이 선생을겨레의 스승'으로 부르는 이유를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제게 민족을 일깨워주신 큰 스승입니다. 선생님께 몇 자 글을 올립니다. 예부터 영웅은 난세에 태어나고, 어지러운 세상이 영웅을 부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선생이 태어난 1876년은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으로 외세에 의한 본격적인 문호개방의 압박을 받기 시작한 때였고, 대내적으로는 장기간 지속되어온 세도정치의 폐단과 신분질서의 붕괴로 혼
[그린경제=이규봉 교수] 지도에서 살펴본바 이제 평지는 거의 끝났다. 이 말은 이제 지루함도 거의 다 끝났다는 뜻이다. 자전거 타는 사람들에게 끝도 없이 긴 평지는 인기가 없다. 너무 지루하기 때문이다. 기어를 조정할 일도 별로 없고 속도도 고만고만하다. 지금까지 우리가 달린 속도는 시간 당 최저 15킬로미터에서 최고 30킬로미터 정도로 도로의 질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장준하 일행이 넘어간 높디높은 파촉령을 넘어가야 한다. 파촉령을 넘는 길은 하도 높아 예전엔 없다가 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일본군에 쫓겨 충칭(重慶)으로 수도를 옮겨가면서 군사적 필요에 의해 생겼다고 한다. 이 길은 당시 전방과 후방을 연결하는 유일한 길이였다. 그들은 산을 걸어 올라갔지만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넘을 것이다. 억! 저 변소를 이용하라고? 장준하 일행이 추운 겨울 출발한 것과 달리 우리는 한참 더운 6월 30일 라오허커우를 떠났다. 호텔에서부터 35킬로미터까지는 평지가 계속 이어졌다. 본격적으로 산을 오르기 전에 초입에 있는 슈퍼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마실 물을 준비하기 위해 멈추었다. 화장실을 물어보자 슈퍼 주인이 앞을 가르킨다. 슈퍼 바로 건
[그린경제 = 이한꽃 기자] 남원신사를 찾아가는 길에 이도령과 춘향의 사랑이 얽혀있는 광한루를 들렀다. 연못에서는 팔뚝만한 잉어들이 퍼덕 거렸고 광한루 안에 늘어진 버드나무는 운치를 더했다. 서울에서 내려간 나를 위해 지인 몇이 나와 광한루 구석구석을 구경 시켜주었지만 내 눈에는 요천강 언덕 위 오두커니 서있는 금수정 쪽으로 자꾸만 눈이 갔다. 광한루를 대충 둘러보고 우리는 승사교를 건너 노암동이라는 커다란 돌 표지석이 버티고 있는 곳으로 갔다. ▲ 1936년 당시의 남원신사 ▲ 남원 신사 입구 바로 오른쪽으로 돌계단이 층층이 나 있었는데 이 계단 위가 바로 남원신사가 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에 들어선 신사는 남산의 조선신궁 처럼 그 지역에서 가장 전망이 좋고 신성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남원 신사 역시 광한루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절경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거친 숨을 내쉬며 돌계단을 오르니 널찍한 공간이 나오는데 지금은 테니스장이 들어선 자리가 남원신사가 들어앉았던 자리다. 남원신사는 1936년 10월 25일 건립한 것으로 모시던 주신은 천조대신(天照大神)과 명치천황(明治天皇)의 혼백이다. 당시 전라북도에는 남원신사를 포함하여 전주신사,
[그린경제=현용운 회장] ▲ 청학생수기지봉사센터에 평양서 내려와 도와주는 미술대학 교수님 과 동료, 제자들 ▲ 산에 와서 산을 지하에다 그리는 사람들, 참 명화가들이였다. 3일 동안에 그린 장식용 대형 그림이다. ▲ 생수공장 한켠 ▲ 공장건너편 료양원 안의 생수터 ▲ 료양원 안에서 ▲ 구수한 함경도 6진 방언으로 통하던 료양원 부기(회계를 부기라고 함) 지금 말 같지 않은 말을 구사하는 연변 나그네를 무색하게 하는 함경도의 오염 없는 사투리 맛이 그곳의 물맛처럼 좋았다, 말씀이 오염되지 않어 좋았다.어디서 왔슴둥? 잘 갑소.형님이꾸마 ▲ 우리도 한우(조선 쇠꾸마)입니더. 연변 황소, 한국의 한우와 같은 족속임 ▲ 김파는 무엇을 구상하는지, 나의 안내에 무척 신경을 썼다 된감기를 라진에 가서 평양의대 박사님의 치료로 감기를 단 돈50원에 뗀 셈 ▲ 권하 통상구로 돌아오는 다리에서 ▲ 저녘에 집에 오니 꽃들이 활짝 반긴다. 라진을 방문하고 맺는 말 아, 왜서8년 동안이나 가지 않았던가, 실북 나들이하듯 다니던 곳인데 라진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찬바람에 경색된 개성과는 판판 달랐다. 라진에서의 사람들은 활보(闊步)로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나는 학살 현장인 사할린의 설원에 서게 되면 일본인이 저지른 뿌리 깊은 원죄를 뼈저리게 느낀다. 일본이 양심이 있다면 강제연행한 조선인을 맨 먼저 귀국시켜야 했다. 그런데 일본인만 후송하고 조선인은 내버려둔 것이다. 이렇게 비인간적인 행위가 용서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일본인 하야시에이다이 씨의 격앙된 ‘일본사죄론’이다. 이 말은 비단 사할린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니며 2013년 현재 남아있는 60만 재일조선인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말이다. 지난 2010년 8월 15일은 광복 65주년이었고 같은 해 8월 29일은 경술국치 100년을 맞았었다. 그래서 우리는 “경술국치 100년, 한일평화를 여는 역사기행” 답사단을 꾸려 조선인들의 강제노동 현장인 기타큐슈의 치쿠호 탄광을 시작으로 시모노세키, 오사카, 교토에 이어 도쿄의 야스쿠니 반대 행사가 있던 히비야공원까지 장장 1,200킬로 거리를 12일에 걸쳐 돌아보았다. 이 글은 그때의 기록이지만 현재의 상황이기도 하다. 올해 68주년 광복을 맞아조선인강제연행 궤적을 쫓아갔던 기록을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설명- 답사 마지막 코스인 도쿄 야스쿠니신사(이하 야스쿠니)로 가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일제강점기 일본의 탄광에서, 비행장 건설현장에서, 군수공장에서 힘겨운 노역을 하던 한국인들은 8월 15일 감격의 해방을 맞아 꿈에도 그리던 고국행 배에 올랐다. 한국인 7,000여 명은 해방되던 1945년 8월 22일 우키시마호(浮島丸)를 타고 일본 북동부의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을 출발해 부산항으로 향했다. 그러나 돌연 이 배는 교토 앞바다 마이즈루항으로 기항을 시도했고 1945년 8월 24일 오후 5시20분 ‘우키시마호’는 폭침되고 말았다. 고향땅을 밟기도 전에 승선했던 수많은 조선인들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진실로 참혹한 사건이지만 국내에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 추모제날 살풀이 춤 (주일한국교육원제공) 당시 승선자 7,000여 명 중 4,000여 명이 교토 마이즈루항 앞바다에 수장 된 지 올해로 68년을 맞이한다. 사건 발생 1주일 만에 우키시마호의 도리우미 함장은 사건전모를 발표하고 조선인 3,735명 중 524명과 일본인 25명을 합해 총 549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승선장부가 없는 상황에서 일본측의 이런 숫자는 무의미한 것으로 아직 이 사건의 정확한 전모는 알 수 없다고
[그린경제=이규봉 교수] 난양은 매우 큰 도시이다. 시내 곳곳에는 높은 빌딩들이 숲을 이루어 있고 아파트도 참 많다. 쉬저우를 출발해 지금까지 보아온 중국은 도시와 농촌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지역이 개발되고 있었다. 땅은 파헤쳐졌고 건물은 하늘로 치솟고 결과적으로 모든 화장실은 수세식일 수밖에 없다. 시골에서 간간히 보아온 그들의 화장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지저분했지만 점차 재래식은 사라지고 대부분 수세식으로 바뀔 것이다. 그 많은 사람이 살 집이 모두 수세식으로 바뀐다면 화장실에서만 이용하는 물의 양 조차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그 많은 물을 어디서 공급할까? 화학비료의 공급으로 인분의 재활용은 줄어가는데 그 많은 인분을 다시 정화하기 위해서 필요한 물과 화학물질을 생각하면, 비록 우리나라가 아니라 하더라도 엄청나게 큰 이웃한 나라임을 생각할 때 참으로 걱정되는 일이다. 이념을 초월한 이종인역사박물관 ▲ 배낭 뒤에 자전거 여행의 목적을 알리는 펼침막을 달았다. 난양에서 라오허커우(老河口)까지는 예상보다 훨씬 그 거리가 짧았다. 내가 받아 본 자료에 따르면 도중에 하루를 묵어야 할 정도로 먼 거리였으나 실제 거리는 120킬로미터 정도였다.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