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전수희 기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비서장을 지낸 동암 차리석(1881~1945) 선생 70주기 추모식이 9일 오전 11시 서울시 용산구 효창원 임시정부요인 묘역에서 '효창원7위선열기념사업회'(회장 차영조)와 '독립유공자유족회'(회장 김삼열) 공동 주최, ‘효창원을사랑하는사람들’과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후원으로 진행됐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비서장을 지낸 동암 차리석(1881~1945) 선생
추모식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과 '우당장학회' 이종찬 이사장,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 등을 비롯해 독립운동단체 관계자 60여명이 참석했다.
대한민국 법통인 임시정부의 파수꾼이자 재상으로 불리는 동암 차리석. 선생은 1908년 도산이 설립한 대성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민족교육에 힘쓰다 1911년 일제가 신민회를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3년여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19년 평양에서 3.1운동 참가 뒤 상해로 건너가 1921년 <독립신문>이 속간되자 편집국장을 맡은 선생은 사장 김승학, 주필 김은식 등과 함께 언론활동을 통해 항일투쟁 결집에 힘썼다.
1923년 임시정부의정원 의원(현재 국회의원)이 된 선생은 도산 안창호와 함께 임시정부 재건에 힘썼고, 1924년 남경에 동명학원을 설립, 조선 청년들을 독립운동의 일꾼으로 키워냈다. 1932년 선생은 김구, 이동녕, 조성환, 신익희 등과 함께 국무위원에 임명됐다. 1933년 임시정부 내무장 겸 비서장에 선임되면서 임시정부 살림을 도맡았다.
1939년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등 3당이 한국독립당을 결성하면서 선생은 집행위원에 선임돼 정당 활동에 참여한다. 1939년 임시정부 연립내각이 개최한 국무회의에서 선생은 비서장에 다시 선출됐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한 선생은 임시정부 환국을 준비하던 9월 5일 임시정부 청사에서 과로로 쓰러져 사경을 헤매다 9월 9일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독립운동가의 생을 마쳤다. 그리고 1948년 8월 백범 김구의 특별지시에 의해 석오 이동녕 주석의 유해와 함께 봉환돼 지금의 서울 용산구 효창원 임정묘역에 안장됐다.
▲ 동암 차리석(1881~1945) 선생 70주기 추모식 모습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이사장 함세웅)와 '효창원을사랑하는사람들'(회장 박기서)은 공동 추모사에서 "선생은 풍찬노숙(風餐露宿)하시며, 끝까지 임시정부를 지키셨으니, 실로 임시정부의 파수꾼이요, 대들보였습니다. 선생께서 돌아가신 지 70년이 되는 올해는 아직도 친일반민족세력이 판을 치고 있다."면서 "우리는 선생의 민주, 애국, 희생의 독립정신을 계승하면서 민족통일의 그날을 향해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선생의 장남인 차영조(71) 효창원7위선열기념사업회 회장은 인사말에서 "평생 독립운동가였던 아버님 등 일곱 어른의 독립정신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한 점이 참으로 부끄럽다.“ 회고하면서 ”기념사업회 조직을 재정비해 선친의 독립운동정신을 제대로 잇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 예사를 하는 차리석 선생 장남 차영조(71) 효창원7위선열기념사업회 회장
이날 안양에서 참석한 최성식(57) 씨는 “동암 선생의 70주기 추모식에 많은 조화가 왔지만 정부 관계자는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위대한 독립운동가들을 제대로 예우하지 못하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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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암 차리석(1881~1945) 선생 70주기 추모식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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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창원의 임정요인 묘역, 오른쪽이 동암 차리석 선생 무덤(가운데 이동녕, 왼쪽 조성환 선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