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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만주망명 독립운동가 추모사업, 이대로?

경북인의 만주망명 110주년 기획 보도 <11>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과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관장 정진영)은 만주망명 110주년을 맞이하여 모두 12회에 걸친 기획 보도를 진행하고 있다. 제11편은 조국 독립을 위해 만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의 삶과 정신을 기리는 방안을 찾는 내용이다.

 

1910년 나라가 무너지자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해 만주로 망명한 1세대 독립운동가들을 드러내고 추모하는 사업은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최근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인 안동 ‘임청각’이 언론에 비치면서 큰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이상룡은 경술국치 이후 만주로 망명해 경학사와 부민단ㆍ신흥무관학교ㆍ서로군정서 등을 건설하면서 만주 동포사회의 형성과 독립군 기지 건설에 투신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을 통해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에 취임하게 되고 1926년에는 국무령을 사임하고 만주로 돌아가서 1929년 길림성 서란현에 정착했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고 만주사변 이후 독립군과 한중 합작 항일연군 등이 점차 무너지던 중에 1931년 10월 김동삼의 체포 소식을 듣고 나서 병세가 위중해져 1932년 5월 12일 순국했다.

 

 

 

그는 순국하기 전 “나라를 회복하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에 갖고 가지 말고 우선 이곳에 묻어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실제로 그의 주검은 그가 마지막 거처였던 집 뒷산에 임시 매장되었다가 1938년 조카 이광민이 하얼빈 취원창 내 한인 공동묘역으로 이장했고, 1987년 독립기념관 건립 당시 그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기 위한 계획이 수립되어 1990년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대전 국립묘지에 이장되었다가 1996년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묘역으로 옮겨졌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는 그와 동지로서 활동하다가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동산 류인식 선생의 손자 고 류기원 님이 지은 1990년 유해 봉환 당시의 <추도사> 복사본이 소장되어 있어 석주 선생의 생애와 정신에 대해 되새겨볼 수 있다.

 

그에 대해 널리 알리는 노력도 잇달았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고, 1963년에는 “석주이상룡선생기념사업회”의 발의로 대구 달성공원에 ‘석주선생구국기념비’가 세워졌다. 또 한국국학진흥원에는 석주 선생의 기념비 건립 당시의 추진과정을 모아둔 서류철이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는 기념사업회 취지서, 기념비 건립 관련 장부, 방명록, 추모가(노래) 악보 등이 수록되어 있어 석주 선생과 관련된 현창 노력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상룡의 처남 백하 김대락은 나라가 망하기 전에 자신의 집을 협동학교에 희사하고 구국운동을 펼치다가 경술국치 이후 이상룡보다 앞서 만주로 망명하여 서간도에 정착했다. 신흥학교 건설과 공리회 조직에 관여하면서 <신흥학교 권유문>, <공리회 취지서> 등을 작성하면서 만주 동포사회의 정신적 지주로서 크게 활약했다. 그가 남긴 일기 《서정록》ㆍ《임자록》ㆍ《계축록》(현재 《백하일기》로 불리고 있음)은 만주망명 과정과 동포사회 형성, 만주에서의 초기 독립운동 모습과 실상 등을 연구하는 중요 사료로 주목받고 있다.

 

 

 

그는 1911년 만주 망명 당시 66살의 고령이었는데, 모진 망명생활을 견디다가 1914년 12월 마지막 정착지인 유하현 삼원포 서남쪽 약 30리 되는 ‘남산藍山’ 자락에서 70살의 일기로 순국했다. 그가 순국하고 나서 1915년 석주 이상룡은 깊은 애도를 담은 <제문>을 지었는데 《석주유고》에 실려 있다. 그의 장례는 삼원포 남산 자락에서 치러졌지만, 묘소 위치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김형식의 사위인 이태형이 쓴 《김형식 약전》에는

 

“장인어른(김형식)께서 1939년 또는 1940년 즈음 가을에 사촌 아우 김규식과 함께 남산으로 가서 백하공(김대락) 묘소에 성묘한 뒤, 묘소 앞에 넓적한 돌을 깔고 그 위에다가 묘지석 대신 ‘조선 흰 사기 밥사발’ 안에 검은색 페인트로 글을 써서 얹고는 묻었다고 했는데, 묘소 위치에 대해 ‘남산’이라고만 하고 말씀이 없었다. 이에 대한 기록도 없으니 후대에 찾기 어려울 것이다.”

 

라고 진술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후손들은 그의 묘소를 찾으려고 온갖 노력을 했지만, 현재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2002년 8월 안동시 임하면 분포(汾浦)에 의관장(衣冠葬, 주검 없이 옷만 묻은 장례)으로 조성한 임시 묘소만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들의 드높임 사업에는 아직도 미비한 점이 많다. 예를 들어 일송 김동삼은 순국 뒤 유언에 따라 화장하여 한강에 뿌려졌고, 현재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의관장으로 안치되어 있지만,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내앞마을에 있는 그의 생가터는 일반인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아 관람객의 발길이 드물다. 특히 내앞마을 일대는 안동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한 혁신유림과 협동학교의 발원지로서, 관련 유적이 곳곳에 흩어져있다.

 

 

 

만주 망명 인사 가운데 백하 김대락ㆍ일송 김동삼 등의 생가가 있고, 월송 김형식ㆍ일산 김성로 등 독립운동가 후손이 거주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까닭으로 마을 전체가 독립운동 중요 유적지임에도, 개발이 미비하여 대중교통편이 불편하고 인적이 드물어 세상에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나라사랑의 첫걸음은 치열한 삶을 살다간 인물을 기리고 추모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에 관한 관심과 개선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