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쪼끔만 나누어주면 신간이 편하다

누구도 빈손으로 보내지 않았지만, 재산이 준 적이 없어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213]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초등학교 다닐 때 아이들이 어찌나 많은 지 한 반에 보통 70명이 넘었다. 그러고도 10반을 넘었으니 쉬는 시간에 운동장을 내려다보면 거짓말 안 보태고 새카맣게 보였다. 원래 4학년이 되면 남과 여반으로 나뉘었는데 내가 들어간 반은 남녀합반으로 6학년까지 그대로 갔다. 몇 학년 때인가 기억이 안 나는데 내 짝은 몹시 마르고 까무잡잡한 아이였다. 짝은 도시락을 한 번도 가져오지 않았고 옥수수빵을 받아먹었다.

 

그런데 그 빵도 다 먹지 않고 남겨서 가방에 넣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연필이나 공책도 없을 때가 많았고 그림 도구는 아예 준비해오지 않았다. 그래서 내 것을 많이 썼는데 정말 아껴서 잘 쓰려고 하는 것이 보여, 반쯤 쓴 크레용 세트와 도화지를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어느 날인가 그 애가 빵을 받아서 자리에 앉는데 그 냄새가 너무 좋아서 내 도시락과 바꾸어 먹자고 했다. 그래도 되느냐고 하면서 짝은 너무나 맛있게 도시락을 비웠고 나는 옥수수빵을 잘 먹었다. 내가 짝에게 앞으로 종종 바꾸어 먹자고 했더니 그 애는 그렇게 좋아했다. 나는 그 시절만 해도 빵순이었고 옥수수빵은 밥보다 훨씬 맛있었다. 아버지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그저 미소를 지으며 밥을 많이 담아가라고 할 뿐이었다.

 

다음 날도 바꾸어 먹었는데 그 애는 반 정도 먹고 남겨서 새까만 빈 도시락에 모두 담는 것이었다. 나는 왜 그러느냐고 묻지도 않고, 집에 와서 아버지에게 또 미주알고주알 다 말했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짝이 어디 사느냐고 물었으나 나는 몰랐다. 그런 일이 되풀이되고 어느 날 아버지가 하굣길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짝과 함께 나오던 길이었는데 아버지는 그 애 집에 가자고 했다. 짝은 무서워하면서 무조건 잘못했다고 말하며 울음을 터트렸다. 쌀밥과 빵을 바꾸어 먹은 일을 들켜 혼을 내는 것으로 생각하고 울음이 터졌다고, 후일 그 애가 내게 말했다. 아버지는 무릎을 구부리고 앉으며 다만 그 아이를 안아주었고 우리는 함께 짝의 집까지 걸어갔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고갈산 밑의 동네는 온통 루팡지붕 집이었고 생전 처음 가 보는 이상한 세계였다. 나는 못 들어가고 아버지만 들어갔는데 한 참 있다 나온 아버지의 손을 잡고, 동네를 벗어날 때까지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아버지는 짝에게 잘해주라고 했다.

 

“네 나이 때의 아이레 한 창 먹을 때인데, 도시락을 반 남겨서 집에 가져간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이디. 아버지레 그 이유가 궁금했더랬어. 밥을 가져가서리 저녁으로 먹는다면 그렇게 굶기는 부모는 못 쓰는 사람들인 게야. 그런데 네 짝은 그 밥을 가져가서리 물을 넣고 끓여, 아픈 아버지께 죽을 끓여 드린 게야. 아바지레 많이 아파서리 오마니가 장사해서 겨우 먹고 사는데 아버지 끓여 줄 쌀 한 줌이 없는 거이야. 새까만 보리밥만 해 먹으니 아픈 사람이 먹지를 못하는데, 쌀밥 죽을 먹고 원기를 많이 차렸다고 하는구나. 심청이 못지 않은 아이야.”

 

아버지가 짝의 집에 무엇을 해주었는지 나는 다 모른다. 짝의 어머니가 시장의 난전 한 곳에서 고정적인 장사를 하게 되었고, 쌀가마니가 왔다고 그 애가 내게 울면서 말해서 알았다. 아버지는 그 애가 심청이 같은 효녀이기에 작은 도움을 주었다고만 했고 나도 그렇게만 알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엄마가 알면 시끄러워지고 싸움이 나기 때문에 그런 일은 말하지 않는 것이 옳았다. 언제나 말하지만, 우리 집은 부자가 아니었고 때로 아버지의 자선은 지나칠 때가 있다는 것을 나도 알았다. 장사해서 남 다 퍼준다고 엄마가 대들면 아버지는 허허 웃으며 항상 하는 말이 있었다.

 

 

“두 개 다 가지면 행복하니?”

“곳간에 많이 쌓아 두면 더 행복하네? 쪼끔만 나누어주면 신간이 편한데, 그거이 더 좋지 않네?”

 

쪼끔만 나누어주면 신간이 편하다... 신간이 편하다는 그 말의 뜻을 나는 요즘 알아가는 듯하다. 두 개 가지고 있어서 행복이 두 배가 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어 그 행복감이 주는 느낌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두 개를 나누어 나는 한 개만 있게 되었는데, 그 충만한 느낌은 두 배, 세 배가 되니 아버지가 왜 그랬는지를 이제야 알게 된다.

 

이북에 있는 조부모님이, 집에 찾아오는 사람 그 누구도 빈손으로 보내지 않았는데, 한 번도 재산이 준 적이 없노라고 아버지는 늘 내게 말했다. 나누어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준 이 유산이 내게는 무엇보다 귀한 유산이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그저 습관이 되어 나눈 시간이 조금도 아깝지 않다. 두 개 다 가져서 행복하니? 껄껄 웃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이렇게 선명하다.

 

 

《행복편지 열다섯번째 이야기》에 나오는 글 가운데 하나로, 권영심씨 글입니다. 행복 전도사 박시호씨의 행복편지가 책으로 꾸며져 나오기 시작한지 벌써 15년이 되었군요. 박시호 우체국 예금보험지원단 전 이사장은 2003년부터 주위 지인들에게 행복편지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행복편지는 행복에 관한 좋은 글과 박이사장님이 고른 사진들과 함께 PPS 파일로 만들어집니다. 박이사장님은 이렇게 만든 행복편지를 매일 아침마다 500명의 행복편지 가족들에게 번개글(메일)을 보냅니다.

 

그리고 15년 전부터는 이렇게 1년 동안 보낸 행복에 관한 글 가운데서 고르고 골라 책으로 엮어내고요. 단, 이때 책에 싣는 사진들은 박이사장이 직접 찍은 사진들입니다. 이번 열다섯 번째 이야기에는 박이사장이 미얀마를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들로 꾸몄네요. 박이사장님은 유명한 사진작가 김중만씨가 고교 동기라, 자신도 사진에 취미를 붙여 전문가 뺨치는 사진 실력을 자랑하지요. 예전에 박이사장님의 사진 전시회에 갔었던 것이 기억나네요.

 

이처럼 행복편지 책자에 실린 글들은 박이사장이 매일 보내오는 행복편지 가운데서 고른 것이라, 제가 행복편지 책자를 펼칠 때에는 이미 번개글로 한 번 보았던 글들을 다시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행복에 관한 소중한 글들이라 다시 보아도 감동이네요. 이번 열다섯 번째 이야기에서는 특히 위 글이 다시금 나의 가슴을 진하게 때려 여기에 소개해봅니다. 두 개 다 가지면 행복하니? 늘 이 물음을 제 가슴 속에 담고 살아야겠습니다. 박이사장님! 2003년부터 행복편지를 보내기 시작했으니, 벌써 올해 20년이 되었네요. 20년 동안 쉬지 않고 메일을 보내주신 그 정성에 경의를 표합니다. 《행복편지 열다섯번째 이야기》 잘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