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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만주벌 호랑이 김동삼, 한인사회 안정과 독립군 재건

경북인의 만주망명 110주년 기획 보도 <9>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과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관장 정진영)은 만주망명 110주년을 맞이하여 모두 12회에 걸친 기획 보도를 진행하고 있다. 제9편은 만주 한인사회의 안정과 독립군 재건에서 큰 활약을 펼친 일송 김동삼 선생에 관한 이야기다.

 

1919년 나라 안팎으로 울려 퍼진 3.1만세운동에 의해 일송 김동삼 등이 활동하던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와 통화현에서 3월 12일에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앞서 김동삼은 대한독립의군부에서 작성, 배포한 대한독립선언서에 이상룡과 함께 참여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조직할 때도 주요 구실을 하는 등 서간도 일대의 정부조직인 한족회 서무사장과 군정부(이후 서로군정서 개칭)의 참모부장 등을 맡아 최고 군사 지휘자의 위치에서 활약하며 남만주 독립운동계의 중견으로 떠올랐다.

 

 

 

김동삼은 경신참변과 자유시참변을 거치며 이상룡 등과 함께 남만주 일대에서 한인사회를 안정시키고 독립군을 재건하려고 노력했는데, 가장 시급한 과제는 분산되어 있던 독립군단을 통합하는 일이었다. 1921년 4월 북경군사통일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이상룡이 북경으로 떠났고, 그 사이 김동삼은 서로군정서를 재정비하면서 법무위원장을 맡아 독립군을 재건하고 동포사회에 잠입한 친일 주구들을 제거하는 등의 활동을 이어나갔다.

 

이러한 각고의 노력 끝에 1922년 1월 서간도 독립운동 단체인 한족회,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이 연합하여 ‘대한통군부’를 결성, 8월에는 이를 확대해 관전동로한교민단, 대한광북군영, 대한정의군영, 대한광복군총영, 평안북도독판부 등 이른바 8단 9회의 대표 71명이 참여한 ‘대한통의부’를 조직하여 군사력을 확보해 나갔다. 이때 김동삼은 총장을 맡아 남만주를 아우르는 최고통수권자가 되었다.

 

독립운동계에서 그의 위상과 독립을 위한 헌신으로 1923년 나라 안팎 크고 작은 독립운동단체의 대표 4백여 명 가운데 130여 명을 선정, 독립운동 역사상 가장 많은 대표가 오랜 기간 협의하며 임시정부의 존속 등의 현안을 다룬 ‘국민대표회의’에서 의장에 뽑혔다.(부의장은 윤해, 안창호) 하지만 이 회의가 결렬되자 만주로 다시 돌아온 김동삼은 1924년 전만통일회의주비회를 거쳐 12월 25일 ‘정의부’ 결성 당시 의장으로서 주도적 역할을 했고, 이후 중앙집행위원회 외무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또 국내 유일당운동으로 신간회가 결성된 것에 발맞춰 1926년부터 만주지역 유일당운동으로 3부 통합을 추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통합 논의 과정에서 기존 단체 중심으로 조직하려는 ‘전민족유일당조직협의회’와 새로운 조직을 결성하려는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로 갈렸고, 김동삼이 속한 정의부는 협의회 측과 입장을 같이 하게 된다. 그러나 김동삼은 기존 단체를 그대로 유지한 채 완전한 통합체를 구성할 수 없다고 여겨 반대 뜻을 표했는데, 그런데도 1928년 정의부가 촉성회를 부인하고 협의회를 지지하고 나서자 정의부를 탈퇴했다.

 

이후 그는 길림성으로 가서 김좌진 등과 통합을 시도했고, 같은 해 12월에는 정의부를 탈퇴한 김상덕, 김원식, 이청천 등과 신민부의 김좌진, 황학수 등 군정위원회측, 참의부의 김희산, 김소하 등과 힘을 합쳐 혁신의회를 조직하여 통합 군정부를 세우는데 헌신했다. 하지만 1929년 이후 혁신의회의 존속기한이 끝나자 여기에 소속된 주요 인사들이 각기 본거지로 흩어졌다.

 

이때 김좌진은 7월 북만주로 돌아가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하면서 김동삼은 회장으로 취임했으나 1930년 김좌진이 피살되면서 김동삼 중심의 인물들은 힘을 잃었고, 같은 해 7월 이를 수습하기 위해 조직된 한국독립당 건설에 참여해 고문 직책을 맡았다. 이는 그가 일구어낸 만주 독립운동계, 그중에서도 민족주의 계열에서의 마지막 직책이었다.

 

 

이처럼 나라와 민족의 독립과 통합에 힘써온 그는 1931년 10월 하얼빈에서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고, 무수한 옥고를 치르던 중 1937년 만 59살의 일기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