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아홉째인 “망종(芒種)”입니다. 망종이란 벼, 보리 같이 수염이 있는 까끄라기 곡식의 씨앗을 뿌려야 할 적당한 때라는 뜻이지요. 이때는 모내기와 보리 베기에 바쁜 때로 “발등에 오줌 싼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입니다. 이때 우리나라에는 비가 오지 않아 논과 밭 모두 바싹바싹 타들어 가기도 하는데 그 탓에 백성들은 많은 고생을 했고 임금까지 나서서 기우제를 지내야 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기우제”가 무려 3,122건이나 나올 정도입니다. 기우제를 지내는 것은 먼저 산 위에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놓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는 산에서 불을 놓으면 타는 소리가 천둥 치는 소리같이 난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며, 연기를 통해 하늘에 간절함을 전한다고 합니다. 또 신을 모독하거나 화나게 하여 강압적으로 비를 오게 하기도 합니다. 이때 쓰는 부정물은 개, 돼지의 피나 똥오줌이 주로 쓰이지요. 전라도 지방에서는 마을 여인네들이 모두 산에 올라가 일제히 오줌을 누면서 비를 빌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짚으로 용의 모양을 만들어 두들기거나 끌고 다니면서 비구름을 토하라고 하기도 하고요. 또 다른 방법으로는 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임금이 명하여 단오의 영상시(迎祥詩, 나라에 기쁜 일이 있을 때 짓는 시)를 그치도록 하였다. 그때 단오가 가까워졌으므로 승정원에서 세규(歲規)에 의하여 제술관(製述官)을 뽑아서 아뢰고 대제학 주문신(主文臣)을 불러 운자(韻字)을 내어 과거에 문제 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가뭄 피해가 이러하니, 이번에는 시문을 지어 올리지 말게 하라." 하였다. 위는 《숙종실록》 61권, 숙종 44년(1718년) 5월 1일 기록으로 숙종은 가뭄이 심하므로 과거를 열어 시문을 지어 올리지 않도록 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조선시대 임금은 이렇게 가뭄뿐만이 아니라 물난리가 나고 벼락이 치고, 돌림병이 도는 등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임금이 부덕하여 이런 재난이 생긴다고 하여 과거에서 시문을 짓는 것도 못 하게 하는 것은 물론 감선(임금이 근신하는 뜻에서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를 줄이는 일) 하거나 초가에서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벼락”으로 검색하면 무려 1,239건이 나오는데 거의가 “아무 데서 아무개가 벼락을 맞았다.”입니다. 《세종실록》 세종 15년(1433년) 3월 13일에 보면 “삼각산의 소나무와 산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조선시대의 나라 살림은 농업에 의존하는 바가 컸다. 세계적으로도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인류는 농사나 축산에 의지하는 바가 컸다. 이후 서양은 산업혁명 이후 기술발전에 따른 통상이 활발해지게 되었고 동양은 세계사적으로 뒤처지는 역사를 맞게 되었다. 왕권제도 시대에 세종은 재해가 일어나거나 농사가 어려워지거나 먹고 사는 민생이 어려워졌을 때인 ‘민생가려’의 경우 어떻게 대처했는지 살펴보자. 평시에는 논과 밭을 새로 일구고 저수지 등을 확충하여 경기도를 빼고서도 태종 4년(1404)에서 25년 뒤인 세종 초기 때 642,352결이 늘어나 그 증폭이 배에 이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호수와 사람도 각기 27,607호, 319,339구가 늘어났다. 이와 같은 밭과 호수와 사람의 증가는 토지의 개간, 인구 자연증가의 영향도 있겠지만, 불과 25년 만에 거의 배에 달하는 토지의 개간과 호구에서 자연증가가 가능했다고 믿기지 않는다. 이것은 곧 나라가 직접 지배하는 토지의 증가 ‧ 호구의 증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곧 이러한 증가는 조선왕조의 건국 이후 추진되었던 집권적 통제 체제가 확립되어 가는 과정에서 나라의 수세지(收稅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영남 백성의 일을 봉명사신(奉命使臣, 임금의 명을 받드는 신하)인 승선(承宣)에게 자세히 물은 뒤 연석(筵席, 신하가 임금의 자문에 응답하던 자리)을 물러 나와 촛불을 켜고는 관상감이 올린 상소를 보고서야 비로소 희미하게 천둥소리가 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끊임없이 천지신명에 답하는 정성을 간직하고 있었던들 놀라운 천재지변이 신하를 접견하는 때에 있었다 하더라도 어찌 혹시라도 듣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가운데 줄임) 이렇듯 듣고서도 듣지 못하다니 공경하는 마음을 제대로 지니지 못한 나 자신을 살펴볼 때 모든 조처와 행동에 있어 이르는 곳마다 법도에 맞지 않음을 더욱 알겠다.“ 이는 《정조실록》 49권, 정조 22년(1798년) 10월 5일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천둥소리가 나자 정조 임금은 나라에 변고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더욱이 그를 직접 듣지 못하고 상소를 보고 알았다는 것을 자책하며 임금이 친히 근신하는 뜻으로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를 줄이도록 명했습니다. 또 성종은 가뭄이 들어 오랫동안 감선했는데, 거기에 더해 낮에 물을 만 밥을 올리도록 하자 신하들이 ”보통 사람들도 지라와 위장이 찬 것을 싫어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