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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진교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평창강

평창강 따라 걷기 제5구간 - 계속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용항교를 건너면 주진리이다. 《조선지지》에 주진리(舟津里)라고 표시되어 있는 마을이다. 주나루라고도 부르는데, 나루 둘이 있으므로 두나루라 하던 것이 변하여 주나루가 되었다. 옛날에는 뱃터거리에서 나룻배로 사람과 우마차가 강을 건넜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때(1934) 주진교가 놓였고, 80년대 초에 새 주진교가 건설되었다.

 

그렇다면 소년 이효석은 봉평에서 평창읍으로 갈 때 분명히 주나루에서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넜을 것이다. 배를 타고 평창강을 건너는 소년 이효석을 상상해 보았다. 그의 작품 중에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장면을 묘사한 글이 나오는지 궁금하다.

 

 

 

 

주진리에서 평창강 따라 동쪽으로 계속 걷다가 작은 하천을 만나 왼쪽 둑길로 돌아가니 주나루라고 쓰인 큰 비석이 나타난다. 공원 입구에 주진게이트볼장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비석의 아래에 주나루의 유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주나루란 나룻배로 강을 건너다니던 뱃터거리를 말하는 이곳의 옛 지명입니다. 주변에는 선사시대부터 선조들의 주거지로 추정되는 유물인 토기, 돌 연모, 고인돌 등이 산재해 있고 앞산 용산(龍山)은 용산정(龍山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던 곳인데 용산정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이여림(李汝霖)이 100리 밖 횡성에서 왜병과 싸우다 장열하게 전사하자 그의 애마가 주인의 수구를 물고 와서 슬피 울다 주인을 따라 용담(龍潭)에 뛰어들어 죽으니 이 뜻을 기리고자 부락인 우필규(禹弼奎) 이원일(李元逸) 씨 등이 기금을 모아 용산정을 건립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현재는 흔적만 남아 있다.”

 

지난번 제1구간 의풍포 성황당에서 설명문의 한 문장이 너무 길다고 불평했는데, 이 비석도 두 번째 문장이 너무 길다. 마침표 찾다가 숨이 넘어갈 지경이다. 과거의 우리나라 국어 교육이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조금 더 가다가 상촌교를 지난 뒤에 효석문학100리길과 헤어졌다. 우리는 31번 국도를 굴다리를 통과해 건넜다. 31번 도로는 몇 년 전에 확장공사를 하여 4차선이 되었는데 통행량이 많고 차들이 씽씽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굴다리 건너편도 주진리에 속한다.

 

 

우리는 굴다리를 지나 31번 도로 동쪽으로 나란히 나 있는 2차선 옛 도로를 따라 걸어갔다. 남쪽으로 조금 가니 평창강을 건너가는 주진교가 나타난다. 눈앞의 다리가 1934년에 만들어지자 주진리의 나룻배 사공이 일자리를 잃게 된 그 다리인 듯하다. 지도를 보면 주진교는 2개가 있다. 하나는 31번 도로가 통과하는 큰 주진교고, 다른 하나는 옛 도로가 지나는 작은 주진교이다.

 

 

 

작은 주진교 이름이 ‘舟津橋’라고 한문으로 새겨져 있는 것을 보니 옛날에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평창강 따라 걸으면서 본 다리 이름은 모두 한글로 표기되어 있었다. 다리에 새겨진 공사기록을 보니 1982년에 완공되었다. 아마도 1934년에 만들었던 다리를 중간에 개수공사 했나 보다.

 

이 구간의 평창강은 주진교 남쪽에 있는 용산에 가로막혀 서쪽에서 동쪽으로 길게 흐른다. 용산의 산줄기를 절단하여 다리를 2개나 만들었다. 용산 바로 아래에 커다란 굴이 보인다. 무슨 전설이 있을법한 그러한 동굴이다. 주진교 가운데서 바라본 평창강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주진교를 지나면 후평리가 나타난다. 용산을 휘돌아 남쪽으로 흐르는 평창강의 서쪽 들판이 후평리이다. 후평리는 평창 뒤쪽들에 있는 마을이므로 ‘뒷들’이라고 불렀다. 뒷들을 《조선지지》에서 후평리(後坪里)라고 하였다. 예로부터 논을 경작하는 농가가 많았다.

 

 

우리는 31번 도로와 나란히 나 있는 옛날 도로를 따라 평창강을 왼쪽에 두고 남쪽으로 걸어갔다. 31번 도로는 국도여서 차량 통행이 잦았다. 자동차 소리가 시끄러웠다. 지금까지 조용하고 한가한 시골길을 걷다가 도시에 나온 듯한 기분이다.

 

후평리는 충적평야로서 홍수터에 자리 잡고 있다. 2006년 7월 대홍수 때에 후평리가 물에 잠겨 큰 피해를 보았다. 아래 주소를 클릭하면 평창강이 범람하여 후평리가 물에 잠긴 사진을 볼 수 있다. https://news.v.daum.net/v/20060716144304709?f=o

 

평창의 향토사학자인 정원대 선생이 발표한 <평창의 동학농민군 전적지 고찰>에 따르면 1894년 11월 2일 평창읍 후평리와 중리에서 동학농민군은 일본군 2개 중대와 관군, 민보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다. 농민군은 100여 명이 전사하고 정선으로 퇴각하였다. 이후 동학 접주 이문보 등 5명이 체포되고 처형되었다고 한다. 평창은 산골 중의 산골인데, 농민군이 평창 후평리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