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답사 날짜: 2024년 7월 1일(월)
답사 참가자: 김수용, 김혜정, 송향섭, 윤석윤, 이상훈, 최동철, 황병무 (7명)
답사기 쓴 날짜: 2024년 7월 7일
효석문학100리길 제5-2구간은 평창 바위공원에서 평창 전통장에 이르는 거리 약 4.5km 구간이다. 평창군 발행 소책자에서 제5-2구간은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수석바위 테마공원인 평창바위공원을 둘러보고 장암산이 병풍처럼 펼쳐진 평창강을 따라 걸으며 강변의 정취를 즐기고 숲길을 따라 삼림욕을 즐기면서 평창 전통장과 공연장에 이르는 길이다.
평창바위공원에서 아침 9시 10분에 7명이 출발하였다. 장마전선이 북상하면서 전날까지 평창에도 비가 쏟아져서 걱정했었다. 다행히 장마전선이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평창 지역에 비는 오지 않았다. 구름이 조금 끼면서 날씨가 흐렸다. 여름이 시작되었지만, 기온은 23도 정도로 그리 높지 않고 걷기에 좋은 날씨였다. 전날 쏟아진 비로 평창강물이 불어나 물소리가 요란했다. 강폭이 많이 넓어져서 풍성한 평창강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효석 이야기를 마저 하자. 효석은 나이 33살이던 1940년에 부인 이경원과 사별하였다. 그런데 부인이 저세상으로 간 뒤, 효석이 기생 출신 가수 왕수복(王壽福, 1917~2003)과 인연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2016년 9월 4일 자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소개되었다. 왕수복은 1942년에 이효석이 병사할 당시 임종을 지켰던 여인으로 알려져서 화제가 되었다.
왕수복은 1917년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화전민의 딸로 태어났다. 왕수복은 11살 때인 1928년에 3년제 기생학교에 다니면서 시(詩), 서(書), 화(畵)와 소리를 배웠다. 왕수복은 16살인 1933년 컬럼비아 레코드사에서 낸 ‘울지 말아요’, ‘한탄’ 등으로 데뷔했다. 왕수복은 체격이 좋은 데다 목소리가 우렁찼다고 한다.
1935년에 월간지 《삼천리》가 가수들의 인기투표를 했다. 독자 투표로 남녀 가수 각각 5명을 뽑는 방식이었다. 남자 가수 1위(1,844표)에 함흥 출신으로 채규엽이 뽑혔다. 여자 가수 1위에 18살 왕수복이 뽑혔는데, 1,903표를 얻었다. 남녀 통틀어 1위를 왕수복이 차지한 것이다. 그 뒤 <고도(孤島)의 정한(情恨)>이라는 제목의 노래 음반은 120만 장이라는 사상 가장 많은 판매를 기록하면서 왕수복은 스타로 떠올랐다. 이효석이 생전에 들었을 왕수복의 인기 가요를 과학기술의 발달로 복원하여 21세기를 사는 독자 여러분도 아래 유튜브에서 쉽게 들어볼 수가 있다.
인기 절정을 달리던 왕수복은 19살이던 1936년 일본으로 음악 유학을 하였다. 동경에서 성악가였던 요시코에게 개인교습을 받으며 왕수복은 메조소프라노로 변신했다. 왕수복은 일본 유학 중 잠시 귀국해 언니가 운영하던 평양의 ‘방가로(放街路)’ 다방에 놀러 다녔다.
이효석은 1940년 2월에 아내와 둘째 아들이 잇따라 세상을 떠나면서 좌절하며 방황했다. 이효석은 평양의 음악다방을 순례하던 클래식 광(狂)이었다. 1940년 10월, 방가로 다방에서 요즘 말로 하면 돌싱이 된 이효석을 만난 왕수복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왕수복은 남편감으로 ‘(수입은 적어도) 문사(文士)가 좋다’라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발언한 적이 있다. 그녀는 책을 많이 읽었으며 지식인을 선망했다. 그렇지만, 왕수복과 이효석의 꿈같은 연애는 오래 가지 못했다. 이효석은 건강이 좋지 않았다.
1942년 5월 결핵성 뇌막염으로 병원에 입원한 이효석의 곁을 왕수복이 지켰다. 그녀는 효석의 병실을 붉은 카네이션과 하얀 글라디올러스 같은 화려한 서양 꽃으로 장식했다. 왕수복(당시 25살)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효석(당시 35살)은 눈을 감았다. 그의 임종 앞에서 그녀는 이렇게 흐느꼈다.
“나는 오래전부터 소설가 남편을 만나 소설처럼 결혼 생활을 해보는 것이 소원이었지요. 꿈처럼 당신을 만나고 나는 그 꿈속에 들어가 2년을 살았습니다. 내가 태어나 오로지 존경하고 사랑했던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의 교양과 인격을 생각한다면, 나는 감히 당신 곁에 잠시 머무르기도 벅찬 존재였지요. 짧았지만 나를 깊이 아껴줘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나를 좋아하였을까요? 돌아간 아내에게서 느꼈던 모습과 향기를 나에게서 느낀 것 같다고 당신은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아내에게 미안해서 그러신 것일 겁니다. 그래야 내게 쉽게 다가올 수 있으니까요. 당신은 나를 정말 사랑하였나요? 아내가 아닌 여인 왕수복으로 나를 예뻐했나요?”
이효석은 죽기 4개월 전인 1942년 1월에 발표한 단편 소설 <풀잎>에서 왕수복과의 사랑을 모델로 한 이야기를 남겼다. 1945년에 광복이 되면서 왕수복은 평양에 남았다. 왕수복은 14살 연상인 김일성대학 경제학 교수 김광진과 결혼을 하였다.
1953년 가수로 복귀한 왕수복은 1955년 북한이 소련에 파견한 예술단에 포함되었다.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와 카자흐스탄의 알마티 공연에서 고려인들은 왕수복의 노래에 열광했다. 공훈 배우가 된 왕수복은 북의 ‘체제 가수’로 깍듯한 대접을 받았다. 1977년 그녀의 환갑날에 김일성은 환갑상을 차려 보내주었다. 1997년 팔순에는 김정일이 생일상을 보내주었다. 2003년 왕수복은 86살의 나이에 세상을 뜨고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지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때에 북한의 예술단장 현송월은 삼지연 관현악단을 이끌고 올림픽 행사에 참여하였다. 현송월은 언론의 집중적인 취재를 받아 우리 국민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현송월의 음악 스승이 바로 왕수복이었다.
왕수복은 한반도가 분단된 이후 평양교향악단의 가수로, 그리고 평양음악대학의 민족성악 교수로 활동하였다. 북한의 창법은 비음을 강하게 섞은 가성으로 우리 기준에서 보면 매우 어색하게 들린다. 이러한 창법을 북한에서는 ‘주체적 창법’이라고 부르며 특유의 맑고 높은 발성법을 ‘꾀꼬리 발성’이라고 한다. 꾀꼬리 발성을 시작한 사람이 바로 왕수복이다.
이효석은 1942년에 죽었지만, 효석의 고향 봉평에서는 1999년부터 매년 효석문화제를 열어 그를 기리고 있다. 평창군에서는 2012년에 효석문학100리길을 만들었다. 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을 읽은 사람은 100리길을 따라 걸으면서 이효석을 생각하고 허생원의 물방앗간 사랑을 생각한다. 100리길을 걷는 사람은 차를 타고 빨리 갈 때는 안 보이는 평창의 수려한 강과 산, 그리고 나무와 풀꽃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한다.
효석과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 왕수복은 2003년에 죽었다. 그러나 그녀가 남긴 꾀꼬리 창법은 지금도 북한의 어린이들이 열심히 배우고 있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라는 옛말이 있다. 이효석과 왕수복은 죽었지만, 이름은 남았으니 헛된 삶을 산 것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제 답사기로 돌아가자. 우리는 돌문화체험관의 주차장에서 만났는데, 마침 월요일이어서 휴관이었다. 나는 여러 번 돌문화체험관을 관람했는데 쉽게 말해서 수석박물관이다. 수석은 한자(漢字)로 물 수(水) 자가 아니고 목숨 수(壽) 자 ‘수석(壽石)’이다. 바위공원은 정원석 박물관이다. 수석과 정원석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람이 손으로 들어 옮길 수 있는 크기의 돌을 수석이라고 하고, 너무 무거워서 손으로 옮길 수 없으면 정원석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황병무 선생이 앞장서서 우리를 돌문화체험관 뒤쪽의 생태정원으로 안내했다. 데크길을 따라가다가 한 그루 나무 옆에 섰다. 소태나무라고 한다. 가는 줄기를 조금 꺾어서 혀로 맛보라고 한다. 쓴맛이 났다. 쓴맛의 여운이 아주 오래간다. 우리말 표현 중에 “소태처럼 쓰다”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는 현장학습을 한 셈이다.
효석문학100리길은 2012년에 조성되었다. 그 당시에 제5-2구간은 바위공원에서 출발하여 평창강의 오른쪽 길을 따라 시내로 진입하도록 설계하였다. 그러나 2019년에 평창강의 왼쪽 장암산 쪽으로 ‘평화길’이라는 이름으로 1.7 km 데크길을 새로 만들었다. 평창군 발행 지도에 나와 있는 100리길은 찻길을 따라간다. 우리는 찻길 대신 평창강을 구름다리로 건너가서 평화길을 따라 상리 쪽으로 가기로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