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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반도주를 단행 평창군으로 피신한 법정스님

동강 따라 걷기 3-2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답사 현장으로 되돌아가자. 동림교 왼쪽으로 난 돌계단을 내려가니 오대천 따라 작은 둑길이 나타났다. 길 양쪽에 큰 소나무가 심겨 있는 매우 호젓한 오솔길이다. 나는 이 길을 여러 번 와 보았다. 자연명상마을에는 여러 가지 이름의 정원이 있는데, 이 길은 비록 이름은 없어도 내가 매우 좋아하는 오솔길이다. 길 오른쪽으로 오대천이 흐르는데, 인간이 손대지 않은 전형적인 자연 하천의 모습이다. 요즘 가물어서 수량은 많이 줄었지만 흐르는 물소리가 시원스럽다. 한번 걸으면 누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오솔길이다.

 

오솔길이 끝나면서 월정사노인요양원이 나타난다. 이 요양원은 월정사복지재단에서 운영하는데, 2008년에 개원하였다. 이 요양원은 평창군에서 좋은 요양원이라고 소문나 있다. 이 요양원에 들어가려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답사 뒤에 이 요양원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요양보호사에게 전화로 물어보니, 요양원을 스님 두 분이 관리하는데 요양보호사가 80명이나 근무한다고 한다. 모두 130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니 상당히 큰 시설이다. 불교재단에서 운영하므로 법당이 있고 아침 예불이 있지만, 의무적으로 참석을 요구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자연명상마을과 요양원 사이는 울타리로 막아놓았지만, 하천 쪽으로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길이 나 있어서 쉽게 건너갈 수 있다. 요양원을 지나고 오대천 좌안으로 둑길이 계속 이어진다. 길 왼쪽으로는 농경지가 펼쳐져 있고 간혹 마을도 보인다. 얼마쯤 걸어가자 동산교가 나타난다.

 

 

동산교는 동산리(東山里)에 있어서 그렇게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평창군 지명지를 조사해보니 동산리라는 지명은 동대산(東臺山)에서 따온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산리 동쪽으로 오대천이 흐르며 하천 주변으로 평지가 발달해 있다. 일제강점기 때는 동양척식회사 부속 회사가 있었다고 한다. 오대산 일대 목재를 벌목하여 내다 파는 회사였다.

 

 

오대천 따라 계속 걸어가는데 밭에 잎이 잘게 갈라진 작은 모종이 줄지어 심겨 있다. 앞서가던 일행 가운데서 누군가 이 모종의 이름이 무엇인지 물었고, 어떤 사람이 당근이라고 답했는데, 나에게 확인을 한다. 봉평 우리 집 앞쪽의 넓은 밭에 작년에 당근을 심었기 때문에 나는 이 모종이 당근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자 제주도가 고향인 정선댁이 제주도의 구좌 당근이 유명하다고 말한다. 구좌당근은 화산재가 많이 섞인 흙에서 자라므로 달콤하고 아삭한 맛이 일품이어서 한번 먹어본 사람은 구좌당근만 찾는다고 한다. 나는 진부당근도 유명하다고 덧붙였다. 우리 각시에게서, 진부당근이 매우 아삭아삭하여 과일처럼 그냥 깎아 먹어도 맛있다는 말을 들었었다. 답사 뒤에 진부에 사는 지인에게 전화 걸어 물어보니 예전에는 오대산 입구에서 당근을 많이 길렀는데, 요즘에는 대파를 많이 심는다고 알려준다.

 

마침 가양과 함께 걷는데, 오른쪽 울타리에 처음 보는 덩굴식물이 있다. 하얀 꽃이 매우 화려하고 아름답다. 가양에게 꽃이름을 물어보니 자기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내가 손말틀(휴대폰)의 꽃검색 기능을 이용하여 확인해보니 할미밀망으로 나온다.

 

 

할미밀망은 미나리아재비과의 덩굴식물(초본)인데 이름이 흥미롭다. 할미밀망과 비슷한 모양의 꽃이 피는 식물(목본)로서 미나리아재비과의 사위질빵이 있다. 밀망이나 질빵이나 모두 등에 짐을 걸 때 어깨에 거는 끈을 말한다. 사위질빵 줄기는 연약하여 끊어지기 쉽고, 할미밀망 줄기는 굵고 질겨 잘 끊어지지 않는다. 전설에 따르면, 사위를 아낀 장모는 사위의 맬빵은 사위질빵 줄기로 만들어 짐을 적게 하고 자신의 맬빵은 할미밀망 줄기로 만들어 짐을 많이 졌다고 한다. 과학적인 사실에 전설을 가미한 재미있는 꽃이름이다.

 

이날은 절기상으로는 늦봄이지만 구름이 끼고 햇빛이 비치지 않아서 걷기에 좋은 날씨였다. 이제는 철쭉도 다 지고 곳곳에서 하얀 아카시아꽃이 피어서 바람이 조금이라도 불면 아카시아꽃 향기가 코를 즐겁게 한다. 우리는 찻길이 아니고 오대천 둑길을 걸었다. 자동차 소리 대신 물소리가 계속 들리는 좋은 길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둑길 따라 계속 걷다 보니 왼쪽에서 작은 하천이 오대천으로 흘러든다. 오대천의 지류인 작은 하천의 이름이 월정천이다. 월정천을 건널 수 있도록 아치 모양의 나무다리를 만들어놓았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정선댁의 명(요청?)에 따라 남자들이 모두 다리에 늘어섰다. 근사한 사진이 나왔다.

 

 

 

 

월정천은 진고개의 오른쪽 능선에 있는 노인봉(해발 1338m)에서부터 발원한다. 월정천은 내게는 매우 의미 있는 하천이다. 오대산관리사무소가 있는 병안 삼거리에서 진고개 쪽으로 하천 따라 올라가면 법정스님이 살던 작은 집이 있다고 나는 들었다. 2015년에 봉평으로 이사 온 뒤에 나는 법정스님이 살던 집에 한번 가보고 싶었다.

 

몇 년 전에 나는 오대산관리사무소에서 일하던 진부토박이 직원의 설명을 들은 뒤에, 법정스님이 살던 집을 혼자 찾아간 적이 있다. 입구까지 갔으나 문이 닫혀 있고 출입금지 표시와 CCTV가 설치되어 있어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은 못 하지만, 나는 법정스님의 《무소유》 책을 읽은 뒤에 법정스님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스님이 써서 펴내는 책을 대부분 읽었다. 스님의 무소유 정신을 내 인생의 생활 철학으로 받아들였다. 내가 가르치는 모든 과목의 수강생에게 《무소유》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내라고 강요하였다. 독후감을 써내는 학생에게는 보너스 점수 5점을 주었는데 요즘의 기준으로 보면 명백한 갑질이었다. 나 자신이 1995년에 <무소유 독후감>이라는 제목으로 수필까지 썼다. 이 수필은 수원대 교수협의회 카페에 실려 있다.

 

 

<무소유 독후감> 수필 읽기

https://cafe.daum.net/suwonprofessor/UgNz/37

 

 

길상사 홈누리집에서는 법정 스님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법정 法頂 (본명 박재철 朴在喆 / 1932~2010)

 

1932년 전라남도 해남 우수영에서 태어났다. 한국 전쟁의 비극을 경험하고 인간의 선의지(善意志)와 삶과 죽음에 고뇌하며 진리의 길을 찾아 나섰다. 1956년 효봉스님을 은사로 사미계(출가는 하였지만, 아직 스님이 되지 않은 남자 수행자가 받는 계)를 받은 뒤 통영 미래사, 지리산 쌍계사 탑전에서 스승을 모시고 정진했다. 이 뒤 해인사 선원과 강원에서 수행자의 기초를 다지고 1959년 자운율사를 계사로 비구계(정식 승려가 되는 계)를 받았다.

 

1960년 통도사에서 《불교사전》 편찬 작업에 동참하였고, 1967년 서울 봉은사에서 운허스님과 더불어 불교 경전 번역을 하며, 불교계 언론과 유력한 신문에서 죽비 같은 글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1973년 함석헌, 장준하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여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75년 젊은 목숨을 앗아간 제2인혁당 사건을 목격한 스님은 큰 충격을 받아 그해 10월 본래 수행자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무소유 사상을 설파하며 자기다운 질서 속에 텅 빈 충만의 시기를 보낸다.

 

하지만 세상에 명성이 알려지고 끊임없이 찾아드는 사람들을 피해,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1992년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고 생명 중심의 세상을 명상하며 홀로 수행 정진하였다.

 

1993년 8월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준비 모임'을 발족하여, 1994년 3월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첫 대중 강연을 시작으로 서울, 부산, 대구, 경남, 광주, 대전 등지에서 뜻을 함께하는 회원들을 이끌어 주셨으며, 스님의 무소유 사상에 감동한 길상화(고 김영한) 보살이 7천여 평의 대원각을 시주하여 1997년 12월 14일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가 창건되었다.

 

법정스님하면 떠올리게 되는 용어들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 낱말은 '무소유'다. 법정스님은 "무소유는 단순히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을 뜻한다"라고 정의하시며, 생명을 중심으로 하는 나눔의 삶을 설파하셨다. 세속 명리와 번잡함을 싫어했던 스님은 홀로 땔감을 구하고 밭을 일구시며 청빈을 실천하셨다.

 

스님은 폐암이 깊어진 뒤에도 침상에서 예불을 거르지 않았으며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며,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사)맑고 향기롭게"에 주어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토록 하며, 내 이름으로 펴낸 모든 출판물을 더는 펴내지 말아 달라.”는 말씀을 남긴 뒤 2010년 3월 11일(음력 1월 26일)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에서 입적(세수 78세, 법랍 55세)했다.

 

“내 이름으로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을 행하지 말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도 말며, 관과 수의를 마련하지 말고,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없이 평소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하여 주기 바란다.”라고 당부한 스님은 마지막까지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였고, 입적 후에도 남은 이들에게 맑고 향기로운 가르침을 전해준 스승으로 추앙받고 있다.

 

내가 알기로는, 법정 스님은 송광사 입구에 불일암이라는 암자를 스스로 지은 뒤 수행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해 부처님 오신날 텔레비전 특집 방송에 출연한 이후 방문객이 불일암으로 밀려들기 시작하였다. 밀려오는 방문객을 견디다 못한 법정 스님은 어느 날 야반도주(?)를 단행하여 평창군으로 피신하였다. 법정스님이 쓴 《버리고 떠나기》 책에 보면 스님은 화전민이 살다 떠나간, 전기도 없는 오두막집에서 살면서 일절 방문객을 받지 않았다.

 

나는 법정스님의 오두막집의 모습이 궁금했다. 요즘은 인터넷 시대다. 모든 정보가 인터넷 안에 들어있다. 그래서 나는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뒤인 2010년 법정스님이 돌아가신 뒤에 KBS 기자가 법정스님이 살던 집 수류산방(水流山房)을 찾아가 보도한 뉴스를 찾아내었다.

 

<동영상> 법정스님이 오대산에서 살던 집 보기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2063046

 

 

그런데 얼마 전 월정사에서 근무하는 평창군 문화해설사 이주진 회장과 대화를 나누다가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 회장은 “법정스님이 겨울에는 수도시설이 없던 수류산방 집을 비우고 간평리에 있는 작은 집에서 겨울을 지냈는데, 자기가 그 집에 가본 적이 있다”라고 말하였다. 수류산방과 간평리 집의 소유주는 서울에 사는 신심 깊은 불자인 ㅎ 씨라고 한다. 그분은 법정스님에게 말하자면 집 보시를 한 것이다.

 

간평리(間坪里)는 진부면 북쪽에 있는 마을로 진부와 월정사 사이에 있다고 하여 새잇드루(사잇뜰)라고 불렀다. 마을 대부분이 완만한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외곽은 오대산 산줄기에 쌓여 있고 마을 중심부를 관통하여 오대천이 흐른다. 켄싱턴 호텔과 오대산연수원이 자리 잡고 있다.

 

 

나는 새로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나는 그 집에 같이 가보자고 요청했다. 이회장님은 나에게 그 집의 약도를 그려 주었다. 법정스님은 그 집의 본채를 쓰지 않고, 뒤편에 있는 통나무 흙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 흙집은 아궁이가 하나 딸린 한 칸짜리 작은 방이었는데, 이름은 거창하게도 일월암이었다고 하는데 현재 그 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