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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다시 뻐꾸기가 왔구나

탁란하는 뻐꾸기, 그들의 값어치를 생각하고 대접해 주자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306]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다시 아침 산책길에 뻐꾸기 소리가 들린다. 뻐꾸기가 내는 소리는 우리 한글이 가장 잘 표기할 수 있다는데 중국 한자어로 뻐꾸기 울음소리 ‘뻐꾹’을 형상화한 의성어 '벌곡(伐谷)'이라고 하거나 '포곡(布穀)포곡(布穀)' 한다지만 우리 귀에는 분명히 '뻐꾹뻐꾹'이라고 들린다. 이 뻐꾸기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은, 그동안 이미 지난달 와서 가끔 울어주었지만, 귀담아듣지 못한 것은 숲 바깥세상에서 벌어지던 정치적 회오리에 대해 우리들이 전혀 무관심하지 못했던 때문이 아닌가?

 

어찌 됐든 이제 정치판에 그동안 전쟁 같은 격전이 끝나고 세상이 조용해지고 있기에 비로소 그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런저런 연유를 넘어서서. 우리 아파트 단지 아래쪽에서 먼저 시작하다가 나중에 숲길 중반에까지 와서 울어주는 뻐꾹새가 우리 부부는 반가운 것이다. 어제는 그냥 흔히 하는 '뻐꾹 뻐꾹'이 아니라 '뻐뻐꾹 뻐꾹'을 연달아 내곤 해서 이들이 춘정을 나누고 있는 것인가 생각이 돨 정도였다.

 

 

 

 

뻐꾸기는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소리는 명확한데, 저녁때 이 소리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영국의 시인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1850)가 되어버린다.

 

해가 벌써 지고 나니

별들이 두셋씩 나와 있네

작은 새들은 숲속에서 나무에서

여전히 지저귀고 있구나

아 저기 뻐꾸기, 그리고 개똥지빠귀들

저 멀리서 바람도 불어오고

물 솟아 흐르는 소리도...

뻐꾸기 목소리는 왕의 그것인 양

빈 하늘에 울려 퍼지네

                           ..... 워즈워스, '해가 벌써 지고나니' ​

 

친구들한테 늘 자랑하지만, 서울에 살면서 집 바로 옆에서 뻐꾸기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행운 중에 그런 행운이 없다. 수십억짜리 비싼 집이면 무엇하겠는가? 그런 집들은 다 이른바 반포니 강남이니 잠실이니 하며 수십미터 높이의 건물들이 벽이 되어 서 있는 아파트 밀집지구에 있으니 제아무리 집이 비싸도 북한산 자락의 이 숲옆 아파트에서처럼 숲에서 뻐꾸기 우는 이런 소리는 꿈도 꿀 수 없을 것이니 말이다. ​

 

이런 곳에서 자주 워즈워스처럼 시가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일찌기 진(晉)나라 대옹(戴顒 377-441)은 봄날에 감귤 두 개와 술 한 말을 가지고 어디론가 급히 가는 것을 보고 이웃이 어딜 그렇게 가느냐고 묻자, 대옹이 “꾀꼬리 소리를 들으러 간다. 그 소리는 속된 귀를 치료해 주고 시심을 고취시킨다.〔往聽黃鸝聲 此俗耳針砭 詩腸鼓吹〕”라고 하였다는 말이 《사문유취(事文類聚)》, 《운선잡기(雲仙雜記)》등에 나오는데, 나는 꾀꼬리 소리보다는 뻐꾸기 울음소리가 더 시심(詩心)을 자극한다고 생각한다. 이때 대옹은 원문을 보면 시심이 아니라 시장(詩腸)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그림을 잘 그리는 겸재(謙齋) 정선(鄭歚 167~1759)이 자기 시와 다른 사람의 그림을 비교하면서 ​

 

我詩君畵換相看 내 시와 자네 그림 서로 바꿔 볼 적에

輕重何言論價間 둘 사이 경중(輕重)을 어찌 값으로 따지겠나

詩出肝腸畵揮手 시(詩)는 간장에서 나오고 그림은 손으로 휘두르는데

不知難易更誰難 모르겠네. 누가 더 쉽고 누가 더 어려운지를!​

 

라고 하였고, 세 번째 줄 원문에 '시가 간장에서 나온다'라고 하였는데 일반적으로 이를 시심이라고 번역하는 것을 보면, 시는 머릿속으로만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뱃속을 거쳐 나와야 한다는 뜻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쓴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뻐꾸기 소리를 들으면 배의 울림을 통해서 시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

 

이런 뻐꾸기 소리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산 옆 숲에서나 듣는 소리인데, 나이 들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병원도 가까이 있는 도시지역 산기슭에서 이런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음에랴. 이런 곳이 집값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이유를 잘 모르겠다.

 

 

 

다만 우리가 뻐꾸기 소리에 빠져 이 새의 본 얼굴을 보지 않고 넘어가는 것은 좀 미안한 일이 될 것이다. 딱새나 제비, 개개비 등 몸집이 작은 일부 새들은 사람이 사는 담벼락이나 쌓아놓은 장작더미 틈, 심지어 실내로 들어와 헛간의 선반 구석이나 자동차 내부에 둥지를 틀기도 하는데 이들이 왜 민가 근처에 오는가 하면 바로 뻐꾸기의 얌체 짓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무슨 말인가 하면 뻐꾸기는 탁란(托卵) 이라는 절묘한 방법으로 삶을 살아간다. 뻐꾸기는 이들 작은 새들의 둥지에 자기 알을 몰래 낳고는 일부러 모른 체 해서 자기 알을 이들 새가 부활시키고 먹이도 주게 하는, '탁란(托卵)', 곧 ‘알을 남에게 맡킨다’는 뜻의 방법을 쓴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집만 빼앗고 자기 알을 다른 새한테 키우라고 하는 것만이 아니란다. 깨어난 뻐꾸기 새끼는 숙주가 되는 새의 알이나 새끼를 모두 제거하고 그 새가 자기 새끼를 돌보도록 한다고는 것이다. 숙주 새는 제 자식을 잃는 동시에 천적의 새끼를 정성껏 기르는 이중의 타격을 받는다. 다시 말하면 작은 새들은 남의 자식을 자기 자식처럼 키워주고 있고, 뻐꾸기는 그냥 알만 낳고 가고 육아는 다른 어미새가 다 해주기 때문에 육아라는 힘든 수고를 들이지 않고도 종족보존을 할 수 있다. 이거 참. 이렇게 아주 염치없고 도덕심이 없는 얌체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뻐꾸기라는 것 아닌가.

 

그러기에 이런 뻐꾸기의 속성을 모르고 그 목소리만 아름답다고 좋아하는 것은 그 탁란을 당하는 새에게는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찌 보면 좋은 일을 잘하겠고 온갖 갖은 목소리로 사람들을 현혹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이나 자기들만의 이익을 도모하는 정치인들이 생각나는 순간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뻐꾸기들은 나쁘고 탁란 당하는 새들은 착하다고 딘정하고는 앞으로 뻐꾸기 소리를 안 듣겠다고 결심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뻐꾸기는 뻐꾸기대로 좋은 목소리로 봄철부터 여름까지 노래하라고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고, 다른 작은 새들은 그렇게 자기 알인지 아닌지도 분간하지도 않고 이 숲의 생명들을 키우라는 운명을 받아 그 속에서 또 나름대로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이런 뻐꾸기의 사는 방법을 우리 인간의 도덕적인 잣대로만 판정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우리가 그런 점을 모르고 뻐꾸기만을 좋아하면 그것은 탁란을 당하는 작은 새들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우리 인간의 가치기준을 그 생태계에 개입하는 것은 옳지 않은 듯하다. ​

 

기왕에 뻐꾸기의 삶을 긍정하니 이런 생각도 든다. 우리가 숲의 이로움을 새삼 말할 필요가 없지만 사람들은 왜 숲에서 가까운 곳에서 살 수 있는데도 멀리 시멘트 숲속에서 살려고 하는가? 잘 보면 거기에는 온갖 이유가 등장한다. 교통이 불편하다, 차가 막힌다. 학군이 안 좋다. 집값이 안 오른다.... 등등 이런 이유들은 자연과 가까운 곳에서 뻐꾸기 소리를 들으며 시심을 일깨우는 평화로운 삶을 거부하고 더 많은 금전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것인데 여기서도 그런 도시민들의 마음을 비난할 수는 없다. 다만 그들이 아름다운 삶을 두고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 살기를 선택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쉽다는 마음을 그칠 수 없다는 것이다.

 

 

몇 년 전에 알게 된 것이지만 집 옆 둘레길을 조금 더 가다가 본 영국의 시인 벤 존슨(Ben Jonson 1572-1637의 시가 있다. <고귀한 자연>이란 제목으로 숲속의 삶을 그린다.

 

아주 큰 나무처럼 커야만

휼륭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야

300년이나 된 저 오랜 참나무를 보게나

오랜 시간 지나면 결국엔 말라 쓰러지지 않나... ​

 

그날의 꽃이라고 할 저 백합도

오월에 더 아름답기는 하지만

밤에는 지고 죽곤 하는 것이지

빛을 받는 모든 식물, 꽃들은 다 그렇다네 ​

 

작은 비율 속에서 아름다움을 본다면

작은 단위로도 우리 삶은 더 완전할 수 있다네

                              .... 벤 존슨, 고귀한 자연(The Noble Nature)

 

 

옛사람들은 뻐꾸기가 사람들에게 무언가 말을 하는 것으로 보고, 뻐꾸기처럼 누군가가 바른말을 해주고 그것을 듣고 하는 아름다운 정치를 희망하기도 했다고 하니 이쯤에서 뻐꾸기도 그 행실보다는 역할의 값어치를 생각하고 대접해 주자고 제안하고 싶다.​

 

숲으로 뻐꾸기 소리를 들으러 가면 그저 세상에서의 잇속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생명들과 하나가 되어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리면 되는 것이다. 말로만 세상에 정의를 실천한다고 온갖 명분과 감언이설을 내놓다가 정작 그동안의 잘못이 드러나면 또 다른 거짓말과 뻔뻔함을 내세우는 사람들을 보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들의 요란한 변명이나 거짓 눈물에 지친 사람들은 이 숲을 찾아 뻐꾸기의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귀와 마음이 씻을 것을 다시 제안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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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인문탐험가

전 KBS 해설위원실장
현 우리문화신문 편집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