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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국민 총생산으로 잴 수 없다

이뭐꼬의 구도이야기 4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밤 9시 30분이 넘자 기도와 간증 순서가 되었다. 제일 먼저 공동체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태백산 정상에 있는 단군성전을 방문한 이야기를 하였다. 발표자는 여성이었는데 단군 성전을 무슨 사교(邪敎)의 거점처럼 여기는 것 같아서 별로 공감이 가지 않았다. 그다음은 예수원에서 한 달 장기 체류를 허가받은 한 신학생이 자기의 신학적인 고민을 이야기하였다. 내가 젊었을 때 겪었던 고민을 회상시키는 간증이었다.

 

다음은 몽골에서 선교사로 일하다가 잠시 귀국한 젊은 선교사가 간증을 하였다. 낯선 선교지에서 겪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재미있게 소개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우리 돈 1만 원이면 몽골에서는 한 달 생활비가 된다고 한다. 결론으로 그는 불쌍하고 가난한 몽골인을 돕고, 선교를 열심히 하자고 호소하였다. 몽골 사람들이 가난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으나, 그러니까 불쌍하고 불행하다는 관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가난은 경제적인 척도이지만 행복이란 물질적인 척도라기보다는 정신적인 만족도라고 볼 수 있다. 1인당 국민 소득이라는 척도로 재는 가난을 국가 사이에 견줄 때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중국인 한 달 봉급이 우리 돈으로 3만 원이고 우리나라 근로자 평균 소득이 150만 원이면, 우리는 중국 사람보다 50배 더 부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비슷한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하여 드는 비용을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쌀 1가마를 사기 위해 필요한 돈의 액수를 견준다면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이 부자라고 뽐내지는 못할 것이다. 일본의 경우 나라는 부자인데 개인은 가난하다고 말하지 않는가 말이다.

 

또한 행복을 돈으로 견주는 것은 적절치 못한 정도가 아니라 어리석다고 말할 수 있겠다. 1인당 소득이 최하위권인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아시아에서 행복도는 가장 높았다는 보도가 있었다. 가장 소득이 높은 미국 사람들 가운데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비율은 방글라데시보다도 훨씬 낮다는 것도 보도된 적이 있다. 통계상으로 세계에서 가장 국민 소득이 낮은 부탄의 왕이 “행복은 국민 총생산으로 잴 수 없다”라고 큰소리쳤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가난한 나라 몽골에 우리가 선교사를 보내어 그들을 영적으로 일깨워야 한다는 주장에도 나는 동의하기 어렵다. 자연환경과 역사, 그리고 문화가 다른 몽골을 굳이 기독교로 개종시킬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이러한 나의 주장은 기독교 신학자들이 들으면 신학적으로 반박할 수 있겠지만, 역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양문명이 과학 기술을 발달시킨 뒤에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를 짓밟는 과정에서 기독교가 과연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를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강연자의 발언을 그저 “아멘!” 하면서 받아들이지 않고 자꾸 비판적인 관점에서 분석하며 들으니 지루해지기 시작하였다. 은사 예배는 이런 식으로 새벽까지 계속된다고 하니, 더 이상 참지 못하고 11시 무렵 슬그머니 나와 버렸다. 밖으로 나오니 하늘에는 별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도시에서는 대기 오염과 조명 때문에 별 보기가 어려운데, 예수원은 깊은 산속에 있어서 문을 나서서 하늘을 바라보자마자 별들이 금방 쏟아질 듯이 가까이서 반짝이고 있었다. 모처럼 느끼는 황홀한 밤이었다. 상쾌한 밤공기를 마시며 서서히 걸어 숙소에 도착해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은 금요일, 새벽 5시 반에 기상하였다. 나이가 들면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들어서 나는 시계의 도움 없이 일찍 일어날 수 있다. 새벽 기도인 조도는 6시에 시작되었다. 예수원은 성공회라서 그런지 용어가 천주교나 다른 기독교와 견주어서 달랐다. 새벽 예배는 조도, 점심 예배는 대도, 저녁 예배는 만도라고 부른다.

 

예수원의 조도는 개신교의 새벽 기도와도 조금 달랐다. 하나님 대신 천주님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조도 중에 치는 종은 천주교 예식과 같은 느낌이었다. 조도는 찬송가를 부르며 시작되었다. 그다음 <시편> 가운데서 두 편을 골라 읽고, 이어 구약 성경 중에서 1장, 신약 성경 중에서 1장을 읽었다. 목사님의 설교는 없었다. 방금 읽은 성경 가운데에서 가슴에 와닿는 구절에 대하여 참석자들이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기도집에 있는 기도문을 읽는 것을 마지막으로 조도는 1시간 만에 끝났다. 목사님의 설교가 중심인 기독교의 새벽기도와 달리 예수원의 새벽기도는 신도들의 자유발언이 중심이어서 매우 민주적인 새벽기도라고 말할 수 있겠다.

 

아침식사 역시 반 공기의 밥과 국 그리고 간단한 반찬 2가지로 소식이었다. 나는 평소에도 소식을 하므로 예수원의 간단한 식사가 괜찮았다. 그러나 밥을 많이 먹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원의 식사는 견디기가 매우 어려울 것 같았다. 식사 끝에 안내자는 8시에 작업을 개시한다고 공고를 하였다. 작업은 필수가 아니고 선택 사항이므로 원하지 않는 사람은 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아침 8시에 식당인 나사렛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아마도 아침식사 인원의 2/3 정도가 되었다. 안내자가 시범을 보이는 간단한 요가 체조를 모두가 따라서 하였다. 몸을 풀어 주는 운동이 끝나고 안내자는 오전에 할 일의 종류를 알려 주었다. 목공일, 세탁, 화단 정리, 청소, 풀 뽑기 중에서 자기가 원하는 작업을 선택하여 지정된 장소로 모이라고 한다. 나는 가장 쉬워 보이는 풀 뽑기 작업에 지원하였다.


 

 

십여 명이 풀 뽑기 작업에 지원했는데, 나는 빨간 티셔츠를 입은 목사님과 한 조가 되었다. 젊은 목사님은 전라도 광주 한빛교회에서 청년부 수련회를 인도하여 어제 도착하였다고 한다. 풀 뽑기 작업은 별로 힘든 일이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작업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목사님은 부목사로서 청년부를 지도하고 있는데, 청년들이 대학교에 들어가면 신앙에서 자꾸 멀어져서 큰일이라고 걱정하셨다. 나도 고등학교 때는 천주교회에 다니면서 학생회 간부로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대학교에 들어가서 교리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점이 머리를 들고 결국은 신앙심이 식었던 경험이 있다. 천주교에서는 신앙심이 식는 현상을 냉담이라고 한다.

 

목사님은 나더러 교회에 나가느냐고 물었는데, 내가 홍정길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강남구 일원동에 있는 남서울 은혜교회에 나간다고 말하니 갑자기 태도가 달라진다. 그는 홍 목사님의 명성은 광주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고 칭찬한다.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아져서 내가 알고 있는 홍 목사님의 여러 가지 훌륭한 모습을 이야기해주었다. 우리 교회는 그렇지 않은데, 서울에 있는 여러 대형 교회는 돈 문제, 세습 문제, 여자 문제 등 문제점이 많은 것 같다고 이야기하자 그 목사님 역시 성장 위주의 교회가 가진 문제점을 익히 알고 있다고 말하였다.

 

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여러 측면에서 토론 겸 대화를 나누었다. 두 사람이 내린 결론은 목회자는 가난한 삶을 시범적으로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자동차만 해도 그렇다. 나는 소형차인 프라이드를 타고 다니면서 십일조를 꼬박꼬박 교회에 바친다. 물론 내가 바치는 것이 아니다,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아내가 바치고 나는 간섭하지 않는다. 그런데 만일 목회자가 벤츠 같은 고급 외제차를 타고 다닌다면 나는 기분이 별로 좋을 것 같지 않다.

 

다행히 내가 다니는 교회에는 벤츠를 타고 다니는 목회자가 없어서 아직은 기분이 나쁘지 않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가장 모범이 되는 목회자는 고 한경직 목사님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알기로 그분은 늙어서 추한 모습을 보이기 전에 은퇴하셨다. 그 뒤 남한산성 내에 있는 작은 기도원에서 검소하게 살다가 생을 마치셨다. 세습은커녕 목사인 아들을 미국에서 아예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셨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지 이천 년이 지났다. 많은 사람은 지금 자기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의 설교가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 정확히 표현하면, 목사님의 설교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목사님의 해석이라고 보아야 한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내용은 신약 성경 중에서도 4권(마태오, 마르코, 누가,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4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은 따옴표로 인용되어 있다. 누구나 정말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려면 목사님의 해석보다는 따옴표로 인용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읽어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읽어 본다면 우리나라 많은 교회에서 신도들이 듣는 목사님의 성경 해석이 기복적이며 때로는 독선적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이비 종교 수준은 아니더라도 목사님이 예수님의 말씀을 왜곡시켜서 전달하고 있는 예도 있다고 생각된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예수원의 새벽기도가 목사님의 설교 대신 신도들의 자유 발언 중심으로 구성된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