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아! 사월십구일
붉은 꽃 몽우리 무덤가를 다 덮어도
그날 아들딸 흘린 피
다 말하지 못해
무상한 정권에 눈멀고
귀먹은 이들이 저지른 죄악
언제나
우리의 아들딸이 지켜낸 것
하늘은 알지
다시는 더러운 욕심으로
금쪽같은 내 새끼
내몰지 말라고
마른하늘에
벼락도 치는 법이니
위정자는 들으라
불의로 정의를 매도하지 말길! - 이한꽃 '아,사월십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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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유리 4.19 무덤가에는 붉은 영산홍이 그날의 처참함을 말해주고 있다. |
4·19 민주혁명, 4·19 학생운동, 4·19 의거, 4월 의거, 4월 혁명, 미완의 혁명 등으로 불리는 4.19 혁명은 문민정부 때부터 혁명으로 승격되었다. 오늘은 56년전 학생과 시민들이 이승만 정권의 불의에 목숨을 걸고 항거한 날이다.
"4월 11일 마산에서 김주열 학생 시신이 발견된 게 도화선이 됐죠. 서울 지역 총학생회 간에 물밑 논의를 통해 19일 오전 9시 일제히 경무대와 중앙청 앞에 집결하는 것으로 행동 지침을 정했습니다. 서울 서부지역에선 홍익대와 연세대가 시위를 주도했죠. 경무대 앞엔 대학생만 2만여 명을 헤아릴 만큼 엄청난 군중이 몰렸습니다. 여기에 경찰이 무차별 총격을 가하면서 많은 희생자가 났습니다(사망 21명, 부상 172명). 살인 진압은 국민을 격노시켰고, 결국 엿새 후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과 대통령 하야로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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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 무덤가의 조각물 |
당시 홍익대 총학생회장(학도호국단 학생위원장)이었던 민병천 4ㆍ19혁명공로자회 회장은한국일보(2010.1.10)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때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민 회장은 "문민정부에 와서 4ㆍ19가 혁명으로 복권됐지만 우리 뒷 세대들은 그 내용을 잘 몰라요. 정치인조차 말입니다. 일전엔 정부가 4ㆍ19를 데모로 폄하한 동영상을 학교에 배포했다가 장관이 우리에게 사과하기도 했죠.” 라는 말을 했다.
민 회장의 말처럼 4.19혁명에 대한 당시 대다수의 언론 보도는 ‘데모’로 표현했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 독재정부는 데모를 이적행위(利敵行爲)로 간주했다. 그러나 학생들과 시민들은 이승만 정권의 폭정(暴政)이 이적(利敵)이라고 맞섰다.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들의 항거의 목소리가 커지자 이승만 정권은 19일 오후 1시를 기해 국무원 공고 82호로 서울시 일원에 계엄을 선포한다. 이어 3시간 뒤에는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주요도시에 계엄 확대를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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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의 무덤일까 까치가 전해주고 싶은 말은? |
“고려대학교 학생 3,000명은 18일 오후 1시를 기하여 안암동 교정에서 동대문, 종로, 광화문을 거쳐 국회의사당에 이르는 5킬로미터를 걸으며 데모를 감행했다. 이에 앞서 학생들은 마산 시위 중 잡혀간 학생 석방, 학문의 자유 보장 등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는 1960년 4월 19일 동아일보 조간보도다.
그때 불의에 항거했던 어린 학생들은 이제 일흔을 훌쩍 넘긴 백발의 장년이 되었다. 그러나 그날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과 그 유가족들은 눈물로 긴긴 세월을 살아왔다. 정의와 자유를 위해 몸바친 선열들의 발자취를 기억하는 것은 최소한의 국민된 도리가 아닐까 한다. 오늘 4,19를 맞아 더욱 그런 생각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