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윤지영 기자]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고 피난길에 올랐다. 전쟁으로 인하여 한반도 전역이 포화에 휩쓸렸지만, 그 와중에도 교육에 대한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전쟁 처음에는 각급 학교에 무기한 휴학 또는 수업 정지가 내려졌으나, 문교부는 1·4 후퇴 뒤 1951년 1월 20일에 통첩을 보내 피난 온 학생을 피난지 소재의 각급 학교에 등록, 수용하고자 했다.
뒤이어 문교부는 1951년 1월 26일 전시교육방침을 제시하였다. 이 방침에서는 정기적인 교육은 불가능하지만, 2월 10일에 전국적으로 개학하겠다는 점, 시설이 부족한 경우에는 숲속, 개천 주변, 광장 등을 선택하여 수업을 계속할 것이라는 점 등을 분명히 하였다. 이후 다시 ‘전시하 교육 특별조치요강’을 발표하여 피난민을 위한 피난특설학급을 개설할 것 등을 지시하였다. 이른바 ‘전시교육’의 시작이었다.
근대기록문화 아카이브로 본 한국전쟁의 또 다른 모습
한국국학진흥원이 운영하는 근대기록문화 아카이브에는 전쟁 중의 일상을 담은 사진들이 다수 보관되어 있다. 백선엽의 제1군단장 시절 사진부터 참전용사의 제대증서, 참전유공자의 공적조서에 이르기까지 기존에 소개되지 않았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자료들이 다수 업로드되어 있다.
근대기록문화 아카이브에는 전쟁 이전 혹은 전쟁 시기의 교육과 관련해서도 주목할 만한 자료들이 다수 있다. 전쟁 이전 철원 인민학교의 사진이나 제주 피난민교회 유년부성가대 사진 등을 보면, 1940~50년대 교육의 현장이 사진에 자세히 드러나 있다. 근현대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근대기록문화 아카이브는 한국 근현대사의 보고라고 할 만하다.
근대기록문화 아카이브 속의 피난학교
한국전쟁 중 임시수도가 부산이었기에, 피난학교와 관련된 정책은 부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피난학교가 부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며 포로수용소가 있었던 거제도 등 곳곳에 피난학교가 있었다. 피난학교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자료가 부족하기에, 그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신문 기사 이외에 구술이나 민간 자료에 상당 부분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피난학교와 같은 주제의 경우, 근대기록문화 아카이브를 활용한다면 그 양상을 더욱 풍부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근대기록문화 아카이브에는 함경도 피난민 출신인 사진 소장자의 아버지가 피난학교였던 북성공민학교에서 교사로 있었을 당시 사진들이 있다. 이 사진들을 보면, 당시 피난학교의 건물이 어떠했는지,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피난학교에 다녔는지를 볼 수 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교육을 포기하지 않았던 당대인들의 열망을 간접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근대기록문화 아카이브란?
한국국학진흥원은 2021년부터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으로 민간 근대기록문화 조사사업을 진행하였다. 전국 곳곳에서 활동하는 근대기록자료 조사원들은 1910년부터 1979년까지의 민간 기록자료를 조사하고, 이를 디지털화하여 기록하고 있다.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은 60만 건을 웃도는 자료를 지니털로로 구축한 상태이며, 이 가운데 공개 가능한 자료들은 <근대기록문화 아카이브(https://modern.koreastudy.or.kr)>를 통해 누구나 활용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
한국국학진흥원 관계자는, “근대기록문화 아카이브에서 한국전쟁과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하며 한국전쟁 중의 생활상을 보다 분명히 파악할 수 있었다. 앞으로 본원에서 수집, 보관하고 있는 자료들을 적극 활용하여 근현대의 일상을 복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밝혔다.