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간밤에 내린 비로 한결 상쾌해진 가로를 달려 임의 동상이 있는 서울대공원을 찾았습니다. 오늘이 큰 시아버님이신 조명하 의사, 당신께서 거사하신 70주년이 되는 해로 한국방문길에 유독자이신 조혁래 사촌시숙님 그리고 이제는 연로하신 친척들과 함께였습니다. 푸른 하늘이 평화롭게 펼쳐 보이는 대공원입구에 우뚝 선 임의 동상은. 애국애족, 독립정신을 후대에 일깨우고 나라를 수호하고 계십니다.
준비해간 꽃을 올리고 참배를 드렸습니다.
약관 24살에 청춘을 조국 광복제단에 불태운 임의 애국투사정신과 명분 있게 한 생을 마감한 임의 짧은 한 생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시려옵니다.
▲ 조명하 의사
윤봉길의사나 안중근의사의 공적은 익히 알고 있으나 조명하 의사, 당신이 잘 알려지지 않았음은 당시 단독거사였고 그 거사가 너무 커 황실불경죄로 배후 인물을 찾기 위해 오래도록 보도관제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임은 1928년 5월 14일 대만에서 중국 대륙침략의 전진기지인 대만주둔 일본군 특별검열사로 파견된 일본천왕 히로히도의 장인이이면서 당시 육군대장으로 일본정계의 거물인 구니노미야를 칼끝에 독극물을 발라 자격(刺擊)하셨지요. 당시 일본뿐만 아니라 대만사회에 큰 충격을 준 대사건 이었습니다.
임은 황해도 송화군 하리면에서 4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셨습니다.
4년제 풍천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6년제 송화보통학교에서 강의록에 의해 영어를 공부하고 일본에 건너가 대판상공전문학교를 수학하셨습니다. 애국독립운동에 가담하고자 상해임시정부로 가기 위해 대만에서 기회를 노리던 중 민족의 원수인 거물을 만나 거사를 일으킨 것입니다.
▲ 조명하 의사 의거지 사진. 당시 타이중(臺中) 도서관이 있던 곳으로 이후 합작금고가 들어섰다
당시 부인이 첫 아기를 낳아 어머니와 함께 미역과 아기포대기, 아기 옷을 꾸려 처가로 가던 중 마음에 품은 큰 뜻을 이루고자 처가가 내려다보이는 마을 고갯마루에서 어머니만 보내고 그대로 귀가, 다음날 일본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니 처와 갓 태어난 핏덩어리를 보게 되면 의지가 약해질까 우려함에서 였겠지요.
배후 없이 오직 조국독립을 위해 청춘을 조국제단에 바친 위대한 정신에 조카며느리인 저는 읊조려 찬사를 올립니다.
잡초를 뽑고 화분에 물을 주고 주변정리를 끝낸 뒤 동상 앞에서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묵념을 올렸습니다. 행락객들로 붐비는 공원을 돌고 있는 코끼리열차, 놀이기구에서 쏟아 내리는 웃음이 녹음을 흔듭니다. 행복한 모습들입니다. 나라를 사수한 선열들, 임의 덕택으로 후세가 누리는 평화입니다.
임은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가려내어 실행한 훌륭한 애국지사이십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조카며느리 최옥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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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옥 자 (호주 거주)
월간<수필문학> 천료로 문단등단
제2회 기독교 문예작품 공모전 입상(수필부문)
제1회 재외동포 문학상 수상(수필부문)
한국 문인협회회원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호주 수필문학회 회장 역임
호주 한인문화재 단문학분과 위원장 역임
현]글무늬 문학사랑회 회장
작품집 목록: 흑법사와 맺은 인연, 창밖의 포인세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