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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만난 1996년은 아름다운 해였습니다

무심거사의 중편소설 <열 번 찍어도> 27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몇 시간 동안 부담 없이 즐겁게 지냈다. 술값은 공통 경비에서 부담하고 팁은 각자 알아서 주기로 했다. 기분이 좋으면 많이 주고 아가씨가 그저 그러면 기본만 주고 각자 알아서 할 일이다. 유성은 서울에 비하여 팁값이 좀 싸서 기본이 5만 원이라고 한다. 김 이사는 최 진희와 헤어지면서 “오늘 진희와 즐거웠어요”라고 말하면서 흰 봉투를 주었다. 그러면서 봉투를 나중에 열어보라고 말했다.

 

최 진희는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서 봉투를 받았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아가씨가 봉투를 열어보니, 봉투에는 현금 5만 원과 5천 원짜리 도서교환권 두 장이 들어 있었다. 유성에 다시 내려오기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김 교수는 아가씨의 전화번호를 묻지 않았다. 아가씨에게 명함을 주지도 않았다. 아가씨도 김 이사의 전화번호를 묻지 않았다. 가벼운 인사만 하고 헤어졌다.

 

밤늦게 호텔로 돌아와 집 떠난 남자들은 모두 오랜만에 잘 잤다. 이튿날 아침에 햇님이 동쪽 창을 두드릴 때쯤 일어나 유성에 있는 군인휴양소(일반에게도 공개되고 있었다)에 가서 사우나를 했다. 사우나에서 벌거벗고 목욕을 같이 하니 교수들 사이의 친목이 더해지는 것 같았다.

 

간단히 아침 해장국을 먹고서 커피를 마시면서 학과 운영에 관련된 이야기를 좀 했다. 그래야 유성에서 세미나 했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고 사실이 될 것이다. 유성 세미나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 사항으로서 다음 세미나는 내년 1학기가 끝나는 6월에 치악산 근처에서 하자는 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원주가 고향인 장 교수가 세미나 준비를 하기로 결정했다.

 

김 교수는 사당역까지 다른 교수의 승용차에 함께 타서 오고 사당에서 2호선 전철을 타고서 잠실로 갔다. 시간이 조금 남아서 김 교수는 잠실역 지하상가를 둘러보았다. 토요일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았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징글벨 소리가 요란했다. 김 교수는 책방에 들러 미스 최에게 줄 선물을 골랐다. 마침 <방통대 이야기>라는 제목의 책이 눈에 띄었다. 사회 저명인사 가운데 방통대를 졸업한 사람들의 억척같은 성공 사례들을 모은 책이었다. 방통대를 중퇴한 미스 최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책을 샀다. 예쁜 크리스마스카드 한 장을 사서 끼워 넣었다. 거기에다가 도서교환권 두 장을 사서 봉투에 같이 넣었다.

 

미스 최는 늦지 않고 4시 반에 호텔 커피숍에 나타났다. 유성의 최진희하고 견줘 보니 세련미가 있어 보였다. 역시 예쁜 여자는 서울에 다 모여 있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다. 김 교수는 유성에 갔다 온 이야기를 하고, 미스 최는 어젯밤 짓궂은 손님을 만나서 애를 먹었다고 이야기했다.

 

술집에 오는 손님 중에는 김 교수처럼 점잖은 손님은 소수이고 대개는 술자리가 진행될수록 짓궂어진다고 한다. 자꾸 옷을 벗기려고 하고, 폭탄주를 연거푸 먹여 해롱대는 모습을 보려고 하는 손님들이 많다고 한다. 그렇겠지. 옛말에 있지 않는가.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먹고, 시간이 지나면 술이 술을 먹고,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먹고. 김 교수는 커피를 마시면서 공감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간간이 추임새를 넣으면서 미스 최의 하소연을 들어 주었다.

 

그날은 미스 최가 출근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집을 한 번 보여 달라고 했더니 싫다고 한다. 남동생하고 사는데 지금 동생이 집에 있어서 나중에 한 번 집으로 초대해 자기가 잘 끓이는 매운탕을 한 번 대접하겠단다. 남동생이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직장 다니다가 요즘은 몸이 아파서 치료받으면서 쉬고 있단다. 어머니는 2년 전에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봉천동에 사시는데 재혼하여 새엄마가 들어왔다고 했다. 자기는 가끔 아버지 집에 가는데 새엄마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한다.

 

저녁 8시에 교회에서 아내를 만나기로 했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너무 늦으면 안 될 것 같아서 6시쯤 커피숍을 나왔다. 미스 최는 계단을 내려오면서 팔짱을 끼었다. 김 교수는 팔장을 뿌리치지 않았다. 지난번에는 어색했었는데, 두 번째는 그렇지 않았다. 지난번에는 팔짱 끼는 것을 누가 볼까 봐 얼마나 쑥스러워했던가? 사람이란 그렇게 간사한 것이다.

 

바람둥이 친구의 말을 들어보면, 아무리 정숙한 여자라도 처음 문턱을 넘기가 어렵지 한번 문턱을 넘으면 그다음부터는 아주 쉽게 문턱을 드나들 수 있다고 한다. 남자의 심리도 그럴 것이다. 김 교수의 팔장도 마찬가지이다. 두 번째는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김 교수는 팔짱을 끼고 계산대까지 가서 팔짱을 낀 상태로 카드로 사인하고 계산을 끝냈다.

 

 

김 교수는 이제는 출근해야 하는 미스 최와 헤어지면서 준비한 책과 카드를 주었다. 미스 최는 놀라는 표정이더니 이내 환하게 웃으면서 “고마워요. 오빠!”라고 다정스럽게 말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김 교수는 가볍게 악수하고서 “아리랑 제5권을 끝내면 전화해”라고 말했다. 크리스마드 카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당신을 만난 1996년은 아름다운 해였습니다.

1997년 새해에도 언제나 몸은 건강하고 마음은 행복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