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윤석열과 김건희 뒤에는 이들의 앞날을 예언해 주는 도사들이 있었다고 하지요? 특히 김건희는 윤석열과 혼인하기 전부터 점술에 취해있었던 것 같습니다. 12.3 불법계엄도 김건희가 날짜를 택했다는 설이 있지요. 주말에 비상계엄을 선포했으면 지역구에 내려가 있는 국회의원들이 많을 거라 그렇게 신속하게 국회에 모이지 못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왜 굳이 화요일에 비상계엄을 선포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지요. 어떤 이는 명태균이 더 큰 것 터뜨리기 전에 계엄을 선포한 것이라는 설을 얘기하기도 하는데, 그보다는 김건희가 도사들에게 길일을 잡게 한 것이 12월 3일이라는 설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이렇게 김건희가 점술에 빠져있었다는 얘기를 듣다 보니, 민비와 무당 박창렬이 생각납니다. 임오군란이 터졌을 때, 민비는 충주로 도망갔습니다. 충주시 노은면 가신리 국망산 아래 이시영의 집에 숨어 살던 민비는 ‘언제나 환궁할 수 있을까?’ 답답해하며 하루하루를 보냈겠지요. 이때 알게 된 이가 무당 박창렬입니다. 이름이 남자 같은데 박수가 아닌 무당이니 여자입니다. 박창렬은 일찍 과부가 된 뒤 자신은 관왕(관우)의 신 내린 딸이라며 관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민기 원년 4월 4일 내란 우두머리 파면 선고가 천하를 울릴 때 나는 박규수(朴珪壽 1807-1877)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연암 박지원의 친손자다. 삶의 마지막 기간을 오늘날 헌법재판소 경내의 백송나무 자리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가 환생하여 북을 치고 경을 치는 것을 우리는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헌법 재판관 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목소리, 집단지성의 공명이었다. 그 시원을 찾아 한없이 거슬러 올라가면 단군의 홍익인간까지 이른다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가깝게 근세 여명기의 환재 박규수에서 찾는 게 더 실감 날지 모른다. 그는 놀랍게도 20대 초에 근 200년 뒤의 한국을 내다보았던 것만 같다. “무당이 발호하거든 나라가 망할 때가 온 것임을 알라.” 그가 20대 초, 1830년 어름에 썼던 다음 글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린다. “골짝과 덤불과 시내와 늪은 때로 사(邪氣)를 뿜고, 벌레와 물고기와 나무와 돌은 오래되면 요물이 되어, 이매망량과 같은 도깨비로 변한다.(…) 이것들이 왕왕 세상에 나타나 백성들의 재앙이 된다. 그러자 요사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서낭’은 사람에게로 와서 사람과 더불어 지내면서 사람이 도움을 청하면 슬프고 괴로운 삶을 어루만져 기쁘고 즐거운 삶으로 바꾸어 주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이다. 아직도 온 나라 곳곳에 지난날 삶의 자취가 남은 마을에는 서낭의 자취도 온전히 사라지지는 않고 조금씩 남아 있다. 우리 고향에도 여태 ‘당산’이 있는데, 거기에는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 베어 버릴 때까지 아름드리 ‘당나무’가 한 해 내내 왼새끼를 발목에 두르고 서 있었고, 당나무가 서 있는 동산 위에는 일제가 마지막 발악을 하며 헐어서 불태우던 날까지 ‘당집’이 있었다. ‘당집’은 서낭이 와서 머무는 집이라 ‘서낭당’이 본디 제 이름이고, ‘당나무’는 서낭이 하늘과 땅으로 오르내리도록 사다리 노릇을 하는 거룩한 나무이며, ‘당산’은 서낭당과 당나무가 있던 동산을 두루 싸잡아 서낭이 노닐던 거룩한 터전이었다. 서낭을 서낭당 바깥으로 모셔 내려면 마땅히 머물 자리를 갖추어야 하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서낭대’다. 정월 초나흘부터 보름까지 마을에 지신밟기가 벌어지면 풍물패 맨 앞에는 언제나 서낭이 내린 서낭대가 앞장서서 이끌었다. 초나흘 새벽 그해 당산을 책임진 산주를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50여 년 전의 책이 지금까지 집에 남아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평생 떠돌이 생활을 했는데 이사 다닐 때마다 책이 무더기로 버려진다. 반백 년이 지난 책으로 지금껏 남아 있는 것은 기껏 두엇에 불과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오지영의《동학사》. 1973년 출판본이 주인을 몇 번 바꾸어 내게 온 것은 그 이듬해 봄이었다. 이 책은 원래 일제강점기 말인 1940년에 출판되었다고 한다. ‘왜(倭)’를 일부러 ‘복(伏)’이라 적고 있는데 일제의 검열을 의식한 것이라고 했다.(이 책의 411쪽) 이 책을 대학 2학년 어느 봄날 읽다가 좀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애써 비유를 해 본다면, 나를 칭칭 얽매고 있던 촘촘한 올가미가 한순간 썩은 동아줄처럼 허물어 내리고 정신과 몸이 공중 부양하는 듯하였다. 오랫동안 유폐되었던 깜깜한 동굴에서 뛰쳐나온 듯도 하였다. 와룡생의 무협지를 처음 읽었을 때도 그랬던가? 그런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을지. 무협지는 버렸지만 《동학사》는 아직 못 버리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어쩌다 한 번씩 이 책을 들춰보는데 첫눈을 맞추었던 스물두 살 때의 감동이 전혀 오지 않는 것이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무식한 무리들이 요사스러운 말에 혹하여, 질병이나 초상이 있으면 즉시 야제(野祭, 길가나 들에서 지내는 제사)를 행하며, 이것이 아니면 이 빌미[祟, 재앙이나 병 따위 불행이 생기는 원인]를 풀어낼 수 없다고 하여, 남녀가 떼를 지어 무당을 불러 모으고 술과 고기를 성대하게 차리며, 또는 중의 무리를 끌어오고 불상(佛像)을 맞아들여, 향화(香花)와 다식(茶食)을 앞에 벌려 놓고는 노래와 춤과 범패(梵唄)가 서로 섞이어 울려서, 음란하고 요사스러우며 난잡하여 예절을 무너뜨리고 풍속을 상하는 일이 이보다 심함이 없사오니, 수령들이 엄하게 금하고 다스리되, 만일 범하는 자가 있으면 관리와 이(里)의 정장(正長)ㆍ색장(色掌) 등을 함께 그 죄를 다스리게 하옵소서.“ 위는 《세종실록》 53권, 세종 13년(1431년) 8월 2일 기록으로 사헌부가 백성들이 길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과 무당이 하는 굿 그리고 불공을 하지 못하도록 하자고 임금께 아뢰는 내용입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성했지만, 조선시대는 성리학이 나라의 근본이 되면서 불교를 억압하기 시작했으며, 그 바람에 큰 절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