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진경 문화평론가] 검무(劍舞)는 단순한 춤이 아니다. 칼이라는 무구를 들고 춘다는 점에서, 이 춤은 인간의 생존과 권력, 그리고 의례와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다. 그래서인지 검무의 기원을 하나의 사건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그러나 실제 전승의 흐름을 따라가 보면, 검무는 단일한 출발점에서 비롯된 춤이라기보다 여러 시대와 문화가 겹겹이 쌓이며 형성된 결과에 가깝다. 최근의 논의는 이러한 점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한 학술 발표에서 한국전통음악학회 서한범 회장은 검무의 기원을 ‘항장무’와 연결지어 설명하였다(우리문화신문, 2026. 3.20). 항장무는 중국 《사기》 「항우본기」의 홍문지연 서사를 바탕으로, 조선 후기 평안도 지역에서 잡극 형태로 유행하다가 궁중 정재로까지 수용된 춤으로 알려져 있다(손선숙, 2023). 한편 국가무형유산 제15호 북청사자놀음 동선본 전승교육사는 북청사자놀이 전승 과정에서 항장무 계열로 해석될 수 있는 음악이 전승자 없이 음악적 형태로만 남아 전해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전경욱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북청사자놀이에는 칼춤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초장ㆍ중장ㆍ종장으로 나뉘어 점차 속도가 빨라지는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조선시대 정궁인 창덕궁의 후원에 가면 가장 유명한 주합루 뒷편으로 연경당이란 건축물이 나온다. 후원의 경사진 지형의 한가운데 평평하게 조성된 양반가 같은 이 건축은 조선의 23대 왕인 순조(1800~1834)의 큰아들 효명세자(1809~1830)가 지은 것이라는 설명을 접한다. 사랑채ㆍ안채ㆍ행랑채ㆍ재·후원ㆍ정자ㆍ연못 등을 갖춘 주택 건축이다. 효명세자는 3살 때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18살 되던 해부터 왕위 계승을 위한 대리청정을 하던 중 3년 3달 만에 갑작스럽게 승하해 왕위에는 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효명은 당시 안동 김씨 세도정치 세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아버지 순조를 도와 왕권을 강화하려 노력했다. 외가인 안동 김씨 세력을 배척하고 인재를 널리 등용했으며 백성을 위한 정책 구현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역대 세자 가운데 예술문화 방면에 가장 관심이 많았고 특별히 춤사위를 즐겼기에 궁중 정재(呈才)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다양한 궁중 춤을 창작했다. 샘 솟는 예술적 상상력과 춤에 대한 애정으로 조선 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춤의 시대를 열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효명세자는 우리의 문화예술사 차원에서는 참으로 아까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